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행숙 《무슨 심부름을 가는 길이니》
밤은 어둠으로 포장된 빛의 선물일 수도 있다. 나는 그렇게 밤을 읽고 페이지를 넘기고, 그래서 포장을 풀고 싶어 한다. 밤의 한가운데서 환한 환희가 나오기를 기대하고, 기대하다가, 그저 기댄다. 밤의 어깨는 어둠 덕분에 기댈만하다. 나는 풀리지 않은 매듭 안으로 손을 넣어 그리움을 만진다. 밤은 신에게서 사람에게로 사람에게서 또 다른 사람에게로 또 다른 사람에게서 신에게로 전달된다, 선물된다.
밤의 층계
깊은 밤이란, 빌라 옥상에 세 사람이 달을 보며 서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중 한 사람은 어둠과 구별되지 않아서 두 사람이 자기들 두 사람뿐이었다고 기억하는 것이다.
한층 더 깊은 밤이란, 칸막이와 칸막이로 이루어진 사무실, 그리고 사무실과 사무실로 이루어진 빌딩이 한 개의 텅 빈 상자가 되는 것이다. 그리고 다른 세계로 사라졌다가······ 돌아오는 마술처럼 거대한 상자의 미로에서 검은 성냥개비 같은 사람이 홀로 걸어 나오는 것이다. 그의 몸을 사납게 물어뜯던 불길은 다 어디로 갔을까?
그리고 가장 깊은 밤이란, 달의 인력이 파도처럼 계단을 공중으로 끌어 올리는 것이다. 그리고 계단에 빠진 사람은 삶의 바닥이 얼마나 깊은지 깨닫고 커다란 충격에 휩싸이는 것이다.
어둠은 주도권을 잡기 위하여 애를 쓰지만 여의치 않다. 차근차근 계단을 오르듯 달이 떠오르면 새로운 밤의 국면으로 넘어간다. 펼쳐진 면에 올라서서 나는 사위를 둘러본다. 팽팽하게 당겨져 주름 하나 없는 어둠은 존재하지 않는다. 나는 애써 밤의 풍경으로 남기를 원하고 어둠은 그저 밤의 배경으로 만족해야 한다. 밤은 벽을 세우고 틀을 만들어 벗어날 수 없는 뚜렷함으로 모든 것을 각인한다.
우리를 위하여
그 밤의 언덕에서 개 한 마리가 컹, 컹, 짖고 있었다.
그 모습은 우리 모두가 속한 세계로부터 저 홀로 툭 튀어나온 듯 고독하게 보였다.
그 고독이라면 전 세계로부터 한 걸음 뒤로 물러선 당신의 것이기도 했을 것이다.
그 세계에서 우리는 끝없이 긴 한 줄의 문장을 언제나 끝맺으려 하고 있었다. 우리는 우리를 넘지 못하는 국경선을 형성하고 있었다.
그 국경선에서 우리는 우리의 사슬이었다. 우리는 우리를 앞에서 사랑하고 옆에서 의심하고 뒤에서 밟았다. 우리는 우리의 무덤을 팠다. 어느 날 당신이 내디딘 단 한 걸음 때문에
그 한 걸음 때문에 당신은 우리의 대오에서 사라졌다. 그 밤의 어둠 속에서는 뭔가에 쒼 듯 베테랑 사냥꾼조차도 다 잡은 짐승을 눈앞에서 놓치는 일이 벌어지곤 했다.
그 개처럼 당신은 짖어라.
그 추리닝을 입은 개처럼 당신은 허공과 싸워라. 그 허공이 당신을 남김없이 먹어치우리.
그날이 그날처럼 24시간 흘렀다.
항구적으로 불안은 우리를 위하여 전류처럼 흐른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를 위해 언제나 환하게 불을 켠다.
벽 너머의 소리에 귀를 댄다. 충혈된 눈에는 영혼을 담을 수 없어, 아니 충혈된 눈으로는 영혼을 볼 수가 없어. 오늘밤은 충혈 되었나보다. 지켜보는 눈들이 많아 일일이 밝힐 수가 없는 사연들로 가득하다. 마지막으로 밤과 이야기한 것이 언제였는지, 밤의 접힌 부분을 만지작거린 것은 누구였는지, 소리 내지르는 밤을 다독인 것은 누구였고, 내 목소리를 쓸어 담아버린 것은 무엇이었는지.
“열어도 열어도 다 열리지 않는 기다란 서랍처럼 그 복도를 나는 천천히 걸어간다. 아직도 끝이 보이지 않다니, 그 복도의 길이를 도무지 믿을 수 없어서 뒤를 돌아보면, 누군가 나를 가만히 지켜보고 있는 것이다. 그때, 우리는 아주 잠깐 눈이 마주쳤을 뿐. 어느 생의 법정에서도 서로의 얼굴을 영원히 증언할 수 없을 거야.” - <그 복도> 중
밤의 가장자리, 손톱으로 둥글게 만져지던 소용돌이, 밤의 무릎, 착석의 흥분으로 들끓던 소름, 잊고 있던 친절함을 목도하려고 목을 길게 빼야 하는 순간 붙잡아야 하는 밤의 난간을 향해 손을 뻗는다. 밤은 중언부언의 변호인, 그 말은 하지 않는 것이 좋겠군요, 거들먹거리는 밤에게 한 방 먹이고 싶어 하던 나는 말라버린 밤의 우물로 내려간다. 밤은 우물의 입구만한 크기로 줄어든 무대에서 나와 함께 거듭된다.
“가슴팍에 칼을 꽂듯 세계의 심연을 들여다봤다면, 그리하여 마침내 공포를 깨우쳤다면, 신입 당원이여, 지붕 위로 쫓겨난 개여, 아직도 자기 믿음이 부족한 자여, 그대는 비밀을 파헤친 자, 더 많이 알게 된 자예요. 지구는 날개 없는 거대한 새입니다. 선택받은 자의 얼굴은 뺨을 맞은 자의 얼굴과 닮았습니다. 지금 뺨을 맞은 사람으로 하여금 말하게 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당신이 비명을 질러야 합니다.” - <지구를 지켜라> 중
섬세한 의심의 눈초리로 밤을 본다. 나의 물음에 대꾸하기 바란다. 밤의 표정을 넘겨짚어 막강해지고 싶다. 밤을 지붕 삼는 대신 밤과 한 지붕 아래에 있고 싶다. 시인의 시를 각성제로 삼아, 잠들지 않으려고 한다. 밤의 옆구리를 찌르고 거대한 물음표를 조명 삼으려고 한다. 밤만이 나를 잠재울 수 있기를 바란다. 나의 등을 토닥이고 귓속말을 해주기를 원한다. (나는) 어제의 밤이 아니니, 오늘 밤만 생각하세요...
김행숙 / 무슨 심부름을 가는 길이니 / 문학과지성사 / 138쪽 / 2020 (20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