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무 살 때였어요. 대부분 그렇듯 대학교에 입학하게 되었지요. 비록 대학 진학에 조금의 흥미도 없었지만, 담임선생님의 추천으로 현재까지 업으로 삼고 있는 과에 진학하게 되었어요.
시작이라는 단어는 설렘과 불안을 동시에 일으켜요. 대학에 가던 그때의 저를 떠올리면 비록 불안이 더욱 컸지만요. 저는 서울의 집에서 경기도에 있는 학교까지 통학했었어요. 학교에 가는 날이면 대중교통으로 하루 3~4시간을 꼬박 보내는 게 만만치 않았지요. 다행히 사람이라면 누구나 새로운 환경에 적응해 나가려는 습성을 지니고 있어요. 개인마다 속도의 차이는 있지만요. 저 또한 장거리를 통학하는 삶에 점차 익숙해져 갔어요.
하지만, 불안에 떨게 만드는 요소들은 여전히 있었어요. 물론, 적절한 불안은 위험을 미리 예견하고 대처하게 만들어요. 우리 삶에 필수적인 부분이지요. 다만, 과할 때 문제가 일어나요. 저에게는 사고가 마비될 정도로 불안에 떨게 하는 상황이 있어요. 대학교에 진학해도 나아지지 않았지요.
저에게 불안을 자주 일으키는 상황은 혼자서 새로운 일을 수행해야 될 때에요.
어렸을 때부터 저는 타인의 의견을 따르는 것에 익숙했어요. 가깝게는 부모님으로부터 멀게는 스쳐 지나가는 사람에 이르기까지, 그 사람들의 말을 허투루 듣지 않았어요. "이렇다더라" 하며 가볍게 이야기하는 것에도 의미부여를 하고 곱씹으며 제 삶에 이입시켰어요. 지금 마음에 와 닿지 않아도 분명 숨겨진 의도가 있고, 모두 다 저를 위해서 하는 말이라고 생각했거든요.
낯선 경험과 마주할 때마다 누군가가 저에게 필요한 말을 건넬 때까지, 먼저 도움을 줄 때까지 기다렸어요. "도와주세요"라고 말하는 건 실례이며, 모른다고 하는 저에게 사람들이 실망한 거라고 생각했거든요. 글을 쓰는 이 순간에도 도움이 필요하면서도 요청하지 못했던 기억들이 떠올라요.
여의도에서 길을 잃었었는데 부모님께 연락해서 물어보면 뭐라고 하실까 겁이 나고, 주변 사람들에게 물어본다는 마음은 생기지 않아 새벽까지 길을 찾아 집으로 돌아왔던 기억.
고등학교 미술시간 때 선생님께서 설명해주신 내용을 놓쳐서 아직 못 그리고 있을 때, 선생님이나 친구들에게 어떤 내용인지 물어볼 자신이 없어서 곁눈질로 옆 친구의 그림을 보며 흉내 냈던 기억.
나이가 들어가며 불안의 강도는 차츰 낮아지게 되었어요. 제 성격이 대담하게 변한 건 아니에요. 불안을 느낄만한 상황을 덜 겪게 된 것도 아니에요. 선행 경험이 예행연습이라고는 하지만, 우리의 삶 도처에는 낯선 경험들이 즐비하고 있거든요.
모른다는 건 부끄러운 것이 아니며, 물어보는 건 실례가 아니라는 것을 깨닫고부터 불안이 가라앉기 시작했어요.
사람이라면 누구나 서툴기 마련이에요. 특히 익숙하지 않은 상황에서는 두드러지지요. 가 본 적 없는 길을 제 집 드나들듯 다닐 수 있는 사람은 없고, 선생님의 설명을 놓치고서 좋은 작품을 만들 수 있는 사람 또한 없어요. 다른 누군가라면 주변 사람들에게 묻어보며 그 상황을 해결했을 거예요. 저는 "도와주세요"라는 말에 서툴렀기 때문에 남들보다 불안을 오래, 자주 느꼈다는 걸 비로소 알게 되었어요.
저는 그동안 서투른 저를 탓했어요. 낯선 경험으로 불안해하는 저를 이해하고 달랠 생각은 하지 않고요.
요즈음 저는 사람들에게 길을 묻기도 하고, 헤매는 사람들에게 먼저 다가가 길을 알려주기도 해요. 강의시간에 못 들은 내용이 있으면 친구들에게 먼저 묻기도 하고, 갈피를 못 잡는 친구들에게 제 의견을 이야기하기도 해요.
마더링이라는 표현이 있어요. 어머니가 아이를 따듯하게 보살피는 걸 뜻한다고 해요. 우리의 마음을 타인이 공감해준다고 해도 한계가 있어요. 필요할 때마다 공감을 받을 순 없거든요. 우리 자신의 마음을 가장 잘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은 우리 스스로예요. 이 점을 기억하며 어려움을 겪을 때마다 스스로를 위로해보는 건 어떨까요. 마치, 엄마가 된 것처럼 스스로에게 따뜻한 말을 건네보는 거예요.
"괜찮아. 잘 해내고 있어"
제가 도와달라는 말을 했을 때 상대방이 거절할 수 있음을 알고, 상대방 또한 모를 수 있다는 걸 이해해요. 저 또한 누군가의 부탁을 거절하기도 하고, 모른다고 솔직하게 대답하기도 하지요. 도와달라는 말은 결코 실례되거나 자신을 깎아내리는 표현이 아니에요. 이 세상을 더불어 살아가도록 하는 지혜로운 비결이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