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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태섭 Nov 25. 2024

술 없이는 먹기 힘든 음식

맛있는 건 왜 술이 땡길까

 나는 최근 2년 동안은 꾸준하게 절주를 했다. 술 마시는 날을 무려 한 달에 4번까지 줄였다. (개가 사람 됐네) 그동안 나 때문에 고생한 여자친구에게 자신만만하게 말했다. "민지야 나 술 엄청 줄였다!" 술을 먹을 때마다 연락도 꼬박꼬박 잘했다. 친구들에게 꼬장도 안 부렸다. 시끄럽게 노래방 가자고도 안 했다. 넘어져서 다치지도 않았다. 집에도 잘 들어갔다. 얌전히 씻고 잘 잤다. 오 마이갓 다음날에도 모든 것이 기억났다. 숙취까지 없으니 1+1 행사처럼 기분이 좋아졌다. "와 드디어 내가 술을 조절해서 먹을 수 있는 건가?" 이대로만 간다면 술과 함께 평생 즐겁게 살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그렇게 절주의 삶을 살아가던 중 얼마 전에 기억을 또 잃었다. (사람이 또 개가 됐네) 1년 만에 생긴 일이다. 자신만만하게 떠들었는데 한순간에 무너졌다. 나름대로 노력을 했지만 기억 잃는 걸 막을 수 없었다. 이제는 인정할 수밖에 없다. 나는 절주가 안 되는 사람이라는 걸. 그래서 이제 절주가 아닌 금주를 하기로 결심했다.


 당장 금주를 했지만 금단증상은 없었다. 하지만 어떤 음식들을 먹을 때면 손이 떨리고, 다리까지 발발발 떨렸다. 마치 햄버거를 먹기 위해 콜라가 중요하듯이, 그 음식들을 먹는데 술이 절실하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나에게 금단증상을 유발하는 난이도 극악의 음식들을 소개한다.   


 먼저 소개에 앞서 금주에 대한 고통을 객관적인 점수로 표시하고 싶었다. 그래서 '고통 척도'를 직접 만들었다. 아래의 점수를 참고하면 금주에 대한 고통을 간접적으로 체감하는데 도움이 될 것이다.  


금주 고통 척도, NPS (Nodrink Pain Scale)

*아주 주관적으로 자체 제작한 고통 점수. (10점 만점 기준)

0점 : "술 없이도 충분히 먹어요." 고통 없음.

1-3점 : "뭐 견딜만합니다." 이 정도야 술 말고 물 마시면서 먹을 수 있음. 3살짜리가 약간 꼬집는 정도의 고통. 약간 고통스러움.

4-5점 : "이야 술이랑 같이 먹으면 더 좋을 텐데 아쉽습니다." 하지만 탄산음료나 논알코올 맥주 정도가 있다면 얼추 가능함. 7살짜리가 엉덩이 발로 차는 정도의 고통. 참을 만 하나 기분 나쁘게 고통스러움.

6-7점 : "와 이거 술 없이 먹을 수 있는 건가요?" 탄산, 논알코올 맥주와 함께 먹어도 부족함. 다른 사람들과 함께 먹으러 갔는데 옆에서 '짠짠' 거리면서 술이랑 같이 먹고 있으면 술잔을 집어던지고 싶은 충동이 생김. 사춘기 직전 남자아이가 주먹으로 내 옆구리 치는 정도의 고통. 상당히 고통스러움.

8-9점 : "성인이 된 이후로 이걸 먹을 때 단 한 번도 술 없이 먹어본 적이 없어요." 만약 술이랑 같이 안 먹는다? 그럼 그걸 왜 먹어?라고 생각하는 음식. 마동석이 손바닥으로 내 뺨을 후려치는 정도의 고통. 아주 매콤하게 고통스러움.

10점 : "술 없이는 안 먹어요." 왜냐하면 '그냥 죽음의 고통' 이기 때문에.


1. '장어' + 복분자 (NPS 8점, 아주 매콤하게 고통스러움)

 지글지글 익어가는 장어는 아주 고소하고, 풍미 또한 예술이다. 하지만 많이 먹다 보면 약간의 느끼함이 찾아온다. 그때 느끼함도 잡아주고, 장어의 스태미나를 배로 향상해 주는 게 있다. 그건 바로 '복분자' 만약 이걸 참으면 "엥? 네가 금주한다고? 며칠 뒤에 먹을걸 무슨 구라를 치고 있어"라고 말한 사람들도 의심을 거두기 시작한다. "와 이걸 참네 독한샛기"

 나는 장어를 먹고도 '복분자'를 참았다. 단 한 방울도 안 마셨다. 단지 '복분자' 냄새만 맡았을 뿐이다.  


2. '회' + 소주 or 소맥 (NPS 10점 만점, 그냥 죽음의 고통)

 겨울이 왔다. 대방어의 철이다. 하지만 나는 돈이 있어도 먹으러 가지 못한다. 왜냐하면 금주를 시작했기 때문이다. 회를 먹는데 술이 왜 필요하냐고? 그런 사람에게 물어보고 싶다. "회를 먹는데 술을 어떻게 안 먹을 수 있어요?!" 저 윤기 좔좔 흐르는 선홍빛 고기 한 점과 시이이원한 소주 한 잔이면 겨울날의 추위는 순식간에 스르르 녹는다. 그때 내 몸속 깊은 곳에서 외침의 소리가 들린다. "아 이게 행복이지.." 나는 이제 그 행복을 더 이상 느끼지 못한다. 아 아련하고도 행복했던 추억이여. 물고기들아 이제 너희들을 놓아줄게. 저 광활한 바다에서 마음껏 헤엄치며 세계 이곳저곳을 나 대신 여행하렴. 굿바이 마이 대방어.


3. '조개찜' + 소주 or 소맥 or 복분자 (NPS 8점, 아주 매콤하게 고통스러움)

 겨울철 따뜻한 조개찜은 얼었던 몸을 사르르 녹여준다. 만약 힘든 일이 있었다면 몸뿐만 아니라 얼어있던 마음까지 사르르르르 녹여준다. 하지만 마음까지 녹이기 위해서는 전제조건이 필요하다. 그건 바로 '술' 


 한국말 중에서 "친구야 오늘 조개찜 먹으러 갈까?"라고 말하는 건 "친구야 오늘 술 한잔 할까?"와 동의어다. 즉, 술 없이 조개찜을 먹는다? 도대체 무슨 맛으로 먹는 걸까. 물론 쫄깃하고, 탱글한 조개만 먹을 수도 있다. 하지만 계속 먹다 보면 바닷물의 짠맛을 희석시켜 주는 그 무언가가 강력하게 필요해진다. 술이 없는 조개찜은 팥 없는 팥빙수를 먹는 것처럼 허전하고, 고기 없는 햄버거를 먹는 것처럼 푸석하다. 앞으로 내가 술을 못 먹는다면 무슨 염치로 조개찜에게 내 얼굴을 비칠 수 있을까.  


4. '삼겹살과 보쌈' + 소주 or 소맥 (NPS 6점, 상당히 고통스러움)

 먹음직스럽게 구워진 '삼겹살'. 깔끔하게 정돈되어 김이 모락모락 나는 '보쌈'. 둘 다 먹기 전에 공손한 마음으로 상추를 손바닥에 한 장 펼친다. 그다음 고기를 올린다. 파절이, 무말랭이 같은 야채를 올린다. 쌈장을 묻힌 마늘을 올리고 상추를 덮는다. 완성된 쌈을 입속 가득히 넣는다. 우걱우걱 맛있게 씹는다. 앗! 목이 살짝 막힌다. 과연 이때 뭐가 필요할까? "야야 짠해야지!" 소주 '크하', 맥주 '크하', 소맥 '크하' 나는 이제 목이 막혀도 물만 '으악' 하게 마셔야 한다. 생각만 해도 아직은 상당히 고통스럽다.


5. 치킨 + 맥주 or 소맥 (NPS 4점, 참을 만 하나 기분 나쁘게 고통스러움)

 일주일에 한 번 이상은 치킨을 뜯는다. 주변에 봐도 그런 사람들이 많다. 바삭거리는 후라이드, 달짝지근한 양념을 남녀노소 모두가 좋아한다. 여기에 특히 시이이원한 맥주 한 잔이면 “크하 인생 뭐 별거 있나"라는 소리가 자연스럽게 나온다. '치맥'은 2012년 옥스퍼드 영어사전에도 등재된 세계적으로 모두가 인정한 맛이다. 그걸 이제는 못 먹게 됐지만 상관없다. 그나마 다행인 건 '치맥 논알코올'버전이 있기 때문이다. (이것도 사전에 넣어 주실 수 있나요?) 실제 맥주보다는 못하지만 뭐 그럭저럭 참을만하다. 옆에서 진짜 맥주를 시원하게 먹고 있는 사람이 있으면 약간 기분이 나쁘게 고통스럽긴 하지만..


6. 한우 + 소주 or 소맥 or 복분자  (NPS 6점, 상당히 고통스러움)

 내 고향 영주에 가면 한우를 무조건 먹는다. 1++등급 600g 정도를 6-9 만원으로 먹을 수 있기 때문이다. 한우는 가스불이든, 돌판이든, 숯불이든 어디에 구워 먹어도 맛있는 고기다. 앞-뒤로 구울 때 고기의 마이야르 반응이 어느 정도 올라왔다 싶으면! 그때 한입 '와앙' 하고 씹어준다. 입안에서 터지는 육즙과 입술 끝에 번지는 기름은 순간의 행복을 팡팡 터트려준다. 그때 부모님과 술도 한 잔씩 걸치다 보면 그동안 서로 못했던 이야기까지 술술 나온다. 하지만 이제는 부모님과 소통의 어려움이 생길 듯하다. 왜냐하면 술을 먹지 못하기 때문에. 이제 부모님과 중요한 이야기는 편지로 소통해야겠다.   


7. 야장 + 소주 or 소맥 (NPS 10점 만점, 그냥 죽음의 고통)

 '야장'이란 호프집이나 술집 등에서 야외에 테이블을 설치하고 영업을 하는 것을 말한다. 애초에 야장을 가는 목적이 술을 먹으러 가는 거다. 거기에서 술을 먹지 않는다? 그냥 죽으라는 말이다. 나는 이제 야장은 절대 쳐다보지도 못하게 생겼다.   


8. 밥 + 물 (NPS 0점, 술 없이도 충분히 먹죠. 고통 없음)

 역시 한국인의 힘은 밥 아니겠나. 예전 조상들도 고봉밥을 자주 즐겼다고 하는데 그 당시 술이 아주 비쌌거나, 나처럼 금주를 시도하는 조상들이 많았나 보다. 그래 난 앞으로 밥이나 많이 먹어야겠다.




(프롤로그) 술 없는 삶, 친절한 금자씨


금주+12일째 (없어 보이게 하루하루 세는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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