1. 새벽의 불안, 잠식하는 기운
해묵리 사건 이후, 민성 가족의 일상은 겉잡을 수 없는 그림자에 갇혔다. 미나는 더 이상 악몽에 시달리지 않았다. 대신 그녀의 몸은 새로운 종류의 고통과 혼란을 겪고 있었다. 깊은 잠에 빠진 그녀의 얼굴은 고요했지만, 잠결에 터져 나오는 낮고 힘찬 웅얼거림은 고통보다는 어떤 결연한 의지 같았다. 때로는 침대 위에서 번개처럼 자세를 고쳐 앉으며 허공을 응시하기도 했고, 팔을 쭉 뻗어 무언가를 잡으려는 듯 허우적대기도 했다.
방안의 공기는 평소와는 다르게 차갑고 무거웠다. 초점이 풀린 미나의 눈동자에서는 이따금 섬광이 번뜩이는 듯했으며, 주변의 작은 물건들이 아무런 이유 없이 흔들리거나 떨어지기도 했다. 단순히 지하실의 트라우마로 보기에는 너무나 비현실적인 현상들이었다. 민성은 밤마다 미나의 방을 드나들며 안절부절못했다. 딸을 구했다는 안도감은 잠시, 이제는 이 알 수 없는 존재에게 딸을 잃을지도 모른다는 공포가 밀려왔다. 그는 딸의 상태를 의사에게도 말할 수 없었다. 감히 설명할 수 없는 일들이었다. 그의 이성적 판단과 경험은 이미 해묵리에서 완전히 부서져 버렸다.
새벽녘, 거실에 앉아 잠 못 이루던 민성에게 호연이 조용히 다가왔다. 그의 손에는 낡은 서책이 들려 있었다. 며칠 밤낮 서책을 파고들던 호연의 얼굴은 야위어 있었지만, 눈빛만은 형형했다.
"아빠, 서책에서 답을 찾았어요."
민성은 초췌한 얼굴로 고개를 들었다. 호연은 떨리는 목소리로 서책의 한 구절을 읽어 내려갔다.
"옛 기록에 이르기를… 신의 부름을 받은 자, 그 피에 흐르는 기운은 때가 되면 스스로 발현(發顯)하나니, 강림(降臨)하는 신(神)의 그림자가 드리우면 육체는 혼란에 빠질 것이오… 오직 무학산 깊은 곳, 마지막 만신(萬神)의 처소(處所)에서 그 정체와 길을 알리라… 초영의 후손 중 천존장군(天尊장군)의 신명(神明)이 공명(共鳴)하는 자가 나타나거든 길을 안내하라…."
호연은 침을 꿀꺽 삼키며 덧붙였다. "미나 누나가… 천존장군의 신명을 받은 것 같아요." 그의 눈은 확신으로 빛나고 있었다. "이건 누나의 병이 아니에요, 아빠. 이건… 누나에게 내려오는 신의 뜻이에요."
민성의 손에 들린 찻잔이 '쨍그랑' 소리를 내며 흔들렸다. 그는 어이없다는 듯 호연을 바라보았다. "천존장군? 그게 무엇이고, 누구라는 말이냐? 도대체 알 수 없는 소리만 하는구나." 무속 신앙과는 거리가 먼 삶을 살아온 그에게, 호연의 말은 그저 허무맹랑한 이야기로 들릴 뿐이었다.
호연은 잠시 머뭇거리다가 서책의 다른 페이지를 펼쳐 보였다. "여기 서책에 적혀있기를… 천존장군은 하늘의 뜻을 받아 난세(亂世)를 평정하고 백성을 수호하던 장군신이라고 나와요. 아주 오래전부터 이 땅을 지켜온 강력한 존재래요. 스승님의 기록에도 몇 번 언급되어 있구요." 민성은 믿을 수 없었지만, 한편으로는 이 알 수 없는 고통에 대한 희미한 해답 같기도 했다. 그는 눈을 감았다.
2. 무학산, 귀견(鬼犬)과의 조우
며칠 뒤, 민성 가족은 허름한 차량 한 대에 몸을 실었다. 방향은 강원도 깊은 산골, 무학산이었다. 민성은 여전히 미나에게 신이 내렸다는 사실을 온전히 받아들이기 어려웠지만, 딸의 고통을 멈출 단 하나의 방법이라는 호연의 간절한 믿음에 기댈 수밖에 없었다. 미나는 약 기운 탓인지 잠이 든 채 조수석에 몸을 기댔다. 호연은 뒷좌석에서 고문서를 꽉 움켜쥔 채, 창밖의 험준한 산세를 응시했다. 서책에는 간혹 초영의 투박한 필체로 기록된 짧은 일기 같은 구절들이 있었다. 마치 옛 친구가 말을 건네는 듯, 단편적인 정보들이었다. '길이 험하더라도 마음을 놓지 말 것', '밤안개가 길을 가릴지니 불길한 짐승에 홀리지 말 것.' 같은. 하지만 무학산 깊은 곳, 마지막 도인의 처소로 향하는 길에 대한 구체적인 언급은 없었다.
산은 깊었고, 길은 거칠었다. 인적이 드문 오솔길은 이따금 맹수의 울음소리로 고요를 갈랐고, 무학산 특유의 짙은 밤안개는 길을 삼킬 듯 피어올랐다. 민성은 운전대를 꽉 쥔 채, 헤드라이트 불빛에 의지하여 겨우 차를 몰았다. 그의 등줄기에는 식은땀이 흘렀다. 도시의 거친 밤거리는 익숙했지만, 이런 압도적인 자연의 위압감 앞에서는 속수무책이었다.
바로 그때였다.
어둠 속에서 차량의 불빛을 향해, 수많은 그림자들이 번개처럼 빠르게 움직이는 것이 보였다. 분명 사람의 형상은 아니었다. 여러 마리의 들개떼인 듯했다. 그들은 차를 향해 으르렁거리며 달려들었고, 민성은 공포에 질려 반사적으로 핸들을 꺾었다. 차는 깊은 구덩이에 빠져 바퀴가 헛돌기 시작했다. 엔진음이 요란하게 울렸지만, 차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아빠, 괜찮아요?!"
호연의 목소리에 정신을 차린 민성이 고개를 들었다. 짙은 안개 속에서 수많은 들개들이 차량을 에워싸고 있었다. 사납게 으르렁거리는 소리와 함께 번뜩이는 눈빛. 민성은 숨을 멈췄다. 그의 옆구리에 놓인 총에 손이 절로 갔지만, 이렇게 많은 짐승들을 상대할 수 있을 리 없었다. 그 순간, 들개들 중 몇 마리가 차가 아닌 미나가 잠든 조수석 창문을 향해 코를 들이밀었다. 그리고는 이상하게도 더 이상 으르렁거리지 않고, 마치 강아지처럼 반가운 듯 꼬리를 흔들기 시작했다. 나머지 들개들도 사납던 기세를 거두고, 조수석을 향해 킁킁거리더니 이내 꼬리를 흔들며 작게 낑낑거리는 소리를 냈다.
민성과 호연은 어안이 벙벙했다. 그 순간, 들개떼의 우두머리인 듯한 가장 크고 털이 윤이 나는 들개 한 마리가 차량 앞에서 민성을 바라보며 낮게 '컹컹' 짖었다. 그러고는 숲을 향해 고개를 돌려 '어이, 이리로 오시오!'라고 말하는 듯이 숲을 향해 몇 번 짖었다. 들개떼는 일제히 숲을 향해 꼬리를 치며 걸어가기 시작했다. 마치 길을 안내하려는 듯, 느릿하게 걸어가면서도 민성 가족의 차량을 돌아보며 기다리는 듯한 눈빛을 보냈다. 호연은 그들의 눈빛에서 알 수 없는 충직함과 인도를 느꼈다.
3. 무학산 깊은 곳, 조우
민성은 거친 숨을 몰아쉬며 귀견들이 인도하는 길을 따라갔다.
끝없이 이어지는 오르막과 내리막, 발아래는 잔뿌리와 굵은 돌멩이가 엉겨 붙어 있었고, 발목을 삼킬 듯한 진흙과 낙엽은 걸음을 뗄 때마다 '철퍽', '바스락' 소리를 냈다. 가파른 비탈길을 간신히 지나 작은 계곡에 다다랐다. 차가운 물살이 발을 시리게 했지만, 민성에게는 잠시의 휴식도 허락되지 않았다. 품에 안은 15세 딸, 미나의 40kg은 이제 천근처럼 무겁게 느껴졌다. 온몸의 근육이 비명을 질렀고, 땀은 빗물처럼 쏟아졌다. 문득, 훈련병 시절의 악몽 같은 행군이 스치듯 지나갔다.
귀견들은 민성과 호연의 앞에 선두로 달리며 길을 안내했다. 그들은 분명 빠르게 이리 뛰고 저리 뛰며 바쁜 걸음을 재촉하는데, 아무런 발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민성은 쌔근쌔근 힘든 숨을 내뱉으며 잠들어 있는 미나를 업고 걷는 와중에도 이상함을 감지했다. 분명히 발소리가 나야 할 텐데…. 그는 문득 고개를 들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개들이 나무 사이를 미끄러지듯 스쳐 지나가는데도, 낙엽 하나 밟히는 소리 없이 고요했다.
"호연아… 저 개들…."
민성의 목소리는 불안하게 떨렸다. 그 말에 호연 역시 번뜩이는 눈빛으로 귀견들을 응시하더니, 이내 창백하게 굳은 얼굴로 민성을 바라보았다.
"아빠… 저 녀석들… 죽은 아이들이에요…."
호연의 말에 민성의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그의 얼굴은 혼란과 충격으로 일그러졌다.
"우리가 언제부터 이런 죽은 영혼들을 보게 된 거지?"
민성의 물음에 호연은 고개를 푹 숙인 채 중얼거렸다.
"아마, 누나 곁에 있어서 그런 게 아닐까요? 그… 있잖아요. 귀신 보는 사람이나, 무당과 친해지면 이상한 일도 겪고, 꿈도 꾸고, 귀신도 본다던… 그런 이야기요…"
호연은 처음에 약간 신이 난 듯 떠들어댔지만, 이내 아빠 민성의 구겨지는 인상을 보고는 눈치를 살폈다. 그의 목소리는 점점 작아지더니, 고개를 획 돌려 앞만 응시했다. 민성은 더 이상 반박할 수도, 이해하려 애쓸 수도 없었다. 알 수 없는 미지의 영역이 그의 평범한 삶을 통째로 뒤흔들고 있었다.
'쉬었다 가자고 해야 하나? 저 개들이 말을 알아듣기는 할까?' 민성은 온갖 복잡한 생각으로 머릿속이 가득했다. 그때였다. 짙은 안개 저 멀리서 희미한 불빛이 번뜩였다. 안갯속에 갇혀 희미하게 흔들리는 불빛은 마치 한 조각 희망 같았다. 초연한 조선 시대의 그림에서나 나올 법한 허름한 초가집의 실루엣이었다. 초가집 굴뚝에서는 한 줄기 가는 연기가 피어오르는 것이 보였다. 사람이 살고 있다는 확실한 증거였다.
가까이 다다르자, 민성과 호연을 묵묵히 인도해오던 귀견들 중 대여섯 마리가 뒤를 한 번 돌아보고는 먼저 마당으로 들어섰다. 녀석들은 기다렸다는 듯, 그 작은 몸에서 나올 수 없는 쩌렁한 소리로 '컹컹, 멍멍!' 짖어대기 시작했다. 마치 '손님이 왔으니, 어서 나와 보시게!'라고 재촉하는 듯 요란스러웠다. 이내 초가집의 낡은 나무문이 '삐걱' 소리를 내며 스르륵 열리고, 그 사이로 허리가 활처럼 구부정하고 머리가 새하얀 한 노파가 모습을 드러냈다.
"이 똥강아지들, 어디서 놀다 와서는… 이 야심한 밤에 이리 시끄럽게 짖어대는 게야…."
노파는 투덜거리는 목소리였지만, 그 안에는 묘한 정감이 서려 있었다. 그녀는 지팡이 대신 가는 손으로 귀견들을 하나하나 쓰다듬어 주었다. 귀견들은 노파의 손길에 사납던 기세를 잊은 채 고분고분 꼬리를 흔들며 머리를 부볐다. 그제야 노파의 기묘한 눈빛이, 마당 한쪽에 잡초가 정리된 틈새에 서 있는 민성 가족에게로 향했다. 한 여자아이를 업은 남자, 그리고 그 옆의 작은 꼬마. 노파는 마치 오랫동안 기다려온 이들을 맞이하듯, 그들의 존재를 스캔하듯 꿰뚫어 보았다.
노파는 아무런 설명 없이 자신이 나온 방이 아닌 옆방의 낡은 나무문을 열어젖혔다. 어두운 문틀 너머로 미약한 온기가 새어 나왔다. 그리고 짧지만 단호한, 실핏줄 같은 목소리가 숲의 고요를 갈랐다.
"들어들 가시게… 거기서 밤을 지새울 참은 아닐 터…."
그 정체 모를 노파의 말에 민성은 잠시 혼란스러운 듯 눈썹을 찡그렸다. '과연 이 노파는 누구인가? 우리가 이곳에 온 것을 어떻게 아는가?' 그의 이성은 여전히 의문투성이였다. 하지만 호연의 얼굴에는 그 모든 의문을 잠재울 만한 '이곳이다'라는 맹목적인 확신이 번뜩였다. 아들의 그 단단한 눈빛을 본 민성은 더 이상 주저하지 않았다. 그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노파가 안내해준 방으로 미나를 안고 들어갔다. 뒤이어 호연도 따라 들어섰다.
방 안은 영락없는 옛 조선 시대 초가집의 방이었다. 거친 흙벽에는 백 년 묵은 세월의 때가 내려앉았고, 굵은 나무 기둥은 세월의 무게를 고스란히 지탱하고 있었다. 군더더기 없이 소박한 가구들은 모두 최소한의 형태를 유지한 채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방안 가득 배인 오래된 나무와 흙냄새는 왜인지 모를 편안함을 주었다. 마치 짚푸라기를 가져와 짚신이라도 만들어야 할 것 같은 분위기였고, 번쩍이는 전기 불빛 대신 은은한 등잔불이 훨씬 더 어울릴 법한 정취였다.
그곳에 미나를 눕히고 잠시 앉아 있으려니, 아랫목에서부터 올라오는 뜨끈한 온기가 뼈 속까지 스며드는 듯했다. 며칠 밤낮 이어진 긴장과 고된 여정에 민성과 호연의 몸은 노곤노곤해지며 금세 졸음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옆에 눕혀 놓은 미나는 세상모르고 잠을 자며 재미난 꿈이라도 꾸는지, 작게 '히히' 웃다가 이내 미간을 찌푸리기도 했다. 간혹 침까지 스르륵 흘리는 모습은 영락없는 어린아이의 천진함을 보여주었다.
민성과 호연은 그렇게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그 순간이었다. '스르륵.' 닫혀 있던 문이 다시 열리며 아까 그 노파가 방으로 들어왔다. 노파의 양손에는 작은 소쿠리가 들려 있었는데,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탐스러운 삶은 감자와 시큼하면서도 구수한 냄새가 입맛을 돋우는 동치미 두 그릇이 담겨 있었다. 민성은 화들짝 놀라 벌떡 일어나 소쿠리를 받으며 노파에게 허리 숙여 감사의 인사를 건넸다.
"어이쿠, 이리 주세요. 이 야심한 밤에 저희 같은 이방인을 받아 주셔서 정말로 감사합니다."
일단 감사의 인사를 하며 노파와 대화를 이어 가려는데, 역시나 호기심 많은 호연이 민성의 팔을 잡아끌며 끼어들었다.
"할머니, 저 개들은 살아있는 개들이 아닌 것 같은데, 여긴 어떻게 있는 거예요? 그리고 왜 우리를 이리로 데려온 거죠?"
그러자 노파는 호연을 지긋이 바라보았다. 깊이를 알 수 없는 눈동자에는 잔잔한 웃음기가 서렸다가, 이내 천년의 연륜이 담긴 듯한 따뜻함으로 가득 찼다.
"흐음… 저 녀석들이 우리 꼬마 도령이 맘에 들었나 봅니다… 껄껄껄."
노파의 대답은 전형적인 연륜이 묻어나는 것이었다. 진실을 감추고, 일단은 농담으로 상황을 부드럽게 이끌어가려는 듯했다. 그 온화한 시선은 잠시 민성과 호연을 거쳐, 이내 아랫목에 고이 잠든 미나에게로 향했다. 잠든 미나의 얼굴을 한참 동안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마치 미나의 내면 깊은 곳을 꿰뚫어 보는 듯, 그녀의 눈빛은 한없이 깊고 아득했다.
4. 고요한 방 안, 심원(深遠)한 대화
등잔 불빛이 춤추듯 흔들리는 고요한 초가집 방 안. 어둠이 짙어질수록 불꽃의 그림자는 방 한가득 일렁였다. 민성과 노파는 나란히 앉아 있었다. 그들의 사이를 메운 것은 따뜻한 공기가 아니라, 미나와 가족이 겪은 끔찍한 여정의 흔적과 노파의 오래된 지혜가 뿜어내는 알 수 없는 기운이었다. 민성은 이 순간 모든 이성과 상식을 내려놓고, 노파의 앞에서 미나에게 일어난 불가해한 일들, 해묵리에서 시작된 기이한 현상들, 호연의 낡은 서책에서 발견한 단서들, 그리고 그 서책이 자신들을 여기까지 이끌었다는 기적 같은 이야기를 토해내듯 풀어냈다. 그의 목소리는 때로 절박했고, 때로 감정이 북받쳐 잠겼다. 그는 무언가에 홀린 듯, 노파의 존재 앞에서 모든 것을 털어놓고 있었다.
노파는 민성의 이야기에 단 한 번도 그를 끊지 않았다. 다만 이따금 고개를 작게 끄덕이거나, "음… 그랬구먼…", "허어…." 같은 짧은 추임새를 넣을 뿐이었다. 그녀의 감긴 눈은 그 어떤 심연보다 깊고 어두웠지만, 이야기가 진행될수록 민성은 노파가 단 한 순간도 자신의 말에서 눈을 떼지 않고 영혼으로 듣고 있다는 것을 직감할 수 있었다. 마치 긴 이야기를 영화처럼 보고 있는 듯, 노파의 표정에는 희미한 감탄과 아득한 슬픔이 교차하는 듯했다.
호연은 아까 배불리 먹은 감자와 동치미 때문인지, 아니면 이제야 긴장감이 풀린 탓인지 이미 단잠에 빠져 있었다. 그는 미나의 옆에 바싹 붙어 누워, 가늘게 코까지 골고 있었다. 두 아이의 평화로운 숨소리가 귓전을 스칠 때마다 민성의 심장이 아릿하게 울렸다. '아이들에게 다시 이런 고통을 겪게 할 수는 없어.' 그의 다짐은 더욱 굳건해졌다.
길고 긴 민성의 이야기가 마침내 끝났다. 고요한 침묵이 방 안을 다시 휘감았다. 노파는 여전히 감은 눈을 뜰 줄 몰랐다. 민성은 마른침을 꿀꺽 삼키며 노파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마치 삶의 방향을 결정할 신탁(神託)을 기다리는 기분이었다. 잠시 후, 노파가 천천히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그녀의 시선은 잠든 아이들에게 향했다. 이불도 덮지 않은 채 잠들어 있는 아이들의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노파는, 이내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섰다. 그녀는 방 한쪽에 놓인 오래된 장농의 문을 삐걱이며 열고는, 세월의 냄새가 밴 낡았지만 깨끗한 이불 두 채를 꺼냈다. 그리고는 직접 아이들 곁으로 다가가 조심스럽게 미나와 호연에게 이불을 덮어주었다. 그 손길에는 깊은 연민과 따스함이 배어 있었다.
그리고 마침내 입을 열었다. "가시게…."
민성은 어안이 벙벙했다. 그토록 장대한 이야기를 듣고도, 노파의 입에서 나온 말은 단 한 마디, 그것도 그를 이곳에서 떠나라는 말이었다. 그의 이성은 분노에 가까운 의문을 토해냈다.
"예? 왜….!"
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노파는 이미 말을 이어가고 있었다. 그녀의 목소리는 여전히 연로했지만, 이번에는 얼음처럼 차갑고 단호했다.
"지금… 자네가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인고? 없지? 그럼 나에게 맡기고 떠나게. 자네가 내가 이야기한들 이해할 수 있겠는가…? 받아들일 수 있고? 아이들 걱정은 말고, 가게나…."
노파는 민성의 눈을 꿰뚫어 볼 듯 응시하며 이어서 말했다. "지금보다 더 나아질 테니… 자네나 신경 써…." 그 목소리에는 단호한 명령과 함께, 거스를 수 없는 권위가 담겨 있었다. 민성은 가슴속에서 치밀어 오르는 항변을 억누를 수 없었다. '내 딸이야! 내가 이 아이들의 아빠라고!' 하지만 그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노파의 깊은 눈빛 속에 자신의 무력함이 그대로 비쳤기 때문이다. 그가 정말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잔인한 진실.
5. 고뇌하는 밤, 단호한 결정
어두운 산의 새벽은 거짓말처럼 빨리도 찾아왔다. 검푸른 밤하늘에 별빛이 희미하게 남아 있을 무렵, 민성은 초가집 방문 앞에 양반다리를 하고 앉아 있었다. 차가운 새벽 공기가 그의 맨살을 파고들었지만, 그는 미동도 하지 않았다. 아마 밤새도록 잠들지 못하고 깊은 고민에 빠진 듯했다. 그의 얼굴에는 오랜 고뇌의 흔적이 깊게 패어 있었지만, 그 뒤에는 어렴풋한 결의가 비쳤다.
그러나 그가 누구인가. 잔혹하고 복잡한 형사 생활을 하며 수많은 사건의 실타래를 풀어왔던 민성이 아닌가. 혼돈 속에서도 최적의 판단력을 찾아내고, 냉철하게 상황을 분석하여 행동했던 경험들이 그의 뼛속 깊이 각인되어 있었다. 노파의 말이 현실을 부정할 수 없는 진실이라는 것을 깨달은 순간부터, 그의 이성은 이 절망적인 상황에서 '가장 합리적인 선택'을 찾아 헤맸을 것이다.
동쪽 하늘이 붉게 물들기 시작하고, 마당에서 어른거리던 귀견들이 점차 연기처럼 희미해져 갈 때쯤, 민성의 눈빛은 단단하게 굳어 있었다. 그는 조용히 몸을 일으켰다. 그의 발걸음은 더 이상 불안하게 흔들리지 않았다.
그는 노파가 머무는 방문을 향해 천천히 걸어가 무릎을 꿇었다. 그의 목소리에는 간절함과 함께, 지워지지 않는 고뇌 끝에 내린 아버지로서의 결단이 묻어 있었다.
"어르신… 저… 가보겠습니다. 아이들… 잘 맡기고 갑니다."
민성의 말이 끝나자마자, 노파의 방 문이 '달칵' 하고 아주 작은 소리를 내며 열렸다. 하지만 그 어떤 그림자도 비치지 않았다. 노파의 목소리만 고요하게 흘러나왔다. "그러게나…."
짧고 담담한 그 한 마디는, 민성의 결정이 이미 노파의 예상 안에 있었음을 알리는 듯했다. 민성은 한 번 더 깊이 고개를 숙이고, 발걸음을 돌렸다. 그의 등 뒤로, 산은 조금씩 밝아오고 있었다.
6. 미나의 각성과 새로운 여정의 시작
해가 산봉우리를 넘어 숲속 깊은 곳까지 환히 밝히고 있을 때쯤이었다. 아랫목에 누워있던 미나가 길고 힘든 신음 소리와 함께 뒤척이며 눈을 떴다. 몽롱한 의식 속에서도 그녀를 휘감았던 낯선 무거움과 머리 깊숙이 박혔던 두통이 온데간데없이 사라진 것을 느꼈다. 몸은 구름처럼 가벼웠고, 머리는 맑은 샘물처럼 깨끗해져 있었다.
그러나 눈을 뜨고 마주한 풍경은 충격 그 자체였다. 처음 보는 허름한 초가집의 천장과 거친 흙벽. 이불 옆에는 깊은 잠에 빠진 호연이 조용히 숨 쉬고 있었다. "머야~? 이 곳은…." 그녀의 눈빛에는 당황스러움이 가득했다. 이내 코끝을 스치는 퀴퀴한 냄새에 미간을 찌푸렸다. "아우~ 냄새…."
그녀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주변을 휘둘러보았다. 이 익숙지 않은 공간에 어떻게 왔는지, 아빠는 어디 갔는지 알 수 없어 혼란스러워했다. 그때, 그녀의 시선은 벽에 기대앉아 꾸벅꾸벅 졸고 있는 노파에게 닿았다. 깊은 주름이 패인 얼굴은 세월의 고단함을 말해주었지만, 그 표정은 더없이 평화로웠다. 미나는 조심스럽게 노파의 어깨를 흔들며 잠을 깨웠다.
"할머니~ 할머니~?"
그러자 노파는 마치 오랫동안 잠들었던 것과는 다른 사람인 양, 아주 고요하고 부드럽게 눈을 떴다. 그리고는 깜빡이는 미나의 눈동자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미나는 노파의 눈을 마주하고 순간 흠칫 놀라고 말았다. 그 눈빛은 사람의 내면 깊은 곳을 꿰뚫어 보는 듯한 압도적인 통찰력과, 동시에 모든 것을 품어 안는 큰 바다와 같은 무한한 깊이를 담고 있었다. 거대한 존재감 앞에 미나는 저항할 수 없이 그 눈빛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듯한 착각에 빠졌다.
그녀의 정신이 그 심연에 삼켜져 들어가려 할 때쯤, 노파의 입술이 천천히 움직였다. "이제 일어났구나." 노파의 목소리는 새벽녘의 이슬처럼 맑고 고요했다.
하지만 그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노파의 눈빛이 순식간에 돌변했다. 방금 전의 깊은 바다 같던 눈빛은 온데간데없고, 마치 장군처럼 엄하고 날카로운 빛이 번뜩였다. 그녀의 손가락은 미나가 잠에서 깬 그대로 입고 있던, 목이 늘어난 후드티와 짧은 핫팬츠를 가리켰다.
"그 빤스 같은 거 벗고! 옷 갈아입고 나오거라!"
노파는 무심한 듯 퉁명스러운 어조로 말하며, 방 한쪽에 있는 낡은 장농을 열어 짚으로 엮은 듯한 거친 옷가지를 툭 던졌다. 미나는 경악했다. 그것은 영락없이 조선 시대 사내아이들이 입던 듯한 허름한 저고리와 바지였다. 미나의 입에서는 비명 같은 탄식이 터져 나올 뻔했지만, 노파의 엄한 눈빛에 짓눌려 꿀꺽 삼킬 수밖에 없었다.
미나는 투덜거리면서도 옷을 받아들었다. 옷을 갈아입는 동안, 그녀는 자신의 몸에 일어난 놀라운 변화를 다시 한번 확인했다. 전처럼 몸이 무겁지도, 머리를 짓누르던 지독한 두통도 완전히 사라져 있었다. 오히려 몸이 가볍고 개운했으며, 온몸의 세포 하나하나가 상쾌한 공기를 머금은 듯 활력을 띠는 것을 느꼈다. 자신도 모르게 얼굴에는 옅은 미소가 떠올랐고, 기분마저 상쾌해졌다. 하지만 그 상쾌함 속에서도, 미나의 고집스러운 사춘기 소녀 특유의 반항심은 여전했다. 옷을 이리저리 매만지며 그녀는 불만스럽게 중얼거렸다. '요즘 이런 스타일의 옷을 누가 입단 말인가.' 영락없는 중2병 사춘기 소녀의 표정과 투덜거림이 입가에 맴돌았다.
새 옷(?)으로 갈아입고 문을 열고 나오자, 미나는 또 한 번 충격에 휩싸였다. 눈앞에 펼쳐진 광경은 어제의 어둠 속에서 보았던 산과는 전혀 달랐다. 무학산은 눈을 뗄 수 없을 만큼 거대하고 신비로운 위용을 자랑하고 있었다. 울창한 나무들이 하늘을 찌를 듯 솟아 있었고, 저 멀리 산의 허리께에는 하얀 안개인지 구름인지가 걸려 신비로움을 더했다. 코끝을 스치는 싸늘하면서도 맑은 공기는 이곳이 깊은 새벽임을 알려주었다. 이 넓고 강렬한 산의 모습은 그녀에게 알 수 없는 압박감과 함께, 동시에 거대한 대자연의 일부가 된 듯한 경외감을 느끼게 했다. 그녀의 몸속에서 뭔가 낯선 기운이 끓어오르는 듯했다.
잠시 풍경을 감상하며 넋을 놓고 있을 때였다. 마당 쪽에서 노파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리 따라 오거라."
할머니와 함께 걷는 산길. 미나는 발걸음이 이어질수록 깨달을 수 있었다. 자신이 힘든 신병(神病)에 잠들어 있을 때, 아빠와 호연이 얼마나 자신을 걱정하고, 이곳까지 오기 위해 어떤 고초를 겪었는지. 그들의 헌신적인 사랑이 마치 눈앞에 펼쳐지는 파노라마처럼 느껴졌다. 그런데 그 깨달음보다 더 놀라운 것은, 자신의 앞에서 터벅터벅 걸어가는 할머니에게서 왜인지 모를 강력한 동질감을 느끼기 때문이었다. 마치 오랜 시간 잃어버렸던 자신의 조각을 찾아낸 듯한 기묘한 감각이었다.
할머니의 발걸음을 따라 도착한 곳은 어느 거대한 바위 앞이었다. 그 바위의 절단면은 마치 거대한 과일을 칼로 완벽하게 베어낸 듯 매끄럽고 평평했으며, 그 단면 위에는 닳아 희미해졌지만 분명한 형상을 가진 벽화들이 새겨져 있었다. 누군가가 이토록 거대한 자연 암벽에 자신의 역사를 아로새긴 것 같은 착각마저 들었다. 미나가 넋을 잃고 벽화를 구경하고 있을 때, 할머니가 다시 입을 열었다. 그녀의 목소리는 연로한 쇳소리처럼 삐걱거렸지만, 그 어떤 선지자의 목소리보다 무게감이 있었다.
"이 벽화가 내가 걸어온 길이고, 네가 걸어야 할 길이야. 그리고 우리 후손 중 누군가 걸어야 할 길을 표현한 것이지…." 할머니는 벽화를 손가락으로 천천히 짚어 내려가며 말을 이었다. "우리 인간은 우주에서 어떤 존재인지, 이 할미도 정확히는 모른다…. 그러나… 신들이 도와서 우리를 지켜주기도 하고, 혹은 악한 신이 우리를 해(害) 하기도 하지. 그 둘 중에 우리는 지키는 쪽에 속한다. 그러면, 왜 신들은 인간을 그리 해하고 지키고 하느냐고 물을 수 있겠지? 대체 신은 무엇이고…? 아마도 그건 균형이 아닐까 생각한다. 인간의 마음속에는 악과 선이 존재하는데, 악한 마음의 인간만 남으면 어찌 되겠는고? 만약 선한 존재만이 존재하면 어찌 될까? 분명 인간의 본성, 욕심 때문에 결국 무너질 게야…. 그것의 균형을 잡는 일이고, 신들은 그 균형 사이에서 자신들의 힘을 사용하고 싶어 안달이 나신 분들이야. 모르지… 내기를 하셨나…? 껄껄껄…."
할머니는 길고 긴 이야기를 연로하신 쇳소리로 이어가다가, 마지막에는 피식 웃음까지 터뜨렸다. 그 와중에도 미나는 속으로 '이 할망구가 노망이 난 거야? 무슨 소리야 대체?' 하는 사춘기 소녀 특유의 반항심 가득한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그러나 잠시 숨을 고르던 할머니가, 문득 정색을 하고 미나의 볼을 어루만졌다. 그 손길은 가늘고 메말랐지만, 따뜻한 온기와 함께 형언할 수 없는 슬픔이 느껴졌다.
"너 나 나 같은 사람들은 신들이 자신들의 힘을 사용하기도 하고, 빌려주기도 하는 대변인 같은 거지. 하지만, 우리들의 삶은… 고달프다…. 아이고… 우리 아가도…." 할머니의 눈빛은 미나의 눈 속에서 자신의 과거를 보는 듯 아련했다. "나도 아직 모르겠다. 단 한 번뿐인 것 같은 삶을 내 의지대로 살아보지 못해서, 너 또한 그러겠지…."
할머니의 메마른 손이 자신의 볼을 쓸어내리자, 미나는 그 순간까지 애써 참고 있던 울음을 기어이 터뜨리고 말았다. 가슴속 깊이 묻어두었던 분노와 억울함, 그리고 이해할 수 없는 자신의 운명에 대한 절규가 눈물과 함께 쏟아져 나왔다.
"왜…. 저는 아파야 하고, 괴로워야 하고, 고통스러워해야 해요! 흐흐흑… 왜! 대체! 왜!"
울부짖는 미나를 할머니는 말없이 품에 안아주었다. 그 품은 굽은 허리처럼 작았지만, 그 어떤 따스함보다 거대하고 안정적이었다. 노파는 미나의 등을 말없이 토닥였다.
"다 업보일런지, 아니면 운명일런지… 그래도 이 할미가 아프지 않도록 하는 법은 알려주마…."
7. 강철 육체와 고요한 정신
그렇게 다시 돌아온 초가집. 미나는 노파에게 자신의 몸과 정신을 지키는 법, 즉 장군신(將軍神)이 강림했을 때 육체를 보호하고, 혹은 그의 힘을 온전히 빌려 써야 할 때의 방법을 배우기 시작했다. 그녀의 배움은 단순한 주문이나 의식이 아니었다. 무엇보다 가장 중요하게 노파가 강조한 것은 바로 '건강한 육체'였다. 이 험난한 숙명을 감당하기 위해서는 흔들리지 않는 굳건한 몸이 필요하다고 했다.
그래서 노파가 미나에게 첫째로 시킨 것은 초가집에서부터 무학산의 꼭대기를 찍고 다시 돌아오는 것이었다. 매일 동이 트기 전, 짙은 어둠을 헤치고 산을 오르는 혹독한 훈련. 가파른 경사를 몇 번이고 뛰어 오르는 날도 있었고, 돌덩이를 들고 오르내리는 날도 있었다. 갓 사춘기를 벗어난 소녀의 몸은 비명을 질렀지만, 노파는 단 한 번도 미나의 힘든 얼굴을 보고 연민을 드러내지 않았다.
두 번째는 명상이었다. 차가운 새벽 이슬을 맞으며 바위 위에 앉아 명상에 잠기는 일이었다. 노파는 끊임없이 미나에게 '자신의 마음과 머릿속에서 모든 잡념을 없애라'고 가르쳤다. 인간은 매 순간 끊이지 않는 생각에 붙잡혀 감정을 소모하고, 불필요한 변수와 문제를 일으키기에 신의 뜻을 받아들이기 어렵다고 했다. 그렇기 때문에 그저 '지금 순간만 생각하며 비우는 것'에 집중하라고 강조했다.
미나는 지금도 가부좌를 틀고 명상에 잠겨 있다. 새벽 공기가 폐 속 깊이 파고들어 정신을 맑게 했지만, 어제 산을 오르내린 여파로 그녀의 허벅지는 터질 듯한 근육통에 시달리고 있었다. 핏줄이 울긋불긋 솟아오른 종아리는 작은 경련을 일으켰고, 온몸은 식은땀으로 축축했다. 고통은 지독했지만, 신기하게도 미나의 얼굴은 이전처럼 일그러지지 않았다. 오히려 그녀의 의식은 점차 고통을 초월하며, 무학산의 고요와 하나 되는 듯한 묘한 평온함 속으로 잠겨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