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어둠 속 항구, 드디어 찾은 꼬리.(1)
오후 3시를 막 넘긴 시간, '검은 유리탑'이라 불리는 초고층 빌딩의 최상층. 그곳에 위치한 선우 메디컬 그룹의 대표이사 사무실은 외부의 화려한 이미지와는 달리, 차가운 공포와 기이한 긴장감에 휩싸여 있었다. 통유리창 너머로 도시의 전경이 아득히 펼쳐져 있었지만, 지금 사무실 안에 앉은 남자의 시야에는 아무것도 들어오지 않았다. 그는 회장이라는 직함이 무색하게 식은땀을 줄줄 흘리고 있었다. 그의 핏기 없는 얼굴에는 공포가 가득했으며, 몸은 마치 깊은 한기를 느낀 듯 격렬하게 부들거리고 있었다.
그의 앞에는 키는 작지만 그 존재감만으로도 공간을 압도하는 백발의 노인이 서 있었다. 노인은 일본식 하카마를 입고 있었는데, 그 흰머리는 현대식 모리 포마드로 단정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하카마는 다림질한 듯 주름 하나 없이 깔끔하게 정돈되어 있었고, 그의 꼿꼿한 자세와 어우러져 흐트러짐 없는 위엄을 풍겼다. 얼굴은 약간 어두운 톤의 피부에 깊게 파인 주름들이 그의 살아온 연륜과 함께 무수한 비밀을 품고 있는 듯 보였다. 그의 옆에는 20대 중반으로 보이는 여성이 무표정한 얼굴로 서 있었다. 검은색 미니스커트 정장을 완벽하게 차려입은 그녀는 마치 노인의 그림자처럼 존재감을 지웠지만, 그 눈빛만은 날카롭게 번득이고 있었다.
노인이 끓여낸 정적을 먼저 깬 것은 그였다. 그의 목소리는 차분했지만 그 안에 담긴 의미는 서늘했다. 마치 오랜 친구에게 조언을 건네는 듯 부드러우면서도, 단 한 마디도 거스를 수 없는 강한 압박이 실려 있었다.
"내가 자본을 투자하여 자네 회사를 이 정도로 키워 놓았는데, 이제쯤이면 내가 원하는 것을 구해 내어 와야 하는 것이 아닌가?"
노인은 다소 어색한 한국말을 구사했지만, 그 말은 단순한 비즈니스 협박을 넘어선, 더 깊고 어두운 의미를 품고 있었다. 그의 싸늘한 시선이 대표이사의 심장을 꿰뚫는 듯했다.
대표이사의 입술이 쿰틀거렸다. 변명이라도, 혹은 읍소라도 하려는 듯 간신히 입을 열려는 찰나였다. 노인의 눈빛이 차갑게 번득이더니, 낮은 목소리로 호통을 쳤다.
"바카모노가!" (어리석은 놈!)
노인의 목소리는 낮았지만, 그 울림은 사무실 전체를 얼어붙게 만들었다. 대표이사는 그 언어를 알아들을 수는 없었지만, 그 분노의 기운에 압도되어 몸을 더욱 웅크렸다. 그는 본능적으로 의자에서 내려와 바닥에 무릎을 조아렸다. 그의 등줄기를 타고 식은땀이 폭포수처럼 흘러내렸다.
그때 뒤에 서 있던 여성이 짧은 호통 속 노인의 일본어를 한국말로 통역했다. 그녀의 한국말 또한 약간은 어색했지만, 그 내용은 대표이사의 영혼을 잠식하는 듯 명확했다.
"노인장께서 말씀하시길… '지금까지처럼 지체하면… 당신 또한 내가 수집하는 컬렉션 중 하나가 될 것'이라고 경고하십니다."
대표이사의 얼굴은 그제야 극심한 공포로 일그러졌다. '컬렉션 중 하나…'라는 섬뜩한 말에 그의 온몸이 경련하듯 떨렸다. 노인은 만족스럽다는 듯 싸늘한 미소를 지었다. 그는 대표이사를 지그시 내려다보며 직접 입을 열었다.
"내 너에게 담보로 폭탄 같은 것을 선물해 주지."
노인의 목소리는 속삭이듯 낮았지만, 그 내용은 대표이사의 뇌리에 강력한 주술처럼 박혔다. 그는 여성에게 고갯짓으로 무언의 지시를 보냈다.
여인은 고개를 숙여 노인의 뜻을 따랐다. 그녀는 손을 들어 천천히 수인을 맺는 듯한 기묘한 동작을 취했다. 차가운 공기 속에서 보이지 않는 힘이 모이는 듯했다. 겁먹어 벌벌 떨고 있는 대표이사에게 무언가를 날리듯 두 손을 뻗자, 그녀의 입가에는 싸늘하고 섬뜩한 미소가 걸렸다. 그 미소는 어떤 자비도 없이, 오직 고통만을 약속하는 듯했다. 대표이사의 눈은 공포에 질려 크게 뜨여졌지만, 이미 손쓸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에게 날아든 보이지 않는 '선물'은 그의 몸 깊숙이 파고들었다. 그의 온몸에 기괴한 한기가 스며들기 시작했고, 눈빛은 일순 흔들리며 미약한 초점만 남긴 채 멍하니 허공을 응시했다. 그는 그저 의자에 기댄 채 희미하게 신음하며 몸을 떨 뿐이었다.
노인은 미련 없이 몸을 돌렸다.
"기한 내에 준비해 놓으시오. 나는 인내심이 없는 사람이니." 그
의 목소리는 모든 것이 계획대로 흘러가는 데 대한 만족감으로 가득했다. 노인은 여성과 함께 조용히 사무실 문밖을 나섰다. 텅 빈 사무실에는 여전히 극도의 공포에 질린 채, 몸속에 스며든 기이한 힘에 서서히 잠식되어 가는 대표이사만이 홀로 남아 있었다. 한낮의 햇살은 차가운 통유리를 통해 들어왔지만, 사무실 안은 영원한 어둠에 갇힌 듯 음산하기만 했다.
시각은 자정을 넘어 새벽 2시를 향하고 있었다. 아산 경찰서의 수사과 한쪽은 밤늦도록 불이 환하게 켜져 있었다. 민성은 조 형사와 함께 병원 원장의 행방을 찾기 위해 선우 정신병원 내부와 근처의 CCTV를 끈질기게 확인하고 있었다. 수많은 영상들을 돌려보며 지친 눈을 비볐지만, 좀처럼 결정적인 단서는 나타나지 않았다.
경찰서 휴식실에서 휴대폰을 쳐다보고 있는 미나와 호연은 늦은 시간에도 집에 갈 생각이 없는 듯했다. 민성이 어디로든 움직이기만 하면 따라가려는 것이 뻔해 보였다. 민성은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저었지만, 그들을 두고 혼자 움직일 수는 없으리라는 것을 잘 알았다. 그는 다시 모니터로 시선을 돌렸다. 지친 어깨에 묵직한 책임감이 얹히는 듯했다.
그때, 조 형사가 갑자기 의자에서 벌떡 일어나 모니터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큰소리로 민성을 불렀다.
"선배님, 여기 좀 보세요!"
그의 목소리에는 흥분과 동시에 약간의 경악이 섞여 있었다. 조 형사가 가리킨 모니터에는 한 남자의 모습이 잡혀 있었다.
"이 사람이 선우 정신병원 원장입니다. 원장실에서 나온 지 얼마 안 된 영상이에요."
민성은 조 형사가 가리킨 원장의 모습을 유심히 바라보았다. 단정하고 깔끔한 외모의 중년 남자. 그런데 어딘가 모르게 낯설지 않았다. 그의 눈빛은 찰나, 강하게 흔들렸다. '저 뒷모습… 잊을 리가 없지….' 민성의 머릿속에 섬광처럼 지나가는 잔상. 바로 장기 적출 장소에서 혼비백산하여 도망쳤던 김 씨의 뒷모습과 겹쳐 보였다.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설마… 아니, 틀림없었다. 직감은 한 치의 오차도 없었다.
"이게 어떻게 된…!"
민성은 즉시 전화를 들고 수사과 내선 번호를 눌러 통합 관제 센터로 연결했다.
"지금 이 차량 조회해 줘! 선우 정신병원 원장이 탑승하는 세단이야! 최대한 빨리! 현재 위치 추적!" 그의 목소리는 이제 평소의 느긋함 대신, 맹렬한 추격자의 그것으로 변해 있었다. 그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조 형사에게도 재빠르게 지시를 내렸다.
"조 형사, 환자들한테서 나오는 정보가 있으면 바로 나한테 알려줘! 그리고 선우 메디컬, 지금부터 더 깊숙이 파헤쳐봐! 압수수색 영장 준비하고!"
일어나는 민성을 본 미나와 호연도 빠르게 휴게실에서 뛰쳐나왔다. 멀리서 봐도 아빠를 데리고 가겠다는 무언의 압박이 느껴졌다.
"아빠, 같이 가요!"
미나가 민성의 팔을 잡았다. 호연도 아빠의 바짓가랑이를 붙잡고 따라나섰다. 아이들과 입씨름하며 시간을 허비할 수는 없는 상황. 민성은 한숨을 내쉬었지만, 이내 포기했다. 그는 아이들에게 손짓하며 따라오라는 신호를 보냈다. 동시에 귀에는 잔소리를 퍼부었다.
"단, 쓸데없는 짓 하거나 무모한 행동은 절대 금지다! 말 안 들으면 바로 경찰서로 돌려보낼 거야!"
아이들은 아빠의 경고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신이 난 듯 그의 뒤를 바싹 따라붙었다.
새벽 2시 30분, 민성은 통합 관제 센터로부터 "선우 정신병원 원장 차량이 평택 톨게이트를 진입했다"는 위치 추적 보고를 받고 곧장 평택으로 이동했다. 평택항. 중국으로 향하는 여객선이 있고, 동남아시아로 가는 컨테이너 이동 노선이 활발하게 오가는 국제항구. 이곳은 범죄자들이 해외로 도주하기에 최적의 장소였다. 민성은 현지 경찰에게 평택항을 출입하는 여객선 출항을 잠시 중지하고, 탑승자 명단을 재확인해 달라고 급히 요청했다. 그리고 자신은 넓디넓은 컨테이너 부두로 향했다. 김 씨, 아니 원장은 반드시 잡아야 했다.
늦은 새벽 2시 50분, 민성의 차가 평택항 근처에 빠르게 도착했다. 그는 눈에 띄지 않게 부두 입구가 아닌 멀찍이 떨어진 갓길에 차를 세웠다. 아직 어둠이 완전히 가시지 않은 항구에는 거대한 컨테이너들이 탑처럼 쌓여 있었고, 쇠 비린내와 바다 내음, 그리고 희미한 기름 냄새가 섞여 코끝을 찔렀다. 짙은 안개는 부두를 음산하게 감싸고 있었고, 스산한 새벽 공기 속에는 알 수 없는 긴장감이 감돌았다.
민성은 조용히, 마치 경비원이 전화 통화를 하는 척 위장하며 부두를 향해 걸어갔다. 그의 눈은 주변의 작은 움직임 하나도 놓치지 않으려는 듯 예리하게 빛났다. 밤의 어둠은 그의 존재를 자연스럽게 숨겨주었다. 그리고 그 뒤를 미나와 호연이 다섯 걸음 정도의 간격을 유지하며 따르고 있었다. 그들은 마치 일행이 아닌 듯, 각자 휴대폰을 만지작거리거나 하늘을 올려다보는 시늉을 하며 자연스럽게 민성을 뒤따랐다. 그들은 아빠의 무모한 행동 금지 경고를 잠시 망각한 듯 보였다. 호연의 입가에는 살짝 장난기 어린 미소가 걸려 있었다.
부두 입구에 다다를 무렵, 허름한 주차장 같은 곳이 눈에 들어왔다. 그곳에는 녹이 슬어 오랫동안 방치된 듯한 낡은 차들이 여러 대 서 있었고, 한쪽에는 깨진 유리조각, 녹슨 쇠붙이, 폐타이어, 그리고 밧줄 더미 같은 온갖 잡동사니들이 쓰레기 산처럼 거대하게 쌓여 있었다. 눅눅한 새벽 공기 속에서 풍기는 음침한 분위기는 항구의 활기찬 모습과는 전혀 다른 이질감을 풍겼다. 거대한 항구 크레인의 그림자가 안갯속에서 괴물처럼 우뚝 서 있었다.
민성을 따라 걷던 발걸음을 멈춰 세운 것은 호연이었다. 그의 황금빛 눈동자는 번뜩이며 쓰레기 더미 이곳저곳을 유심히 쳐다보았다. 마치 보물을 찾는 탐사대원처럼 진지한 얼굴이었다. 그러더니 쪼르르 달려가더니 쓰레기 더미 한쪽을 이리저리 뒤지기 시작했다.
"달그락, 달그락" 낡은 쇠붙이들이 부딪히는 소리가 고요한 새벽 공기를 갈랐다. 그 모습을 본 미나는 작게 한숨을 쉬며 나지막이 투덜거렸다.
"야, 강호연! 아빠 빨리 따라가야 한다고! 또 무슨 사고 치려고 저래!"
호연은 누나의 투덜거림을 완벽하게 무시한 채 쓰레기 더미 속을 뒤졌다. 잠시 후, 그의 얼굴에 씩 미소가 걸렸다. 그는 손을 쑤셔 넣어 묵직한 기계 부품 하나를 꺼냈다. 그것은 기계의 회전체에 마모도를 줄이기 위해 들어가는 베어링이었다. 그런데 그 베어링 안쪽에는 반짝이는 쇠구슬들이 빼곡히 둘러져 있었다. 호연은 그 부품을 미나에게 보여주며 해맑게 웃었다. 베어링 안에 있는 쇠구슬의 크기는 평소 호연이 쓰던 왕 구슬사탕과 비슷했다. 그의 눈빛은 이미 '이걸 어떤 용도로 쓸지'를 정확히 알고 있음을 드러내고 있었다.
미나는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다시 한숨을 쉬었다.
"하아… 됐다, 됐어. 얼른 가져오기나 해. 아빠한테 들키기라도 하면…."
미나는 더 이상의 잔소리 대신 빨리 가자고 재촉했다. 그때 호연은 쓰레기 더미 한쪽에서 적당한 쇠꼬챙이를 찾아냈다. 그는 능숙하게 쇠꼬챙이로 베어링 안에 박혀 있던 쇠구슬들을 하나씩 빼냈다.
"철컥, 철컥, 차르르…"
쇠구슬들이 쏟아져 나와 양쪽 주머니에 가득 채워졌다. 그리고는 재빠르게 미나와 함께 민성의 뒤를 따라갔다. 그들의 주머니는 이제 치명적인 '무기'로 가득 차 있었다.
부두의 출입구에 다다르려 하는데, 경비실에서 덩치 큰 경비원 한 명이 나와 무슨 일이냐며 앞을 막아섰다. 날카로운 시선으로 이 낯선 방문객들을 훑어보았다. 민성은 당황하지 않았다. 그는 자신의 신분증을 꺼내 보여주며 이곳 전체를 볼 수 있는 관리실 같은 곳을 물었다. 정복을 입은 경비원은 민성의 신분을 확인하고는 약간 경계심을 늦추며 관리실 방향을 알려주었다. 민성은 빠르게 그곳으로 이동했다.
관리실은 낡았지만 넓은 부두 전체를 한눈에 볼 수 있도록 여러 대의 모니터가 설치되어 있었다. 민성은 경비원의 도움을 받아 모니터를 통해 넓디넓은 부두를 살펴보았다. 그러나 새벽이라는 시간 때문에 시야조차 어두웠고, 수많은 컨테이너들이 시야를 가려 목적물을 찾기란 불가능에 가까웠다. 부두는 거대했고, 샅샅이 뒤지는 것은 인력 낭비일 뿐이었다. 민성은 이대로 해가 뜨기 시작하면 출항하는 수많은 배들을 전부 한 번에 조사할 수 없다는 것에 망연자실했다. 그의 얼굴에는 초조함과 함께 절박함이 스쳐 지나갔다. '젠장, 이렇게 중요한 단서를 놓칠 수는 없어…!'
그때 민성의 뒤에 바싹 다가서 있던 미나가 나지막이 말을 건넸다. 그녀의 목소리에는 단호함과 함께 강한 확신이 실려 있었다.
"아빠… 혹시… 혹시 원혼들에게 둘러싸여 울부짖는 원장이 느껴져요! 불쌍한 원혼들이 슬피 울부짖는 소리가 들려요… 저기예요!"
미나의 손가락이 짙은 안갯속 부두의 한쪽을 가리켰다. 그녀의 눈빛은 무언가 섬뜩하고 불길한 것을 꿰뚫어 보는 듯했다.
민성은 미나의 말에 희미한 한 줄기 희망을 보았다. 미나의 영적 감지는 비과학적이지만, 지금까지 여러 번 사건의 중요한 단서를 제공해 주었다.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해보자."
셋은 곧장 관리실 옥상으로 올라갔다. 찬 새벽바람이 얼굴을 때렸지만, 미나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녀는 난간에 기댄 채 눈을 감았다. 주변의 거대한 컨테이너, 바다의 철썩이는 소리, 멀리서 들려오는 기계음… 그 모든 잡음을 그녀의 의식 밖으로 밀어냈다. 호흡을 고르며 온 신경을 집중했다. 미나는 먼저 자신이 경찰서 유치장에서 마주했던 '악귀보다 더 지독한 존재'의 잔상을 떠올렸다. 그 존재의 압도적인 악의, 영혼을 파먹던 그 싸늘하고 끈적한 기운… 만약 원장에게도 그런 기운이 묻어 있다면, 분명 감지할 수 있으리라. 그녀는 이전의 공포를 이겨내고 온 감각을 곤두세웠다.
한참을 집중했지만, 처음에는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맹목적으로 그 존재만을 찾아서는 안 된다는 것을 깨달은 미나는 잠시 눈을 뜨고 숨을 골랐다. 그녀는 난간에 기댄 채 눈을 감은 모습 그대로 미세하게 몸을 떨기 시작했다. 그녀의 내면에서는 온갖 잡념과 외부 소음을 뚫고 '그곳'을 탐색하려는 강렬한 의지가 맹렬히 타올랐다. 폐 속까지 차가운 새벽 공기가 스며들어 심장이 더욱 빠르게 뛰었지만, 미나는 이를 악물고 두려움을 억눌렀다. 귓가에는 마치 수백, 수천 개의 영혼들이 동시에 흐느끼는 듯한, 알 수 없는 웅얼거림이 희미하게 들려왔고, 코끝에는 비릿한 철 냄새와 눅눅한 곰팡이 냄새, 그리고 마치 썩어가는 시체 같은 불쾌하고 지독한 악취가 진동했다. 그녀의 영혼은 마치 거대한 파도에 휩쓸린 조약돌처럼 강렬하게 진동하며, 원장의 주변에서 벌어졌던 참혹한 영적 잔상들을 흡수하기 시작했다. 미나의 눈꺼풀 안쪽으로, 마치 망가진 영화 필름처럼 빠르게, 그리고 단편적으로 이미지들이 강렬하게 스쳐 지나갔다.
미나의 머릿속에는 이미지 같은 것들이 스쳐 지나갔다. 차갑게 번득이는 수술 도구들, 피가 흥건한 바닥, 그리고 환한 미소를 지으며 메스를 든 채 서 있는 원장의 이질적인 웃음소리가 귓가에 울렸다. 피비린내 나는 수술실의 모습과, 한두 번 해 본 솜씨가 아닌 듯한 익숙하고 능숙한 손놀림. 그리고 그 뒤편, 차가운 수술대 위에 아무렇게나 널브러진, 이미 영혼이 빠져나간 시체와 같이 늘어져 있는 사람들의 모습…! 그 모든 고통과 죽음의 잔상들이 원장이라는 인물 주변을 맴돌고 있었다. 그 순간, 미나의 영적 감각이 맹렬하게 한 지점을 향해 집중되었다. 그녀는 번뜩 눈을 떴고, 그녀의 손이, 그녀의 온몸이 저절로 한 방향을 가리켰다.
"저쪽이에요, 아빠! 저 멀리 1 부두 쪽에서 불쌍한 원혼들이 슬피 울부짖고 있어요! 마치 원장에게 들러붙어 해방을 갈구하는 것처럼요! 원장이 느껴져요! 저기예요!"
미나의 다급한 외침에 민성은 주저 없이 그녀가 가리킨 방향으로 몸을 돌렸다. 민성과 호연, 미나는 찬 새벽 공기를 가르며 미나가 알려준 방향으로 전속력으로 달려가기 시작했다. 정확한 위치까지는 아니지만, 저 멀리 1, 2 부두 쪽이라는 것은 분명했다. 넓디넓은 항구에서 시간을 지체할 여유는 없었다.
그러나 항구의 지형은 복잡했다. 끝없이 펼쳐진 컨테이너들의 거대한 벽이 미로처럼 앞을 가로막았다. 똑같은 형태의 컨테이너 박스들이 빽빽하게 쌓여 있어 방향감각마저 혼란스러웠다. 안개는 더욱 짙어져 앞을 분간하기 어려웠고, 미나의 영적 감지도 수많은 강철 구조물과 스산한 바다의 기운 속에서 명확한 지점을 짚어내기 힘들었다.
"아빠, 좀 더… 오른쪽으로요! 아니… 이 컨테이너 지나서 바로… 왼쪽! 에이, 여기 다 비슷하게 생겼어요!" 미나는 혼란스러워하며 손짓했다. 방향은 알고 있었지만, 이 거대한 미로 속에서 정확한 컨테이너를 찾아내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민성은 형사의 촉을 믿고 끊임없이 뛰었다. 컨테이너 사이의 좁은 통로를 이리저리 헤집고 나아갔다.
"이쪽에 은폐할 만한 공간이 많아! 폐쇄회로 카메라가 닿지 않는 곳이거나…!"
그의 노련한 감각이 무리를 이끌었지만, 새벽의 항구는 인내심을 시험하듯 넓고 황량했다.
그렇게 한참을 더 달리자, 드디어 눈에 띄는 무리가 보였다. 2번 부두 쪽에 유독 눈에 띄는 작업자들이 보였다. 그들은 동남아시아계로 보이는 이들이었다. 새벽 시간의 항구 작업은 흔한 일이지만, 이들은 분명 작업복을 입고 있지도 않았고, 항만의 관리자 같지도 않았다. 복장은 딱 그 동남아 현지에서나 입을 법한 편안한 복장이었지만, 촌스럽지 않은 그들의 모습에서 오히려 위화감이 느껴졌다. 팔목과 목에는 번쩍이는 금붙이와 함께, 몸에는 복잡한 문신들이 새겨져 있었다. 일반적인 항만 노동자들과는 확연히 다른, 어딘가 수상한 분위기였다. 민성은 직감했다. '이 녀석들… 단순한 인부들이 아니야.' 민성은 그 무리를 조용히 뒤쫓기 시작했다.
그 무리를 조용히 따라가자, 이내 한 무리와 마주 할 수 있었다. 바로 그 선우 정신병원 원장과 그의 뒤에 그림자처럼 서 있는 두 명의 사내. 그들은 경호원인지, 비서인지, 무뚝뚝한 표정으로 원장을 보호하듯 서 있었다. 동남아 무리와 원장 일당이 무언가 대화를 나누는 것 같더니, 이내 동양인 무리들을 따라 거대한 컨테이너 사이로 이동하기 시작했다. 그 순간, 민성은 더 이상 지체할 수 없다고 판단했다.
민성은 조용히 컨테이너 그림자에서 벗어나 그 원장의 이름을 불렀다. 그의 목소리는 어둠 속에서도 또렷하게 울려 퍼졌다.
"선우 정신병원 원장님~ 어딜 그리 바삐 가시나? 아니지, 김 씨인가? 너 정체가 뭐야?!"
원장은 민성의 목소리에 화들짝 놀라며 뒤를 돌아보았다. 그의 눈은 공포에 질려 토끼처럼 커졌고, 얼굴에서는 핏기가 싹 가셨다. 동남아 무리와 원장 뒤에 있던 두 명의 사내 또한 순식간에 경계태세로 전환했다. 그들의 눈빛은 살기 등등 하게 번득였다. 민성은 자신의 신분증을 꺼내 보여주며 단호하게 말했다.
"난 경찰이다! 원장 빼고는 다 비켜! 그렇지 않으면 공무 집행 방해로 체포할 거다!"
그러나 그의 말은 소용없는 듯했다. 동남아 무리는 민성의 경고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발목에서 날카로운 나이프를 꺼내 들고, 등 뒤에서는 마체테 같은 칼을 뽑아 들었다. 원장의 부하로 보이던 두 명의 사내 또한 원장을 보호하려는 듯 앞으로 나서는 자세를 취했다. 상황은 일촉즉발의 긴박한 순간으로 치달았다. 민성은 홀로 적들과 대치하며 긴장했다.
그때였다. 귓가에 익숙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의 시야 한쪽에는 거대한 컨테이너 박스 위로 몸을 드러낸 호연이와 미나가 보였다. 호연은 신이 난 듯 장난기 가득한 얼굴로 소리쳤다.
"아빠! 걱정 마! 아빠는 탱커! 나는 원거리 딜러! 하면 되겠다!"
호연의 외침과 동시에, 옆에 서 있던 미나는 발로 컨테이너에 기대어 있던 철제 사다리를 그대로 밀어 버렸다. '콰앙!' 하는 굉음과 함께 사다리는 바닥에 떨어져 엉망진창이 되었다. 이제 적들은 컨테이너 위로 쉽게 접근할 수 없었다. 미나의 얼굴에는 냉정한 결의가 서려 있었다.
그리고 호연은 망설임 없이 자신의 양쪽 주머니에서 쇠구슬들을 꺼내 들었다.
"차르르…"경쾌한 소리와 함께 그의 손에 놓인 수십 개의 쇠구슬들은, 그의 황금빛 눈동자가 번뜩이는 순간, 공중으로 사르르 떠올랐다. 쇠구슬들은 마치 보이지 않는 실에 꿰인 것처럼 일정한 간격을 유지하며 호연의 몸을 축으로 천천히 회전하기 시작했다. 그 움직임은 처음에는 고요했지만, 점차 속도를 더하며 강력한 에너지를 응축하고 있었다. 호연의 입가에는 싸움에 대한 기대로 가득 찬, 자신만만한 미소가 걸렸다. 남매의 기상천외한 전술이 이제 막 시작되려는 순간이었다. 민성의 입가에는 쓴웃음이 지어졌지만, 동시에 알 수 없는 든든함이 피어올랐다. 이 막무가내 남매가 또 어떤 활약을 보여줄지, 그는 잠시 동안의 전투를 기대하며 자세를 잡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