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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곽승희 May 09. 2017

무너지기 직전 나무를 발견했다

<자존감이 흔들리는 직딩을 위한 동화> 초고


나뭇잎이 흔들렸을 뿐인데 내가 무너질 것 같아 두렵던 시간을 떠올리면, 지금도 아파. 

취업 준비생, 신입 직원, 새 업무에 적응하지 못하던 경력 직원, 적고 보니 다 ‘직장인으로서의 나’밖에 보이지 않던 때이네.      


취업 시험에 떨어졌다는 결과나 직장 선배(혹은 상사)에게 듣는 지적을 곧 나라는 사람의 부족함, 모자람이라고 생각했어. 난 수십번 실패자가 됐지.      


그때마다 나만의 주문을 외웠어. 

‘이 모든 경험이 나에게 도움이 되리라.’ 

‘다 나를 위한 말이라고 생각하자.’ 


그 말을 꾸역꾸역 삼켰어. 참고 견뎠지. 삼키고, 삼키며 매번 흔들리면서 믿었어. 서서히 의문이 생기더라. 왜 나는 ‘일’과 ‘나’를 동일시할까. 


나는 ‘직장인으로’ 사는 대신
직장인으로‘도’ 살고 있는데.
일이 내 삶의 전부라고
착각했어.


또다른 나는 무엇일까 궁금했어. 내가 가진 특징, 정체성, 역할을 다 열거했어. 나라는 사람을 설명할 수 있는 명사와 형용사와 부사를 적었지.

      

글 쓰는 사람, 웅미(고양이) 언니, 야매 채식주의자, 딸, 여자, 여동생, 시누이, 인간, 애인,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의 친구, 선배, 후배, 건강이 그럭저럭 좋지 않은 자, 성격이 예민한 사람, 추상적인 주제의 대화를 즐기는 사람, 리디북스(전자책 브랜드) 충성 고객, 페미니스트, 밀알복지재단·뉴스타파·오마이뉴스·핀치·빅이슈 후원자, 자기 검열 생활자 등등 세어보니 50가지가 넘었어. 조금 더 생각하면 100개도 넘게 적을 수 있겠더라. 내가 이렇게나 많은 이름의 집합인 줄 몰랐어.      


수많은 이름은 ‘나’라는 나무에 매달린 나뭇잎 같았어. 물론 크기는 조금씩 다를거야. 나를 구성하는 정체성 중 내가 중요하게 여기는 몇 개는 나뭇잎 크기도 크고 색도 진하겠지. 취업 준비생, 신입 직원, 새 업무에 적응하던 경력 직원의 나뭇잎이 그랬을 거야.      

그림을 그렸어. 나라는 사람 뒤에 나무 한 그루가 있고, 그 나무에 수많은 정체성 잎사귀들이 달렸지. 크기가 큰 잎사귀에 병이 들면, 다른 잎에 전염될 수 있어. 오른쪽 제일 끝에 달린 잎에 강풍이 불 때 왼쪽 제일 끝의 잎까지 흔들릴 수 있지.


하지만 가장 중요한 뿌리가 튼튼하고 나머지 잎사귀가 살아있다면 나무는 무너지지 않아. 상처입은 나뭇잎을 고치기 위해 더 열심히 건강을 회복하거나, 그 나뭇잎을 살리는 게 전체에 필요한 일인지 연구하겠지. 


나뭇잎 하나가 흔들린다고 나무가 무너지지 않아. 그러니까 괜찮아. 어떤 한 가지 일에 실패해도 너라는 사람 전체가 실패한 게 아니야. 그러니까, 괜찮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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