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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스텔라 Oct 22. 2022

고혈압과 저혈압 사이

감정이 마음속 깊이 쌓여간다. 쌓이고, 쌓여 차츰 두꺼워진 감정은 어느 날 펑, 하고 갑작스레 터지고 나서야 알 수 있었다. 아, 많이 쌓여 있었구나. 이미 그때는 주체할 수 없이 감정이 흘러내리고 있기에 주워 담을 수도 없다.




하루는 갑자기 쿵, 하고 심장이 떨어지는 느낌을 받았다. 드물게 심장이 멈칫하던 것과는 또 다른 느낌이었다. 이러다 심장 마비가 오는 게 아닐까? 심장이 주는 낯선 느낌에 고민이 됐다. 간혹 젊고 유난히 건강했던 운동선수들도 ‘자택에서 심장마비로 사망’ 이런 헤드라인이 걸린 뉴스에 익숙해진 탓에 제법 심각한 상황이 그다지 무겁게 느껴지지 않았다. 사람 마음이란 게 참 그렇다. 가벼우려면 한 없이 가볍고, 무거워지려 마음먹으면 한 없이 무거워진다. 


 팔을 에워싸는 기계에 바람이 서서히 들어왔다. 팔을 꽉 조여 오는 압박감에 맥박이 빨라졌다. 혈압을 재는 기계의 묵직한 압박감은 늘 잴 때마다 나를 긴장시킨다. 온전하지 않은 뼈는 부분적으로 더 취약한 부분이 존재했다. 가령 정강이와 팔뚝, 기본적으로 더 약한 부위이자 늘 부상의 위험을 갖고 있는 부위였다. 요즘 들어 수술을 하지 않은 반대편 팔까지 변형과 통증이 오고 있어 혈압을 재기 전부터 고민스러웠다. 기계가 주는 압박에 혹여 팔이 또 부러지는 게 아닐까, 수술한 팔에 해도 괜찮을까, 반대편 팔도 불안하지만 이쪽으로 하는 것이 더 나을까. 이러한 많은 생각들이 간단한 혈압계 앞에서도 머릿속을 가득 채우며 나를 더욱 조바심 나게 했다. 긴장감 속에 측정된 혈압은 나의 쿵쾅거리는 마음이 고스란히 전해졌는지 딱 보아도 높은 숫자를 띄우고 있었다.


“요즘 혈압이 계속 높네요. 약 처방해드릴 테니 당분간 먹어보도록 하죠.”


병원에서는 숫자는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지속적으로 높은 숫자를 말하던 나는 고혈압이 되기 직전의 단계 정도라고 했다. 모든 미리 준비하는 것은 좋으니 건강과 연결되는 이것 또한 미리 조심하면 나쁠 건 없었다. 내가 하루에 먹어야 하는 알약의 개수가 늘어버렸지만 말이다. 하얀 알약 하나가 얼마나 나의 마음을 진정시켜 줄 수 있을지는 의문이었다.


 사람은 화나는 일이 없을 수 없다. 대처하는 방법이 다를 뿐. 컨디션이 안 좋을 때면 눈을 뜨는 순간부터 기분이 좋지 않은 날이 있다. 그럴 때면 작은 일에도 예민하게 반응하며 화내지 않아도 될 법한 일들에 화를 내고 있는 나를 발견한다. 언제나 마음이 타인을 향해 움직이는 게 아닌 것처럼 주위의 환경이 아닌 스스로 잘 해내지 못하거나, 문제점을 극복하지 못할 때 종종 마음은 자기 스스로를 향한 질책과 화를 쏟아낸다. 스스로에게 느끼는 좌절감은 타인에 의한 스트레스보다 나를 종종 더 힘들게 한다. 또 다른 문제는 화를 푸는 적절한 방법을 모른다는 것이다. 시간이 지나길 기다리며 화를 가라앉히는 건 화를 푸는 게 아닌 단순히 가라앉히는, 마음에 쌓아 놓는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스스로를 탓하는 동안 나의 마음은 조금씩 무게를 더해가고 있었다.


“우리 딸 혈압이 왜 자꾸 높아질까?”


혈압에 좋은 것들이 나열되어 있는 책을 보고 혈압에 좋은 음식이 나오는 TV 프로그램을 시청하며 약물의 도움 없이 혈압이 좋아질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하는 엄마는 나에게 물었었다. 엄마의 물음에 곰곰이 생각하던 나의 머릿속에는 단 하나의 이유밖에 떠오르지 않았다.


“높아질 이유밖에 없으니깐”


 이 시기 나는 팔 수술과 연이은 유방암 수술까지 마친 상태로 상실감이 주는 스트레스와 스스로 움직이지 못하는 갑갑한 생활의 연속으로 심신이 지친 상태였다. 신경이 곤두서 예민해질수록 스트레스는 쌓이고 신경질적으로 변해가니 혈압이 높아졌다. 식습관, 병적인 요인이 없을 때 생기는 고혈압은 마음의 병이라고 한다. 병원에서는 마음을 편안하게 먹으라고 말했지만 말처럼 쉽게 마음이 편안해진다거나, 화가 가라앉았다면 고혈압 환자는 지금의 반 이상이 줄었을 것이다. 


 잠을 자고 일어날 때면 머리가 핑그르르. 잠시 앉아있다 움직여도 핑그르르. 병원 검진 결과 나의 늘어난 하나의 하얀 알약이 내 몸 안에 들어와 자신의 역할을 톡톡히 해낸 것도 모자라 정상수치보다 혈압을 더 낮게 만들어 이번에는 저혈압 증상이 나타난 것이라고 했다. 의문을 가졌던 것과 달리 작은 알약 한 알이 몸에 많은 변화를 가져온 셈이었다. 내 의지대로 조절할 수 없던 몸 안의 숫자들은 하나의 알약에 의해 동요하고 있었다. 마음의 무게를 줄이지 못하는 사람에게도 필요한 동요가 있다. 자신의 의지대로 화내는 법도 모르고 푸는 방법도 모를 때 작은 돌멩이 하나가 퐁당하고 마음에 빠질 때 고요했던 마음이 일렁인다. 작은 병에 담긴 마음이 출렁거린다.


 아, 아. 아무도 없는 집에서 목을 가다듬었다. 그리고 처음에는 작게 아! 하고 소리 내보았다. 조용했던 집에 외마디 소리가 낮게 깔렸다. 아무도 없는 집임에도 나는 머쓱함에 주위를 둘러보다 다시 더 큰소리로 외마디 소리를 질러보았다. 내가 큰소리를 내어 본 건 처음이었다. 집안에는 아무도 없는 걸 알았는데도 그렇게 쑥스러울 수가 없었다. 크게 소리를 한번 내보니 괜히 웃음이 났다. 


 해보지 않은 것에 대한 어떤 시도든지 용기가 필요하다. 아무리 작은 용기라도 마음을 변화시키기 충분했다. 화를 내는 법도 화를 푸는 방법도 모르던 내게 필요했던 용기는 마음속에 큰 파장을 일으켰다.

주눅이라도 든 것 같이 생활하던 일상 속에서 큰 소리를 내어보았다.

나를 무시하는 태도를 보였던 타인에게도 화를 내보았다.

마음에 담아 두기에 바빴던 내가 감정이란 걸 표현하기 시작했다. 이 모든 것에 필요했던 건 지금껏 갖지 못했던 용기였다. 


 스스로 펑, 하고 터지기 전에 미리 감정을 흘려버렸다. 마음속 일렁이는 흔들림 덕분에 흘려보낸 감정들이 갑갑하고 무거웠던 마음의 무게를 줄여주고 있었다. 작은 알약이 몸을 변화시키듯 나의 용기는 나를 조금씩 변화시켜주고 있다. 

혈압을 조절해주던 알약은 그 역할만 한다. 역할을 할 수 있게 내가 먹지 않았다면 그냥 그저 그런 하얀 알약일 뿐이었을 것이다. 몸을 변화시킨 건 결국 내 자신이라고 생각한다. 꼬박꼬박 작은 알약을 챙겨 먹던 내가 있고, 내 마음을 조절하는 알약 용기가 있다면 앞으로의 내 마음속에는 불필요한 감정이 쌓이진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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