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오직 네 모습 그대로의 널 필요로 했었다.

(크눌프, 헤르만헤세)

by 고길동


이야기가 천천히 흐른다. 전개라 할만한 줄거리는 없다. 묘사는 차분하지만 감각적이다. 풍경묘사가 좋다. 객체를 주체처럼 그려낸다. 경험과 통찰에서 나온 묘사를 만나면, 예전 나의 감정이 이해된다.


'여인들이 눈물 흘리며 미소 짓는 모습처럼 훨씬 내밀하고 진실된 빛을 발하고 있었다'


크눌프는 세단락으로 구성된다. 1. 초봄, 2. 크눌프에 대한 나의 회상, 3. 종말


세 단락 각기 때를 달리하여 쓰였다.등장인물도 몇 없다. 이야기의 교차편집 같은 것도 없다. 담백하다. 굳이 세어보자면 5명이 등장한다. 크눌프, 다가오는 친구부인, 하루 데이트 한 옆집 하녀, 함께 여행하는 오래된 친구, 죽음을 앞두고 만난 하느님


혼자 살다가 혼자서 죽을 수밖에 없다. 거기에 예외는 없다. 처음 사는 것이니, 나의 경험은 언제나 부족했고, 삶에 자신이 없었으며, 조금은 위축되었다. 다른 사람의 경험과 속내를 알 수 없었으니, 나만 부족하고, 나만 어숙룩한 줄 알았다. 그런데 오히려 아닌 척 했다. 젊은 시절 많은 기회와 신호가 있었지만 나는 깨닫지 못했고 더욱 허둥거렸다. 사랑하고, 사랑받고, 실망하고 실망시켰다. 상처받은 적도 있었고, 아마도 받은 것보다 훨씬 더 상처주며 살았으리라.


헤르만 헤세는 이런 나를 위로한다.


난 오직 네 모습 그대로의 널 필요로 했었다. 나를 대신하여 넌 방랑하였고, 안주하여 사는 자들에게 늘 자유에 대한 그리움을 조금씩 일깨워주어야만 했다. 나를 대신하여 너는 어리석을 일을 하였고 조롱받았다. 네 안에서 바로 내가 조롱을 받았고 또 네 안에서 내가 사랑을 받은 것이다. 그러므로 너는 나의 자녀요, 형제요, 나의 일부이다. 네가 어떤 것을 누리든, 어떤 일로 고통받든 내가 항상 너와 함께 했었다.

(하느님이 크눌프에게)



젊음을 지나며 삶에 당연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걸 깨달았다. 당연한 것이라고 생각하는 게 있다면, 그건 스스로 자만하고 있는 것이다. 당연하다고 생각했을 때 나는 방심했고, 당연함이 무너졌을 때 나는 어쩔줄을 몰랐다. 삶이 바람같은 것일진데, 삶에 당연한 게 뭐가 있겠는가.


삶이란 바람같은 찰나의 느낌 아니겠는가. 그래서 아름다운 것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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