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께 일하는 이사는 감정 기복이 심했다. 아침에 기분 좋으면 한 옥타브 높은 목소리로 ‘굿모닝~’ 경쾌하게 인사하며 들어오고, 기분이 안 좋은 날엔 땅에 꺼질 듯 허스키한 목소리로 '안녕하세요'하며 들어왔다.
임원 제외하고는 신입사원밖에 없는 대여섯 명 남짓한 곳에서 분위기에 큰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었다. 가끔 말도 안 되는 까탈을 부릴 때면 '혼자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 찍고 있나?' 생각하기도 했다.
에피소드 1
어느 날, 중요한 계산을 해야 한다며 소리를 지른다. "1억 5천2백2십3만 원에서 2백 빼면 얼마지?"라고 외친다. (정확한 숫자는 기억 안 나지만, 저런 식이었다)
"빨리 계산해보란 말이야. 뭘 그렇게 넋 놓고 있니?"라며 날 쳐다보길래 얼른 휴대폰의 계산기를 꺼내 들어 부르는 대로 계산하고 화면을 보여줬다.
"아닌 거 같은데? 다시 계산해봐 다시! 이백을 빼보라고!!!" 소리를 지르니 나도 조바심이 나며 당황했다.
"너!! 이백이라고 하니까 이백만 뺀 거야? 이백만 원을 빼야지!" 하길래 아차 싶어 "아~ 다시 계산할게요"라고 하니 "너 바보니?'라고 꽥 소리친다.
바보 아니냐며 씩씩대는 모습을 보니, 뒤집어엎고 하극상해버릴까 생각이 들었다(상상에선 뭔들 못하리). ‘지금 관두고 다른 회사 가면 경력 인정될까?'와 같은 현실적인 생각으로 머릿속 회로가 돌아가는 동안 그 이사는 진정됐다.
갑자기 솔 톤으로 "자기야~ 아까 바보라고 해서 미안”하고 씩 웃으며 내 자리를 지나간다.
에피소드 2
세면대의 손 세정제가 떨어졌다며 나보고 회사 앞 마트에 가서 사 오란다. 이런 심부름이 싫었지만 콧바람 쐬러 간다고 좋게 생각하기로 하고 길을 나섰다. 마트에 갔더니 펌핑해서 쓰는 세정제가 모두 품절이었다. 고체비누를 살까 하다가 이상한 포인트에서 깔끔 떠는 이사가 왜 찝찝하게 고체비누를 사 왔냐고 할 게 분명했다. 그리고 화장실이 아닌 사무실 내에 있는 세면대라, 비누가 눌어붙고 물이 흘러내리는 등 불편할 거 같았다.
사무실로 돌아가 "펌프형 핸드워시가 모두 품절이라 내일 다시 가볼게요"라고 했더니 "넌 세정제가 없으면 안 사니? 비누 사면되지 넌 왜 이리 응용력이 없니?"라고 소리 지른다.
응용력? 일도 아니고 비누 심부름에서 '응용력'이라는 단어가 등장하니 깊은 빡침이 몰려왔다.
말하고 나니 자기도 궁색한지 '이런 응용력이 업무에서도 적용되는 거야'란다. 당장 비누 사와서 저 인간한테 던져버릴까 온갖 망상을 했다. 하지만 역시 속으로만 생각하고 실행하지 못했다.
그 자리에 있던 다른 직원은 내게 '고체비누 사 왔으면 왜 이런 거 사 왔냐고 저 성격에 분명 난리 쳤을 것'이라고 했다. 맞다. 나도 그 생각 때문에 고체 비누를 안 샀던 거다.
에피소드 3
당시 회사는 청소하는 분을 따로 고용하지 않았다. 사원 몇 명이 번갈아가며 청소를 했다. 출근해서 밀대에 부직포를 붙여 바닥을 닦고, 가습기를 세척한 후 깨끗한 물을 담아두고, 직원들이 마실 드립커피를 내린 후에야 업무를 시작했다.
그러다 점심시간이 되면 쌀 씻어 밥솥에 밥 해 먹고 설거지를 했다. 주방이 아닌 욕실용 낮은 세면대였는데, 밥먹고 소화되기도 전에 허리를 숙이고 설거지하면 속이 부대꼈다.
회사의 냉장고는 항상 가득 차 있었다. 음식을 잘 버리지 못하는 대표가 직원 생일 파티하고 남은 케이크, 먹다 남은 배달음식 등을 냉장고에 쟁여놨기 때문이다. 가끔 하는 냉장고 청소 역시 신입사원의 몫이었다.
어느 날 아침, 뒤늦게 출근한 이사가 창틀을 손가락으로 쓱 문질러보더니 '너네 먼지 청소는 안 하니?' 짜증을 낸다(목소리가 신경질적이라 항상 화내는 것처럼 들렸다).
회사에서 청소하는 것도 짜증나는데, 청소로 지적할 때면 '나는 누구, 여긴 어디'하는 생각이 들었다.
'내 인생의 흑역사'로 기억되는 사회초년생 시절, 첫 회사에서 겪은 일화들이다. ‘가족 같은 회사’라는 명목 아래, 불합리함에 대해 목소리를 내기 힘들었다.
작년 9월부터 '직장 내 괴롭힘'을 금지하는 근로기준법이 시행됐다. 사실 내가 겪은 일을 '직장 내 괴롭힘'이라고까지 표현하긴 무리가 있긴 하다. 또한, 당시는 지금과는 사회적 분위기가 다소 다르기도 하다.
하지만 불합리함을 경험해본 나로선 최근의 이런 움직임이 반갑다. 직장인들이 우스갯소리로 하는 '직급이 깡패다'라는 무식한 말로 후배에게 불합리한 일을 시키는 것에 대해 모두가 경각심을 가졌으면 한다.
[TMI - 직장 내 괴롭힘 당하고 있다면?]
1. 아래와 같은 일들은 직장 내 괴롭힘에 해당
- 팀장이 실수한 직원에게 '월급이 아깝다' 등 반복적 폭언
- 근로계약서 등에 명시돼 있지 않은 허드렛일만 시킴
- 사적인 심부름 등 개인적인 일을 하도록 지시
- 휴가, 병가, 각종 복지혜택 등을 쓰지 못하도록 압력
- 다른 직원들 앞 또는 온라인상에서 모욕감을 줌
- 특정 근로자의 일하거나 휴식하는 모습만을 지나치게 감시
- 업무성과를 인정하지 않거나 조롱
- 업무와 관련된 정보제공이나 의사결정 과정에서 배제
- 비품을 정당한 이유 없이 지급하지 않음 등
2. 직장 내 괴롭힘으로 인정되려면 세 가지 핵심 요소를 모두 충족해야 함
- 직장에서의 지위 또는 관계 등의 우위를 이용할 것
- 업무상 적정 범위를 넘을 것
- 신체·정신적 고통을 주거나 근무환경을 악화시키는 행위일 것
한 시민단체에서 직장인 1,000명을 설문 조사한 결과 45%가 갑질을 경험해봤다고 답했다고 한다. 모욕, 명예훼손, 부당지시, 업무 외 강요 순이었으며, 상급자로부터 당한 사례가 가장 많았다.
직장인의 대부분은 회사생활을 위해 여전히 참는 경우가 많다고 하지만, 직장 내 괴롭힘 금지법 시행 이후 ‘괴롭힘이 줄었다’는 응답이 53.5%로, ‘줄어들지 않았다’(46.5%) 보다 높게 나타난 점이 의미 있다.
내가 다녔던 회사도 변화한 사회적 분위기에 따라 지금은 달라졌을 거라 생각한다.
비누 심부름 시키고선 '응용력 없다'며 내게 소리 지르던 이사는 지금 어떤 모습일지 궁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