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환절기라 그런지 집에 오면 자꾸 눕고 싶다. 뭔가 움직일 의욕이 줄어든 것도 같다. 일교차가 큰 날씨 탓일까? 아님 지금 막 인생의 반환점을 찍은 나이 탓일까?
# 친구의 전화
퇴근을 하고 침대에 누워 깜빡깜빡 졸던 찰나 전화가 울린다.친구다. 손가락하나 까딱하기 귀찮아서 그냥 못 본 척할까 하다가 몸을 일으켰다.
"여보세요?"
"나야. 오랜만이다. 잘 지내지?"
무슨 일인가 싶어 가슴 한쪽이 서늘해온다. 30대까지는 오랜만에 전화가온 경우,대부분 경사였다. 결혼식 혹은 돌잔치. 그런데 40대가 되자 상황이 달라졌다. 부모님의 부고 혹은 본인의 투병 상황을 알리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 나야 잘 지내지. 너는 잘 지내?"
"응, 잘 지내."
"근데... 너 무슨 일 있는 건 아니지?"
"없어... 그냥 퇴근하다가 네 생각이 나서 전화해 봤어."
"그래. 그렇다면 다행이다..."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친구와 처음 만난 건 고등학교 1학년때였으니 햇수로 28년이 되었다. 지금은 사는 곳이 멀어서 자주 보지는 못하지만 20대 때는 시간만 나면 붙어 다녔다. 그래서일까? 그 애 목소리만 들으면 20대의 내가 생각나서 참 애틋해진다.
얼마나 지났을까? 통화를 하던 친구가 자신의 이야기를 시작한다.
" 나 세 달 전에 팀장으로 승진했어."
"진짜? 축하해."
"근데 너무 힘드네... 밑에 있는 애들을 대하는 것도 상사를 대하는 것도. 둘 다 만족스럽지가 않고 너무 힘들어. 옛날에는 일이 참 재미있었는데... 그때가 그립다."
힘없는 목소리가 전화기를 타고 전해졌다.
# 시답잖은 위로를 건넸다
20대의 친구는 참 믿음직스러웠다. 항상 자신감이 넘쳤으며 매사에 에너지가 넘쳤다. 함께 있으면 나까지 그 에너지가 전이되는 느낌이었다.
40대의 친구는 지쳐 보였고 배터리가 방전되어 가는 건전지 같았다. 친구의 모습이 낯설면서도 퍽 위안이 되었다. 그 애도 나처럼 사십춘기를 앓고 있다는 것, 나만 혼란스러운 이 폭풍 속에 들어와 있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에 묘한 안도감마저 들었다.
"괜찮아. 고작 3개월 지났을 뿐이잖아. 넌 잘 해낼 거야. 처음이라 그래. 누구나 처음은 힘든 거니까. 넌 항상 잘해왔고 앞으로도 그럴 거야. 힘내!"라고 말하려고 했다. 하지만 입에서는 다른 말이 불쑥 튀어나왔다.
"잘하지 않아도 돼. 어차피 시간은 흐를 거고 어떻게든 일은 되어있을 거니까." 시답잖은 위로를 건넸다.
5월의 나뭇잎처럼 푸르던 젊은 시절은 지나갔다. 그 푸르름이 그리운 날에는 서랍 속에 넣어둔 초콜릿처럼 아껴두었던 추억을 하나씩 꺼내 먹어본다. 달콤 쌉싸름한 젊음의 맛. 젊음은 초콜릿을 닮았다. 혀끝에서 맛을 느껴보려 하면 이내 사르르 녹아 사라진다. 입안에는 아쉬운 잔향만 남는다.
OO야. 우리 그 정도면 열심히 살았어. 그러니까 남은 시간은 '열심히'는 빼고 그냥 살자. 가끔은 하늘도 보고, 길가에 핀 들꽃도 보면서 그렇게 그냥 살자. 그러다가 서랍 속에 넣어둔 추억도 하나씩 꺼내 먹으면서. 그렇게... 어차피 시간은 흐를 거고 어떻게든 일은 되어있을 거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