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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세실리아 Oct 31. 2020

혹시 이거, 직장 내 가스라이팅?

첫 회사를 떠올리면 '가스라이팅'이라는 단어가 떠오른다.


매번 '너네가 큰 회사 갔으면 매일 복사에 스캔 밖에 더했겠냐. 그런데 여기오니 다른 회사 대리/과장급이 할만한 업무 할 기회도 주어지지 않냐'는 말을 자주 했다.


반면 우리가 답답하다고 느껴질 때면 한숨을 쉬면서 '우리가 가족같은 분위기라 품고 가는 거지, 큰 회사 같으면 너희를 기다려주지 않았을 거다'라면서 회사의 세계가 얼마나 냉정한지를 설파했다.


언제는 큰 회사 가면 복사랑 스캔만 했을 거라면서, 지금은 또 큰 회사 가면 업무 못 따라가서 잘렸을 거라고? 도대체 어느 장단에 춤춰야 하는 건지.


업력 15~20년 차인 대표와 이사가 중간관리자 없이 사회경험 없는 신입들 데리고 일하려면 당연히 답답한 점이 있었으리라 생각한다. 하지만 인건비 아끼려 본인들이 택한 거 아닌가. 88만 원 세대가 사회적 문제가 되고 있던 당시에 그보다 덜한 인턴 월급을 줬고, 기껏 인턴 끝나니 이제 또 수습이라며 월급의 80%만 줬다는 점을 왜 생각 못할까?


근로계약서 미작성, 퇴직금 꼼수, 점심시간 미보장 등 기본적인 근로기준법도 지켜주지 않은 건 왜 생각 못하는지.


사회생활을 1년이라도 해본 경력직이라면 그런 꼼수가 안 통했을 테니 신입들 데리고 일한 걸 텐데 바라는 건 너무 많았다.


'개떡같이 말해도 찰떡같이 알아들어라', '센스가 중요하다', '디테일이 전부다'

대표와 이사에게 자주 듣던 말이다. 물론 다 맞는 말이다.

나도 오랜 시간 일을 해보니 사회초년생 시절 여러모로 부족했던 내 모습이 너무나 잘 떠오른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많은 인턴, 신입 후배들과 함께 일해보니 사회초년생 대부분의 공통점인 문제일 뿐 당시 나와 동기의 문제점만은 아닌 거 같다.



사내에 종종 글 쓸 일이 있었는데, 이사가 내게 한 번 맡겨보더니 '오 잘 쓰는데?'라며 칭찬했던 기억이 난다. 그 이후 내 업무와 관계있든 없든 종종 내게 맡기곤 했다.

그러더니 기분이 안 좋아 보이던 어느 날(감정 기복이 매우 심했다), 갑자기 "너 글 잘 쓰는 거 아니야. 학생치고 잘 쓰는 거고, 회사원 치고 잘 쓰는 건 아니야’라며 대뜸 소리를 지른다. 누가 뭐랬나.


인턴이었던 어느 날, 내게 중요한 이해관계자에게 전화를 하라고 시킨다. 10년 차가 넘은 지금 생각해보면 아무런 가이드 없이 그런 중요한 전화를 인턴에게 시켰다는 게 이해되지 않는다. 나는 전화해서 뭐라고 말문을 열어야 하는지도 모르겠고, 전화해서 뭘 확인해야 하는지도 전혀 몰랐다.

다행히 대학 동기 중 같은 업계에 먼저 일하고 있는 친구가 있었다. 친구한테 이러이러한데 뭘 확인해야 하냐고 메신저로 물어보니 친구가 아주 상세하게 적어줬다. 그래서 그걸 메모장에 복사해두고 전화를 했다.


방한칸짜리 사무실이니 서로의 숨소리까지 다 들리는 크기다. 통화하는데 대표와 이사의 킥킥대는 소리가 난다. 전화 끊고 나니 내게 “~  제법인데?"며 칭찬하는데 전혀 기분 좋지 않았다.

이후에 중요한 통화할때마다 수화기 넘어 상대편이 신경쓰이는게 아니라 옆에서 귀 쫑긋하며 듣고 있을 대표와 이사가 더 신경 쓰였다.


회사에 선배라도 있으면 전화 통화하는 걸 귀동냥으로라도 들으며 어떻게 통화해야 하는지 알 수 있었을 거고, 편히 물어보기라도 했을 거다. 임원 말고는 사원 밖에 없었던 그 상황에서 뭐 하나 제대로 가르쳐주지 않고 테스트한다는 명목으로 그렇게 시켜두고선 킥킥대거나 서로 메신저로 내 이야기를 하는 듯 타이핑 소리가 들리면 모멸감이 들었다.



퇴사하겠다고 했던 날, 대표는 내게 너는 이 업계와 어울리 않는 거 같으니 다른 일을 찾아보면 어떻겠냐고 했다.

그러면서 “지금처럼 일하다 보면 남대문 같은 인생을 살게 될 것"이라고 했다.


대표가 말하는 ‘남대문 인생'이라는 게 뭔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듣자마자 그 단어가 대표랑 어울린다고 생각했다. 직원들에게 설거지시키고, 시장에서 반찬 사 오게 하는 회사 대표는 내게 단 한 번도 멋있어 보인 적 없기 때문이다.

남대문 인생을 운운하던 대표는 본인의 삶은 뭐라고 자평했을지 궁금하다.



대표의 우려와 달리, 그 이후 오랜 기간 같은 업계에서 일했지만 저런 부정적인 피드백을 받은 적은 한 번도 없었고, 책임감 있고 손 빠르게 일한다는 평을 더 자주 들었다. 일하며 만난 업계 사람들에게 함께 일하자는 제안도 여러 번 받고, 이직할 때마다 딱히 어려움을 겪었던 적도 없다. 또한 '가족같은 회사니까 품어주지 다른 회사라면 낙오됐을 것'이라던 대표의 말과 달리 난 여전히 십 년 넘게 무난히 일하는 중이다.



'가스라이팅'이라는 단어가 유행하는 요즘, 내가 회사에서 경험했던 게 가스라이팅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의도한 가스라이팅은 아니겠지만, 의도하지 않은 가스라이팅도 분명히 존재하니 말이다.


TMI - 가스라이팅이란?

가스라이팅은 '가스등(1944년 영화)'에서 유래했는데,  남편이 집안의 가스등을 일부러 희미하게 해 놓고 아내가 어둡다고 할 때마다 당신이 잘못 본 것이라고 하거나 왜 엉뚱한 소리를 하느냐고 핀잔을 주며, 주변 환경과 소리까지 교묘히 조작해서 현실감을 잃도록 해 갈수록 스스로를 믿지 못하고 자책하며 가해자에게 의지하게 만들어서 나온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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