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밤에 세 번을 깨어서 바로 눕고는 다시 잠들었던 기억이 난다. 요즘 들어 부쩍 중간에 잠이 깨면 피곤함을 느껴 누운 대로 잠이 깨기를 바라는데, 그게 잘 안된다. 이런 날일수록 침대에서 이탈하는 일은 과감함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는 걸 알기에 곧바로 화장실로 향한다. 면도까지 마치면 0600시, 핸드폰을 충전기에 꽂아놓기 위해 건넛방으로 이동하면서 문간방에서 잠을 자고 있을 아내를 불러본다. 여느 때 같으면 대답을 바로 했는데 오늘은 조용하다. 어제 늦게까지 나와 같이 시간을 보내다 내가 잠자리에 들고나서야, 근무처에 제출해야 할 주간 일과표를 짜느라 늦게 잠든 것으로 짐작된다. 방에 가까이 가서 다시 부르니 이제야 대답 소리가 들린다. 이제 나는 샤워를 하러 가면 되고, 아내는 아침 식사는 물론 내가 가지고 가야 할 세끼의 도시락을 챙겨야 한다. 0700시, 출근을 위해 버스를 타러 나가기 전까지 아내는 이렇게 늘 이른 아침부터 전쟁을 한바탕 치르고 나서야 자신의 출근 준비를 한다. 아마도 아내의 수고 덕분에 24시간 근무, 24시간 휴식의 강행군을 견뎌내고 있다는 생각에 감사함을 되새겨 본다.
영등포 01 버스 정류장 의자에 앉아 눈은 정면을 바라보면서 생각에 잠긴다. 오늘따라 오 분을 기다려도 버스가 오지 않고, 맞은편의 영등포 01번 버스가 지나가는 것이 눈에 들어온다. 맞은편 버스 기사가 창문을 열고 뭘 버렸는데, 바닥에 달라붙어 있다가 지나는 차가 일으키는 바람 때문에 건강식품 팩이라는 것을 알았다. 건강을 위해 알맹이는 알뜰하게 먹어 치우고, 쭉정이는 미련 없이 창밖으로 던질 수 있는 과단성이 놀랍다. 지하철에 오르자 숨 막히는 빽빽함 속에서도 모두 고개를 숙인 채, 눈은 작은 화면 속으로 들어가 있고 손만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는 모습들이 들어온다. 평일 근무지 역까지 가는데 걸리는 이십오 분은 대부분 꼬박 서서 가는 것이 일상이 되었고, 그 소중한 시간은 온전히 구독 신청된 브런치 글을 읽는데 쓰인다.그래서 나도 별수 없이 고개 숙인 사람들 대열에 기꺼이 동참한다. 출근할 때는 긴장해서 없었지만, 아침에 퇴근하면서 글 속에 빠져 허우적대다가 내려야 할 역을 지나친 적도 몇 번 있었음을 고백한다. 항상 근무지 역에 십분 일찍 도착해서 걷다가 들어갔는데, 오늘은 다른 날보다 늦게 버스를 타는 바람에 걷는 것은 포기해야 할 듯싶다. 나는 항상 지하철에서 내려 출근하는 젊은이들과 같이 역사를 걸어 나올 때, 아직 살아있음을 느끼게 된다.
근무지 출입구에 들어서니 남자 화장실 쪽에서 소란스러운 소리가 들렸지만, 교대자가 기다리고 있는 방재실로 직행했다. 업무 인수를 받고 있는데, 아니나 다를까 미화여사가 들어오더니 남자 화장실 변기 하나가 꽉 막혀서 관리원이 뚫어봤는데 아직 잘 안 된다고 했다. 오늘의 첫 임무가 변기 막힌 것 뚫는 작업으로 정해지는 순간이었다. 관리원과 교대로 삼십 분을 씨름한 끝에 드디어 통수 완료! 역시 그게 무엇이 되었건 막힌 것이 뚫린다는 것은 묘한 쾌감을 준다는 것을 다시 한번 느끼면서 오늘의 첫 번째 순찰을 시작했다.
나는 하루 네 번의 순찰을 매번 계단으로 올라가는데, 이층을 지나면서 지린내가 나기 시작했다. 아니나 다를까 무려 두 군데에서 과감하게 실례한 흔적을 발견하였고 냄새를 참으면서 올라갈 수밖에 없었다. 옥상에 올라 참았던 숨을 몰아쉬면서 ‘어제 무슨 광란의 밤 행사가 있었나?’ 하는 생각이 들었고, 미화 여사들에게 청소해야 할 구역이 추가되었다는 비보를 알리게 되었다. 이런 걸 두고 ‘양심’을 운운하기에는 격이 너무 떨어지는 행위라서, 어느 술 취한 망나니들의 행동으로 치부하고 넘어가야 하나 망설여졌다.
오늘은 아침부터 험난하게 시작한 것에 비해 민원은 많지 않았다. 냉난방기와 공기순환기 리모컨이 불량하다는 것, 샤워기 수압조정과 수납장 경첩 고장에 대한 보수를 요청한 것이 전부였는데, 그간의 경험을 살려 쉽게 해결해 주었다. 그리고 오래도록 지지부진했던 지하층 누수 방수작업 현장에서 진행상태 확인이 민원 처리와 병행해서 진행되었다. 오늘의 마무리로 계단에 실례한 입주자가 섬찟함을 느끼도록 ‘계단 방뇨 금지 안내방송’을 내보냈다.
이제부터 특별한 일이 생기지 않는 한 내가 온전히 컨트롤이 가능한 내 시간이다. 이곳에서 근무하고 글쓰기를 시작한 이후, 이 시간은 나에게 있어 가장 소중한 시간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아내는 내가 글 쓰는 것을 달가워하지 않는다. 심지어 “나이가 들어가면 내가 싫어하는 것을 하면 안 된다.”라는 표현하기까지 하면서, 무엇을 하든 같이 시간 보내는 것을 원했다. 그래서 비록 쉬는 날이라도 온전히 내 시간이 될 수 없어서, 근무 일 저녁 시간이 유일하게 내가 컨트롤할 수 있는 시간이 되는 것이다. 여느 아내들은 나이가 들수록 따로 보내는 시간을 좋아하고, 달라붙는 남편을 떼어내기 바쁘다던데 정말 아이러니다. 이걸 행복한 고민이라고 하는 건가?
어쨌든 이 자유로운 시간을 만끽하기 위해 오늘도 자판 위의 손가락이 춤추기 바쁘다.
갑자기 세대에서 호출한 듯 인터폰이 울리기 시작한다. 오늘은 조용히 지나가기를 간절히 바랐는데, 여성 입주자가 거의 울먹이는 소리로 “담배 냄새 때문에 도저히 견딜 수 없다.”라고 민원을 제기한다. 나는 담배와 관련된 민원은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이 뾰족하지 않아 가장 회피하고 싶은 민원 중에 하나다. 그 하부층의 모든 입주민을 용의자로 상정하고 일일이 전화해 경고성 멘트를 날릴 수도 없는 일이어서, ‘실내 금연 안내방송’으로 마무리하고 지나간다. 벌써 자정이다. 오늘은 담배 민원 때문인가 누려야 할 자유로운 시간이 순식간에 지나간 느낌이다. 공식적으로 자정부터 여섯 시간은 취침 시간이지만 소음, 빛으로 인한 안면방해로 온전한 숙면은 취하기 어려운 환경이다.
그래서 나는 다섯 시 반에 일어나 활동하고, 부족한 잠은 집에 가서 보충하는 것으로 피로 누적에 의한 체력 소진을 막아내고 있다.
평일의 하루가 지나갔다. 이렇게 보낸 시간도 어느덧 칠 개월째 접어들고 있다. 이년의 경력을 채우는 것을 생각하면 사 분의 일 이상이 더 지나간 셈이다.
우리가 살면서 겪게 되는 고난은 ‘우리가 한 일’과 ‘우리가 하지 않은 일’ 때문이라고 한다. 나는 이왕 해야 할 일이라면 신중한 자세로 경우에 맞게 하려고 하고, 하지 말아야 할 일은 핑계를 앞세워하는 일이 없도록 노력하고 있다. 하지만 모든 일들이 생각대로만 이루어지지는 않기 때문에 늘 뒤를 자주 돌아본다. 이제부터 인생은 빨리 가는 것보다 올바르게 가는 데 집중하려고 한다. 이틀에 한 번이지만 사회의 일원으로 활동할 수 있는 이곳에 중심을 두고 내가 하고 싶은 일들을 해나갈 것이다. 나의 존재를 더 확실하게 하는 활동이든, 내면을 탄탄하게 하는 활동이든 하루의 시간 안에서 충실하게 만들어 나가 보겠다.
‘내가 갖지 못한 것보다는 가지고 있는 것에 초점을 두고, 작은 것부터 만들어 가는 것이 행복의 지름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