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양빛으로 물든 하늘 바라보며 벤치에 나란히 앉은 정순과 명수
명수/
오늘 어땠어요?
정순/
숨통이 탁 트여~
명수/
이 끼를 감추고 그동안 어떻게 살았을까.
정순/
고물고물 한 손자 커가는 거 보면서 나름대로 행복했어.
내가 20살 때 결혼해서 재정이 낳았으니 뭘 알았겠어.
게다가 남편 없이 혼자 벌어먹고 사느라 늘 바쁘고 부족한 엄마였지.
재정이한테 갚는 심정으로 유민이 키웠지 뭐.
명수/
내가 고등학교 졸업하면 고백하려고 얼마나 벼르고 별렀는데
누나 시집갔다는 이야기 듣고 바로 군입대했잖아요.
정순/
그랬어? 호호. 넌 어떻게 살았어? 애들도 다 컸겠다. 안사람은 어때?
명수/
애들은 다 컸고 와이프는.. 이혼했어요.
기러기로 오래 지내다가 작년에.
애들 학비 뒷바라지 다 했는데 결국엔 이혼하고
애들도 엄마 곁에 있겠다 그러고..
가슴 한쪽 뻥 뚫린 채 그냥 살아요.
명수 손 위에 살며시 손 얹는 정순. 손을 맞잡는 명수.
말없이 서로 바라보는 두 사람.
붉게 물든 노을 바라보는 두 사람 뒷모습.
도무지 일이 손에 안 잡히는 재정,
정순의 카톡 프로필 사진이 바뀐 걸 보고 정순에게 전화를 건다.
하지만 여전히 받지 않고,
넋 놓고 키보드를 누르고 있는 재정.
화면 가득‘ㅠㅠㅠㅠㅠ ’ 글자가 찍힌다.
휴대전화 문자 도착음 울리고, 확인하는 재정.
“어머니 책임지고 찾겠습니다. 걱정 마세요”
유민은 소파에 앉아 혜경모가 읽어주는 동화를 듣고 있다.
유민이는 입 크게 벌려 하품한다.
혜경 모/
졸려?
유민/
재미없어.
혜경 모/
유치원에서 너무 신나게 놀았어?
유민/
할머니, 할머니는 왜 주인공이랑 친구들 목소리를 똑같이 해요?
우리 할머니는 다른데.
마른걸레로 거실 가구 위 먼지 훔치던 도우미, 풉-하고 웃는다.
혜경 모가 째려보자 황급히 주방으로 들어간다.
혜경 모/
유민아, 그게 중요한 게 아니라 책 내용에 집중해야지.
유민/
칫. 싫어
혜경 모/
(욱하지만 참고) 유민이 한글 다 안다며? 얼마나 잘 읽나 할머니가 들어보자.
현관문 열고 들어오는 혜경
혜경/
엄마, 저 왔어요. 유민아~
혜경 모/
언제 온다니 잘난 니 시어머니는!
혜경/
(눈치 주며) 엄마
혜경 뒤 따라온 재정이 현관에 서 있다.
혜경 모/
(눈을 못 마주치며)
박서방 왔는가, 아줌마, 찌개 올려요~
혜경모. 주방으로 황급히 들어간다.
식탁에서 밥 먹는 중. 도우미가 수발을 들고 있다.
혜경 모/
아주머니, 오늘 얘네 따라가서 집안일 좀 도와주고 오세요
혜경/
괜찮아요. 우리가 알아서 해.
헤경 모/
집안 엉망일 거 아니야. 밥이나 제대로 챙겨 먹겠어?
재정/
제가 많이 도와주고 있습니..
혜경 모/
(재정 말 자르며) 여기는 두고 지금 간단하게 짐 챙겨 나와요.
도우미/
네.
말없이 밥 먹는 가족들. 유민은 입맛이 없는 듯 깨작거린다.
혜경/
유민아~
유민/
맛없어.
재정/
더워서 입맛이 없나 보네. 다른 거 뭐 먹고 싶은 거 있어?
유민/
떡볶이.
혜경/
내일 엄마가 해줄게
유민/
할머니가 해주는 거. 할머니 떡볶이!
혜경/
박유민! 할머니 여행 가셨어. 오시면...
유민/
치, 거짓말.
혜경/
뭐?
유민/
할머니는 여행 간 게 아니라 모험을 떠난 거야! 00처럼. 모험을 떠난 거야.
재정/
유민아.
유민/
우리 집에 갈래.
풀 죽은 유민, 숟가락을 놓고 거실로 가 버린다.
유민은 거실 소파 한쪽에 앉아 세운 무릎을 감싸 안고 고개를 숙이고 있다.
유민에게 장난을 거는 재정.
재정/
난 티라노사우르스다. 다 잡아먹어 버릴 테다.
살짝 고개 들어 재정을 보는 유민.
재정/
어디서 맛있는 냄새가 나는데. 먹어볼까.
재정이 간지럼 태우자 유민은 까르르 웃음을 터트린다.
유민/
항복, 항복!
시끌벅적하게 노는 재정과 유민.
벌컥 화장실 문을 열고 나오는 혜경. 입에 칫솔을 물고 있다.
혜경/
그만 좀 해.
재정/
왜 그래. 한창 잘 노는데.
혜경/
대책 없는 게 꼭 닮았어.
재정/
뭐?
혜경/
나 몰래 연락하는 거 아니야?
어머님 하나 때문에 지금 몇 명이 힘든데 어쩜 이렇게 감감무소식일 수가 있어!
재정/
들어가서 이나 마저 닦으세요.
혜경/
이 상황에 당신도 대책 없기는 똑같아.
사태파악능력 제로라고 제로.
재정/
이따 유민이 재우고 얘기하자.
혜경/
창피하긴 한가보지?
재정/
그만하라고!
재정은 홧김에 집을 나가고 홀로 남겨진 유민, 울상을 짓고 서 있다.
테이블에 혼자 소주 따라 마시는 재정. 쓴맛에 인상 찌푸린다.
동기 도착해 재정 맞은편에 앉는다.
동기/
안주 하나 없이 원샷씩이나?
재정/
앉아.
동기/
어머니랑 아직 연락 안 돼?
재정/
보다시피.
동기 잔에 술 채워주는 재정.
재정/
유민이 말로는 모험을 떠나셨대. 멋있지?
동기/
홈쇼핑 회사엔 연락해 봤어?
재정/
아들인데요.
우리 엄마 좀 만나게 해 주세요. 그럴까?
입 앙 다무는 동기. 재정 잔에 술을 따른다.
재정/
(한 잔 들이킨 후)
우리 엄마랑 나랑 나이차가 딱 20살이거든.
친구들은 엄마가 누나 같다면서 부러워했는데
난 젊고 예쁜 엄마가 너무 싫었어.
동기/
그날 보니까 평범한 분은 아니시더라.
재정/
물가에 내놓은 애 마냥 늘 불안해.
나 태어나고 얼마 안 돼서 아빠 돌아가셨거든.
어릴 때 외할머니가 나 고아원이나 친가에 보내버리고 재혼하라고 노래 불렀어.
동기/
젊은 여자 혼자 자식 키우기가 힘든 시절이니까.
외할머니는 어머님 생각해서 그러셨나 보지.
재정/
맞아 엄마는 일하느라 매일 밤 10. 11시에 들어오고.
내가 자다 깨는 습관이 그때 생긴 거야.
엄마가 내 옆에 있는지 없는지 확인했거든.
어느 날 엄마가 날 버리고 도망갈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어.
동기/
어머니도 고생 많이 하셨네.
재정/
그런데 유민이 보면 자꾸 어릴 적 내가 생각나.
유민이한테서 조금이라도 소홀하는 것 같으면
맞아, 나한테도 저랬지. 하면서 화가 나.
딩동 문자 메시지 도착음 울리고, 휴대전화 확인하는 재정.
문자메시지 “어머니 계시는 곳 찾았습니다. 00텔 302호”
재정/
잠깐만. 전화 한 통만.
포장마차 밖에서 서성이며 전화 통화하는 재정.
-7화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