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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최저임금으로 먹고살 수 있을까?

[ 노동의 배신, 바버라 에런라이크, 부키 ]


[ 노동의 배신, 바버라 에런라이크, 부키 ]


 황제의 식사. 이 인터넷 용어는 2010년 대한민국을 분노케 만든 어느 정치인의 글에서 비롯됐다. 당시 한나라당 차명진 의원은 참여연대에서 주최한 '최저생계비로 한달나기 희망 UP' 캠페인에 참여했는데, 그는 단 하루를 6,300원의 최저임금으로 보내며 세끼를 인스턴트, 통조림 등으로만 때우고 이를 '황제의 식사'라고 칭해 전국민의 공분을 불러일으켰다. 또한 최저임금이 전혀 부족하지 않고, 임금인상을 반대하는 듯한 글을 남겨 정치권의 저소득층 생계에 대한 인식을 여실히 드러내었다.

 이렇듯 '정치쇼'로밖에는 보이지 않는 기득권의 최저임금에 대한 행동은 실제 최저임금으로 생활하는 사람들에게는 일종의 모욕이었을 것이다. 삶은 먹는 것으로만 유지될 수 없다. 사람은 부유하든 가난하든 누구나 아플 수 있고, 누구나 극심한 추위와 더위에 괴로워한다. 누구나 더 나은 교육, 더 나은 문화를 누리고 싶어하며 헌법에 나와있듯이 모든 국민은 행복을 추구할 권리가 있다. 


 하지만 정말로 최저임금이 위의 모든 것들을 보장해줄 수 있을까? 여기 단 하루도 아니고, 기득권도 아닌 평범한 작가가 겪은 3년간의 워킹푸어(working poor : 열심히 일해도 가난에서 벗어나지 못 하는 계층) 생존기를 담은 책이 있다.

 바버라 에런라이크는 전작인 [ 긍정의 배신 ]으로 이미 베스트셀러 작가 반열에 올랐었다. 그러나 그녀의 호기심은 부와 명예를 얻을수록 위가 아닌 아래를 향하게 되었다. 그리고 [ 노동의 배신 ]은 정부가 제시하는 통계와 낙관적 관측을 믿지 못한 그녀가 직접 뛰어든 사회의 가장 밑바닥 계층의 이야기를 담았다. 


 그녀는 3년동안 최저임금으로 살아나가기 위해 몇 가지 원칙을 세우고 관찰에 돌입한다. 첫째, 그녀가 이전에 얻었던 능력 즉 학벌, 경제력, 인맥 등을 모두 포기한다. 실제로 그녀는 3년간 어떤 이와도 연락하지 않고 혼자 지냈다. 

 둘째, 대도시와 시골이 아닌 중소도시에서 일자리를 구한다. 양극단에선 극에 치우친 모습밖에 볼 수 없기에 그녀는 대다수의 평범한 빈곤층을 만나려 노력했다. 마지막으로 몸이 완전히 망가질 상황에는 실험을 종료한다. 그러나 그녀가 겪은 빈곤층에겐 몸의 안위란 애초에 선택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어느 사회든 평범한 노동자들에게 기다리고 있는 일들은 대부분 '육체노동'이다. 바버라가 선택할 수 있는 일들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녀는 식당 종업원, 호텔과 가정집 청소부, 대형마트 직원, 요양원 보조원 등을 겪어가며 최소한의 인권도 보장받기 힘든 저소득자들의 현실에 직면한다. 

 먼저 미국은 우리나라와 다르게 직장을 얻기 위해선 '약물검사'를 받아야 한다. 마약에 취한 노동자가 매장에 어떤 피해를 끼칠 지 모르니 사전에 이 사람은 건강한 육체를 가지고 있습니다,라는 개인정보를 제공해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 미국 노동자들 중 약물 양성이 나온 경우는 100명 중 1명도 되지 않는다. 바버라는 기업들이 대부분의 노동자들을 마약중독자로 바라본다는 선입견을 갖고 있다고 지적한다. 


 어찌어찌 약물 검사를 통과했어도 기업의 억압은 계속 된다. 그들이 노동자들의 반란을 잠재우기 위한 방법은 두 가지이다. '사소한 친절'과 '동료의식'. 기업은 임금을 올려달라는 노동자들의 요구가 있기 전에 기업체 차원에서 일종의 특혜를 베푼다. 노동자들의 식사를 위해 쿠키나 샌드위치를 제공한다거나, 몸이 아픈 노동자에게 하루 쉬게 해주는 등의 것들이다. 제 3자의 입장에서 보면 이는 결코 커다란 혜택도 아니고, 어찌보면 당연한 노동자의 권리이다.

  하지만 실제로 빈곤층들은 자신이 받은 이 사소한 친절을 빌미로 복지 등의 기본적인 요구를 하는 데 커다란 심리적 압박을 느끼게 된다. 또 어떤 이들은 이 친절 때문에 몸이 아픈 상황에서도 과도한 업무가 원인이 아닌 자신의 탓을 먼저 하게 되는 서글픈 상황이 벌어진다.


  다음은 우리는 모두 '운명 공동체'라는 동료의식을 악용한다. 만일 노조가 결성되어 파업이 일어나면 어떻게 되겠는가? 파업을 원치 않았던 자신의 동료들이 같이 길바닥에 나앉을 수 있다. 그리고 노동자들의 파업으로 기업은 피해를 보고, 이 부작용은 결국 사회와 다른 빈곤층들에게 돌아간다고 기업가들은 주장한다. 

 결국 착해빠진 노동자들은 서로를 위한다고 생각하며 다같이 서로의 발목을 잡고 가라앉고 있는 것이다.


 저자는 이런 사회에 대해 분노를 느낀다. 중산층의 인식에서 바라봐도 빈곤한 자들의 삶은 너무도 비합리적이고, 너무도 안타까웠다. 그리고 이 책을 읽고 있는 나로서도 같은 종류의 절망을 느꼈다. 사회에서는 어느 하나라도 거저 이루어지는 것이 없다. 모든 물건과 서비스의 그림자엔 그것을 만들어가는 사람들, 즉 '빈곤층의 희생'이 자리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가 그들의 수고에 지불한 값은 '최저임금'이라는 너무나도 적은 값으로 치뤄졌다. 당연한 듯 그들과 우리를 구분하고, 스스로에겐 절대로 닥치지 않을 다른 세계의 이야기로 치부했다. 정말 부끄러운 일이다.


  그러나 만일 이러한 생각을 하며 조금이라도 사회를 바꿔나가고 싶은 이들에게 바버라 에런라이크는 아주 '간단한 방법'을 제시한다. 그들은 우리와 동등한 노동자임을 알고, 그들에게 감사한 마음을 갖는 것. 그것이 언젠가 커다란 폭풍을 불러올 나비의 작은 날개짓이 될 수 있다고 작가는 말한다.

 새로운 해를 맞기 직전인 지금, 최저임금에 대한 논쟁으로 사회는 떠들썩하다. 400원 정도의 낮은 임금 인상과 함께 물가는 그것을 훌쩍 뛰어넘을 정도로 치솟았다. 그리고 경제불황이라는 변치 않는 이유로 기득권에서는 그정도도 감사하라, 라는 태도로 일관하고 있다. 


 이런 흐름 속에서 우리는 6년 전 '황제의 식사'라는 인터넷 용어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해보자. 과연 어느 나라의 황제가 고단한 노동에 치이는 와중에도 빈곤의 굴레에서 여전히 벗어나지 못 해 비극적인 선택에까지 내몰리게 되는가. 우리는 알아야 한다. 가난한 이들은 황제가 되고 싶어 하지 않는다. 그들은 그저 평범해지고 싶다는 소박한 희망을 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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