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세실리아 Oct 30. 2020

정직원인데 다시 수습사원 하라고?

대표가 열명이 채 되지 않는 전 직원들을 불러 모아 비장하게 이야기했다.

'큰 규모의 회사에서 합병하자는 제안이 왔다. 기회라면 기회인데, 난 솔직히 너희가 걱정된다'라고 운을 띄웠다.


본인들(임원)이야 괜찮지만 너네(사원들)가 그 회사에 가서 적응할 수 있겠냐는 거다. 갑자기 '가족 같은 회사' 모드로 전환되어 험한 세상에 자식 내놓기 걱정되는 엄마의 마음을 가진 것처럼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오랜 시간 사회생활을 한 지금도 그때 대표가 무슨 의도로 물었는지 모르겠다.


그 날 저녁 친구에게 이야기했더니, 일찍부터 사회생활을 해서 눈치가 빠른 친구가 '그 정도면 이미 합병하려고 결정한 거고, 직원의 동의를 얻는 거 아니야? 합병할 마음 없으면 애초에 안 묻겠지. 그냥 좋은 기회인 거 같다고 해. 일개 사원인 네가 합병하지 말라고 할 거야, 어쩔 거야'


듣고 보니 맞는 말 같았다. 저 말을 전하면서 대표가 ‘우리(임원)는 이제 연차가 있어서 다시 큰 회사 갈 기회는 이번이 마지막이다’라는 말을 했기 때문에 친구 말이 일리있어 보였다.


다음 날 대표는 한 명씩 불러 의사를 물어봤다. 한 명씩 불렀다고 해봤자 방한칸짜리 사무실이라 목소리가 다 들렸다. "저는 합병 안 했으면 좋겠어요. 이 회사랑 함께 성장하고 싶어요"라는 패기 넘치는 대사도 들렸다. (대표는 이런 대답을 원했던 것인가)


나를 부르길래 "대표님이 말씀하신 대로 좋은 기회일 수도 있을 거 같아요. 저는 대표님께서 결정하시는 대로 따를게요"라고 했더니

“그래? 큰 회사를 다니고 싶구나. 그럼 넌 큰 회사로 이직해 보는 게 어떻겠니?"라는 엉뚱한 소리를 한다.


뭔 뜬금포 같은 소리냐.. 충성심 테스트 하는 것도 아니고.


"네? 저는 말씀하신 대로 합병이 좋은 기회가 될 수도 있을 거 같다는 의미였고요. 지금처럼 유지하신다면 당연히 회사의 의견에 따르죠"라고 했다.


그때부터 갑자기 황당한 소리를 하기 시작한다. 너는 집에서 곱게 자라서 절박함과 근성이 없다, 온실 속 화초라 깡이 없다 등등.


그러더니 이야기 좀 하자며 날 건물의 비상계단으로 데려간다. 건물 계단에서 담배에 불을 붙이더니 연기를 내뿜으며 '오디션 프로그램을 보면 끝까지 깡으로 밀고 나가는 사람이 성공하지 않냐'며 '네겐 그런 근성이 부족하다'는 둥 이야기를 시작했다.

그러면서 "우리가 작은 회사라 너무 아무 기준 없이 정직원이 되었던 거 같다"며 "다시 3개월의 테스트 기간을 가져보면 어떻겠느냐"라고 한다.

(고작 직원 5명 미만인 회사에서 인턴 3개월에, 수습 3개월 하고, 수습 기간 동안 월급 80%만 받았는데, 기준 없이 정직원이 됐다는 건 무슨 소린지... (관련 글 : 신입은  따지면  되나요?)


그 말을 듣자마자 두 번 생각할 것도 없이 '그렇게 생각하신다면 저는 퇴사하겠다’라고 말했다.

그랬더니 아주 깜짝 놀라는 표정을 지었다. 연기가 아니라 진짜 깜짝 놀라는 거 같아서 나는 더 황당했다.

설마 내가 저 말도 안 되는 제안을 받아들일 거라 생각한 건가?


그 당시 회사가 영업적으로 좋지 않은 상황이라 잉여인력이 생긴 시기였다. 그리고 나는 새로운 프로젝트에 들어갈 예정으로 내 인력을 세이브해놨는데, 그 프로젝트가 증발된 상황이었다. 고로 내가 잉여인력이었다.

나는 이런 이유로 인건비가 아까워서 저런 제안을 했다고 생각했다. 크게 두 가지 생각이 들었다.

1) 내가 열 받아서 나가면 내 인건비가 줄어드니까

2) 수습 핑계로 월급을 다시 80%만 주는 꼼수를 쓰려고


그런데 대표가 퇴사하겠다는 날 만류하며 ‘그런 의미가 아니었다'라고 하니 더 혼란스러워졌다. 그렇다면 도대체 말도 안 되는 저런 제안은 왜 한거지?


난 억울하거나 속상해서가 아니라 '모멸감 들어서' 눈물이 나왔다.


대표는 비상계단을 나가면서 "다음에 중요한 대화할 땐 이렇게 우는 모습을 보이지 않았으면 좋겠다"라고 했다.

난 속으로 "다음에 이런 대화를 하실 땐 담배 피우며 이야기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생각했다. 비흡연자인 나는 연기 자욱한 계단에서 울렁거렸다.


다음 날 우연찮게 새로운 프로젝트가 생겼고 나는 나갈 때 나가더라도 맡은 일은 제대로 해야겠다는 생각으로 평소처럼 업무를 했다.

그걸 제출한 날, 갑자기 대표가 '이렇게 완벽하게 해올 줄 몰랐다'며 너무 마음에 쏙 든다고 오버했다. 그렇게 서바이벌이며 수습이며 계단에서의 대화는 서로 함구하고 없던 일처럼 지나갔다. 합병 이야기도 쏙 들어갔다.


나는 이 프로젝트 잘 마무리하고 퇴직금이나 받고 나가자는 생각에 다녔다.


프로젝트 종료 후 여러 가지 이유로 퇴사를 결심하게 됐고(관련 글: 신입은 휴가 가지 !) , 퇴사하겠다 말하자 대표는 "퇴사 의사를 밝힌 게 두 번째니까 잡지 않겠다"라고 했다. 그러면서 내게 했던 말이 “지난번에 내가 그런 제안을 했을  네가 관둔다고 해서 의외였다. 네가 순둥이인 줄로만 알았는데, 그런 의외의 면이 너를 지탱하는 같다"라고 말했다.


나름 덕담이라고 한 말 같은데, 기분 나빴다. 날 얼마나 호구로 본건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저런 말도 안 되는 제안을 당연히 수락할만한 사람으로 보였나? 그리고 그걸 거절했다는 이유로 '의외로 중심 있고, 그게 너를 지탱하는 힘'이라니...?


이후 다른 여러 회사를 다닐 때는 맡은 일을 책임감 있게 해낸다는 소리는 들었어도 '근성 없다' 등과 같은 부정적 피드백을 들은 적은 단 한 번도 없다. 하지만 첫 회사에서는 비교 대상이 없기 때문에 저런 소리를 들어도 진짜 내가 부족해서라고 생각하기 쉽다.


첫 회사를 관둘 땐 대표 말대로 정말로 내가 근성이 없는건가 스스로를 돌아보기도 했다. 하지만 그 근성과 끈기라는 건 지극히 상대적인 것이다. 사실 회사를 다니다 보면 의외로 성실하지 않은 사람이 많아서 내가 맡은 일만 책임감 있게 수행해도 평타 이상은 치게 된다. '근성', '끈기', ‘열정’같은 추상적이고 열정 페이를 떠올리게 하는 단어들을 굳이 일터에서 떠안고 있을 필요가 없다. 그런 단어들 없어도  책임감있게  몫은 해냈다.


또한 근성과 끈기 역시 합당한 보상을 바탕으로 나오는 것이다. 나보다 먼저 이 회사를 퇴사했던 동료의 띵언이 생각난다. "월급 주는 사람과 물리적으로 가까이 있다는 건 너무 피곤한 일이에요"


나한테 말도 안 되는 제안을 했던 대표의 속내는 아직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때의 교훈으로 ‘가족같은 분위기’를 강조하는 작은 회사는 무조건 피한다.

이전 04화 신입은 휴가 가지 마!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