벤치에 앉는 정순과 명수.
정순은 명수에게서 한 뼘 정도 떨어져 앉는다.
명수/
맘고생 많으셨죠?
정순/
……
명수/
오랜만에 아들한테 연락이 왔어요.
근데 갑자기 돈이 필요하다고.
정순/
그래도 그렇지! 내 사정 뻔히 알면서 나한테 그런 짓을 해?
명수/
죄송해요.
근데 절대 누님이 생각하는 그런 거 아니에요.
저 못 믿으세요?
정순/
내가 널 어떻게 믿어.
명수/
그때 말한 감독, 다시 날 잡았어요.
누님 사진 보여줬더니 마음에 든대요.
대본 리딩만 해보고...
정순/
(말 자르며) 아니. 지금은 아니야.
명수/
누님!
정순/
난, 내가 행복하면 자식들도 기뻐할 거라 생각했어.
그런데 애들이 바라는 내 모습은 따로 있나 봐.
시간이 걸려도 좋아. 아들이 응원해줄 때 그때 다시 할게.
알았다는 듯 고개 끄덕이며 응원하듯 정순 손을 꽉 잡아주는 명수.
혜경은 혜경모와 함께 차를 타고 아파트 입구로 들어온다.
힘없이 눈 감고 기대앉은 혜경.
그런 혜경을 걱정스레 힐끔 쳐다보는 혜경 모.
혜경 모/
얼마나 힘들면 회의 중에 쓰러져.
그 난리에 스트레스 안 받고 배겨?
속 편하게 죽 같은 거 먹고 일찍 자, 응?
(정자 쪽 보고) 가만, 저기 사돈 아니야?
차 세우는 혜경모.
혜경모/
(혜경 흔들며) 눈 뜨고 좀 봐봐
혜경/
(귀찮은 표정) 어디?
맞네 우리 어머님. 근데 옆에 누구지?
자동차 다시 출발하고, 정자 옆을 지날 때 혜경은 창문 아래로 몸을 숙인다.
주차 후 차에서 내리지 않는 혜경 모녀.
정순이 남자와 있는 모습을 보고 놀라 어안이 벙벙하다.
혜경 모/
너네 시어머니 어떡하니.
혜경/
…….
혜경 모/
아니, 훤한 대낮에 그것도 동네에서.
혜경/
엄마, 아닐 거야 그런 거.
혜경 모/
아니긴 뭐가 아니야. 다 보고선 딴 소리야 얘는.
아빠 선거 얼마 안 남은 거 알지?
괜히 여러 말 나오기 전에 시어머니 단속 제대로 해. 알겠어?
혜경/
(배 아픈)아..
혜경 모/
왜 그래? 또 아파?
혜경/
어, 엄마 잔소리 스트레스.
혜경 모/
(눈 흘기고) 으이그, 들어가서 쉬어.
차에서 내리는 혜경, 혜경의 뒷모습 바라보는 혜경 모.
혜경 모습이 안 보이자마자 휴대전화 꺼내든다.
혜경 모/
박서방, 많이 바쁜가?
재정(F)/
엄마!!
양복차림의 재정, 정순과 팽팽한 긴장감 속에 마주 보고 있다.
분위기가 심상치 않음을 느낀 혜경은 유민을 데리고 조용히 방으로 들어간다.
재정/
그 남자, 엄마 돈 가져간 사람 맞죠?
정순/
돌려준대.
재정/
여기가 어디라고 와요.
엄마, 제발 남의 눈 좀 신경 쓰고 살아요.
저희 보기 부끄럽지도 않으세요?
정순/
내가 뭘 그렇게 잘못했니?
이날 이때까지 유민이 키우고 너희 살림해줬으면 됐지
나도 하고 싶은 게 있어.
조금이라도 젊을 때 해 보겠다고 도전하면
응원은 못해줄망정, 그게 엄마한테 할 소리야?
재정/
(떨리는 목소리) 싫어요.
엄마가 남들 앞에서 웃고 그러는 거 정말 끔찍해요
정순/
그게 무슨 소리야.
재정/
밤늦도록 식당일 하느라 안 들어오면 내가 엄마 데리러 갔었잖아요.
그때 많이 봤어요. 술 취한 아저씨들이랑 엄마 있는 거..
(울음 터지는) 어떤 아줌마가 와서 엄마 머리채 잡고 남편 내놓으라 하는 것도.
정순/
그만!
재정의 따귀를 때리려는 정순, 재정이 정순의 팔을 잡는다.
정순/
너 지금 엄마한테 무슨 소리 하는 거야.
재정/
근데 그 집 아들이 나랑 같은 반에 있었어요.
내가 학교에서 어떤 취급을 당했는지.. 엄마는 상상이나 해봤어요?
아무 말 못 하는 정순. 호흡이 가빠진다.
정순/
나 혼자 너 키우면서 단 한 번도 부끄러울 행동 한 적 없다.
재정/
저도 지금까지 그렇게 믿고 버텼어요. 그러니까 제발. 엄마
꺽꺽 울음을 삼키는 재정과, 담담하게 눈물 고인 정순.
불 꺼진 재정 방, 재정은 노트북만 켜 놓고 우두커니 앉아 있다.
정순이 등장하는 홈쇼핑 화면을 여러 번 리플레이한다.
화면 속 환하게 웃는 정순을 바라보는 재정.
출근 준비 끝내고 아침 식사 중인 재정과 혜경, 국그릇 놔주는 정순.
재정/
생각을 좀 해봤는데요.
정순/
내가 먼저 할게. 오늘 나가서 집 알아볼 거야.
혜경/
어머님!
재정/
……
정순/
유민이도 많이 컸고 나도 더 늦기 전에 하고 싶은 거 해야지.
그래. 너희한테는 미안해.
하지만 이렇게 마음먹은 이상 주저앉을 수는 없어.
재정/
(다 먹고 일어나며) 먼저 일어날게요.
재정/
쳐다보지도 않고 묵묵히 밥 먹는 정순.
외출 준비를 하고 나온 정순.
하늘 올려다보며 따사로운 햇살에 눈 찌푸리고.
심호흡을 크게 한 후 길을 나선다.
건물 간판 올려다본 후 들어가는 정순.
아카데미 내부에는 성공한 실버모델들의 사진이 크게 걸려 있다.
강의실 유리창 너머로 수업을 엿보는 정순.
워킹 연습하는 예비 실버모델,
대사 연습하는 배우 지망생들이 보인다.
안내데스크 직원과 몇 마디 나눈 후 등록카드를 받아 드는 정순.
정순의 손이 정성껏 등록카드를 작성해 내려간다.
회사 로비에서 입구를 쳐다보며 서 있는 재정.
누군가를 보고 뛰어가 맞이한다.
재정/
여기에요!
정순/
갑자기 무슨 일인데..
재정/
일단 들어가요.
정순/
들어간다고?
재정/
시간 없어요. 빨리.
정순의 등을 밀며 회사 안으로 들어가는 재정.
사무실 안으로 나란히 들어오는 정순과 재정을 본 부장은
벌떡 일어나 반갑게 맞는다.
부장/
아이고! 오셨습니까.
정순/
네, 안녕하세요.
부장/
아무리 모자지간이라도 이런 건 제대로 하는 게 아무래도 낫죠?
박대리와 천천히 차 드시면서, 네네. 하하.
정순/
네?
부장이 자리를 뜨고, 무슨 소린지 어리둥절한 정순.
정순/
(소곤) 왜 오라고 한 거야?
재정, 무심하게 종이 한 장을 건넨다.
재정/
읽어보고 괜찮으면 사인해요.
정순/
이게 뭐야?
천천히 읽어 내려가는 정순, 입가에 미소가 번진다.
정순/
계약금은?
재정/
(손가락 다섯 개 펴 보이며) 이 이상은 안 돼요.
판매량 봐서 재계약 때 다시 이야기하는 걸로!
계약서에 커다랗게 이름 석자 쓰는 정순.
[에필로그]
삼삼오오 동네 할머니들이 손자들을 데리고 나와 담소를 나누고 있다.
저만치서 선글라스에 커다란 왕골모자 쓴 정순이 다가온다.
동네 할머니들 호들갑 떨며 정순을 반긴다.
미자 앞에 와서 선글라스를 벗는 정순
정순/
오랜만이네?
미자/
(떨떠름) 언니 요즘 잘 나가더라.
정순/
응. 누구 덕분에 아들이랑도 화해하고.
할머니/
유민 할머니 정말 대단해! TV에도 나오고~. 우리도 좀 알려줘요
정순/
(선글라스 벗으며)
일단!
(뜸 들이고) 집을 나가.
무슨 소린지 어리둥절한 할머니들.
정순의 휴대전화 벨 울리고 으스대는 표정으로 전화를 받는 정순.
정순/
여보세요?
어머, 사부인~ 잘 지내시죠?
선거운동이요?
휴대전화 손으로 가리고 새어 나오는 웃음 참는 정순.
정순/
제가 촬영스케줄이 잡혀 있어서요. 호호
전화 끊은 정순.
야호- 외치며 왕골모자를 하늘로 던져 올린다.
- 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