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족의 무덤(4): 베니아와 콘수-두 무덤 사이에서 듣는 이집트의 속삭임
룩소르 귀족의 무덤 산의 햇살 아래, 가장 깊은 골짜기에 자리한 한 무덤 앞에서 난 다시 한번 발걸음을 멈추었다. 화려한 파라오의 무덤은 아니었지만, 벽화를 마주한 순간 나는 단숨에 그가 누구였는지를 깨달았다. 이름은 베니아(Benia TT 343). 무기를 든 전사는 아니었지만, 그 어떤 전사보다 더 넓은 제국의 질서를 책임졌던 인물이었다.
베니아는 투트모세 3세 시대, 신왕국 제18왕조의 핵심 행정가로, 아멘 신전의 고위 사제이자 곡물 창고 책임자, 왕실의 재정을 총괄했던 실질적 권력자였다. 파라오가 전쟁터에서 새로운 영토를 넓히고 있을 때, 베니아는 테베에서 그 모든 승리를 실제적 체계로 전환하는 일을 맡았다. 전쟁이 끝나고 돌아온 병사들의 양식을 조달하고, 정복지에서 조공으로 들어온 금과 보물을 관리하며, 신들에게 바칠 제물을 집전하던 이가 바로 그였다.
무덤 벽화에는 그의 삶이 얼마나 질서 정연하고도 성대한 지 잘 드러나 있다.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건, 줄지어 들어오는 행렬과 커다란 제물 더미다. 거대한 빵과 과일 바구니, 살진 소와 거위, 술 항아리들이 질서 있게 나열된 모습은 마치 왕실 축제의 한 장면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는 단지 연회의 한순간이 아니다. 그가 얼마나 풍성한 재화를 다뤘는지를 보여주는, 말 그대로 ‘정치의 풍경’이었다.
그 앞에 선 사람들은 하나같이 고개를 숙이고, 차례를 기다리며 공물을 올렸다. 무덤 벽화 너머로 들려오는 듯한 대화가 귓가를 스친다.
“경배를 드립니다, 베니아 님. 이는 누비아에서 들여온 가장 좋은 꿀입니다.”
“좋다. 그 꿀은 오늘 신전에 바쳐질 것이다. 다음은 누구냐?”
“이곳은 시리아에서 가져온 포도주입니다. 왕께서도 즐겨 드셨던 것입니다.”
“왕의 즐거움이 곧 신의 기쁨이 되리라. 정성껏 준비한 너희의 수고가 보인다.”
짧은 대화였지만, 그 속에는 베니아의 명민한 판단력과 제물에 담긴 사람들의 진심을 꿰뚫는 통찰이 배어 있었다. 그에게 있어 재물은 단지 축적의 대상이 아니라, 이집트와 외지의 평화를 연결하는 도구였고, 파라오의 권위를 신들에게 연결해 주는 다리였다. 이처럼, 행렬은 단순한 음식과 물자의 이동이 아니라, 거대한 제국의 혈관 속을 흐르던 피와 같았다. 베니아는 그 피의 흐름을 조율하는 심장의 역할을 감당한 자였다.
그런 그를 위해 음악은 빠질 수 없었다. 벽화에서는 하프와 리라를 연주하는 음악가들의 행렬이 등장한다. 가슴에 손을 얹은 채 연주하는 그들의 자세는 그저 악기를 다루는 자의 모습이 아니었다. 그것은 마치 신성한 의식에 동참하는 제사장의 품위였고, 눈빛에는 한 치의 흐트러짐 없는 집중과 경외가 담겨 있었다.
하프를 연주하는 이는 연주 중에도 슬며시 고개를 들어 베니아를 바라보았다. 그 눈빛은 존경이었고, 감사처럼 느껴 쪘다.
“이 자리에 설 수 있음이 영광입니다.”
침묵으로 전하는 고백 같았다. 베니아는 고요히 고개를 끄덕였다. 언어 없는 대화, 소리로 이어진 교감이 벽화 속에 흐르고 있었다.
'리라'를 켜던 다른 연주자는 눈을 감은 채 연주에 몰입해 있었다. 손끝이 현 위를 지나갈 때마다, 그 음률은 공기를 가르고 공간을 채웠다. 그것은 단지 노래가 아니라, 살아 있는 헌사였고, 베니아의 존재가 이 땅 위에 남긴 울림이었다.
이 연주는 단순한 기쁨이 아니었다. 그것은 신을 향한 헌신이었고, 파라오의 권위를 소리로 봉헌하는 제의였다. 당시의 음악은 단순한 예술이 아니라, 통치의 언어였다. 악기 하나, 음 하나에 이집트의 질서와 신의 뜻이 담겨 있었고, 베니아는 그 가운데 선율을 통치의 도구로 삼을 줄 아는 인물이었다. 음악은 그의 권세를 찬양하면서도, 그가 품은 질서와 평화를 함께 노래했다. 그리고 그 선율은, 신전과 행정, 축제와 제사 사이를 유려하게 흐르며, 제국의 숨결을 하나로 엮는 고리였다.
베니아의 삶은 권력과 의례, 음악이 어우러진 균형의 미학이었다. 연회장이 아닌 무덤 속 벽에까지 이토록 생생하게 남은 음악의 장면은, 그가 단지 명령하는 자가 아닌, 마음을 울리는 주인이었음을 보여준다.
그리고 무덤 한가운데에서 그는 의자에 앉아 있다. 다른 벽화를 보니 한 손에는 지팡이, 다른 손에는 명령봉을 든 모습. 단순히 앉아있는 것이 아니라, 온 세상이 그의 손길 아래 질서 있게 움직였음을 상징하듯, 주변 인물들은 무릎을 꿇거나 두 손으로 제물을 받들고 있다. 그는 전장에 나가지는 않았지만, 이집트 제국의 기둥을 세운 인물이었다.
그가 앉은 자세는 권위를 과시하지 않았다. 오히려 조용하지만 단호했다. 그는 명령하지 않아도 사람들을 움직이게 했고, 꾸짖지 않아도 모두가 자신의 자리를 지키게 만들었다. 그에게 있어 리더십은 외침이 아니라, 존재 자체에서 흘러나오는 무게였다. 재물 운반자들, 제사장들, 서기관들조차 그의 눈앞에서는 자세를 낮췄고, 그의 한마디는 곧 왕의 뜻처럼 받아들여졌다.
실제로 베니아는 파라오 투트모세 3세 곁에서 제국의 행정을 이끌던 실무 총책이었다. 국경을 넘어 쏟아지는 조공을 기록하고, 사원의 제사를 조직하며, 곡물 창고를 관리하고, 지역의 세금을 조율하는 일까지 그에게 맡겨졌다. 전장을 지휘한 장군이 피로써 땅을 얻었다면, 베니아는 펜과 질서로 나라를 세웠다.
그의 무덤 벽화는 그가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신뢰와 존경을 받았는지를 말해준다. 사람들은 그를 두려워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 곁에 머무는 것을 영광으로 여겼고, 그가 주는 임무를 자부심으로 삼았다. 그가 사라진 후에도 사람들은 그를 기억했다. 죽음 이후에도, 무덤 한가운데 그는 여전히 나라를 다스리고 있었다.
무덤이란 보통 침묵의 공간이지만, 베니아의 무덤은 그 정의를 정면으로 거스른다. 이곳은 오히려 소리로 가득하다. 노래와 웃음, 하프와 플루트, 사람들의 움직임과 향기의 결 따라 울리는 공간. 마치 베니아가 남긴 마지막 축제가 지금도 계속되는 듯하다.
가장 먼저 시선을 사로잡은 건, 벽면 가득 줄지어 선 음악가들이었다. 하프를 어깨에 걸친 이가 조심스레 현을 튕기고 있었고, 류트를 든 여인은 몸을 약간 기울인 채 다음 음을 준비하듯 손가락을 띄워 올리고 있었다. 그들의 발은 바닥에 단단히 붙어 있었고, 시선은 앞을 향했지만 눈동자는 묘하게 집중되어 있었다. 말없이 흐르는 음악이 공기 사이를 지나가는 것만 같았다.
이들은 단지 소리를 내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들의 자세에는 훈련된 절도가 있었고, 움직임 하나하나에는 어떤 규칙과 질서가 배어 있었다. 머리카락은 단정하게 정리되어 있었고, 옷자락은 구김 없이 내려와 연주의 품격을 더했다. 그 모습은 마치 공연장이 아니라 제단 앞에 선 제사장의 태도와도 같았다.
나는 그 장면 앞에서 멈춰 섰다. 그들의 음악은 들을 수 없지만, 전해졌다. 손끝에서 흘러나오는 그 무언의 선율은 베니아의 삶을 찬미하고 있는 듯했다. 마치 이렇게 말하는 것 같았다.
“그는 잘 살았습니다.”
벽화 속 연주는 소리 없는 멜로디였고, 그 소리는 아직 끝나지 않은 듯 무덤 전체에 울려 퍼지고 있었다.
무덤 깊숙한 벽면 한쪽, 눈길을 끄는 것은 제사상 위에 놓인 음식들이었다. 무언가 절제된 화려함이 느껴졌다. 둥글고 두툼한 빵, 허리를 꼿꼿이 세운 채 놓인 오리, 단정하게 배열된 포도주 항아리와 막 꺾은 듯한 꽃다발. 그 풍경을 보고 있자니, 단지 먹는 것을 넘어서 하나의 의식처럼 준비되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모든 것이 삶을 대접하는 방식이었을까.
베니아는 아마도 사람을, 그리고 하루하루를 이런 방식으로 맞이했던 이가 아니었을까. 누군가에겐 단순한 음식일지 몰라도, 그에겐 기억과 존중, 그리고 나눔의 형태였을지도 모른다. 무덤 속에까지 이런 장면을 남긴 이유가 그것이라면, ‘자신이 어떻게 기억되길 바랐는가’에 대한 그의 내면이 은연중에 드러나는 것 같았다.
그리고 더 무덤 안쪽으로 들어가니 배 위에서 이어지는 연회의 장면이 나타난다. 사람들은 음식을 나누고, 음악을 연주하고, 향을 피우며 정성스레 무언가를 기념하고 있었다. 강 위에서 펼쳐지는 이 장면은 베니아의 죽음을 애도하는 의식이었을까, 아니면 사후의 세계로의 평안한 이행을 기원하는 순례였을까.
그 배에 베니아의 가족도 함께 있었을까.
아내는 조용히 입술을 움직이며 기도했을지도 모르고, 아이들은 어른들을 따라 어설픈 손짓으로 포도주 잔을 들었을지도 모른다. 벽화를 그린 장인들과, 의식을 준비한 하인들, 배를 움직인 사공들까지—그들 역시 한 사람의 마지막 여정이 외롭지 않기를 바랐던 마음이 있었을 것이다.
무덤 속 그 장면을 오래 바라보게 되었다. 축제 같기도 했고, 작별 같기도 했다. 삶과 죽음이 물길 위에서 천천히 교차하는 듯한 기분이었다. 이 모든 장면을 통해 베니아가 말없이 전하고 싶었던 무언가가 내게 흘러들어오는 것 같았다.
그가 원했을지도 모르는 건,
사랑하는 이들과 나누는 따뜻한 식사 한 끼.
기억될 만한 조용한 음악.
그리고 혼자가 아닌 마지막 항해.
그 벽화 앞에서 문득 내 마음속에도 작은 물결 하나가 일었다.
베니아의 무덤에서 나와 한참을 걸었다. 등 뒤로는 여전히 음악이 울리고 있었고, 공물 행렬이 벽화 속에서 줄을 서고 있었다. 그 장면이 뇌리에 남아 있는 채로 발걸음을 옮겼다. 다음 무덤은 ‘콘수’의 것이었다.
입구는 생각보다 소박했다. 안내판조차 희미했고, 입구 주변에는 별다른 장식도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안으로 들어서는 순간, 전혀 다른 분위기가 펼쳐졌다. 조금 더 어두운 색감, 더 차분한 선들, 그리고 묘하게 물의 기운이 감도는 공간.
나는 조심스럽게 벽화들을 훑었다. 그러면서 이런 인물이었을까 하고 추측해 보게 되었다. '콘수(Khonsw TT 31)'는 베니아처럼 행정이나 정치의 중심에 있었던 인물은 아니었던 것 같다. 무덤 장식의 양식, 입은 옷의 형태, 제물 앞에 서 있는 자세들을 보면, 그는 제사장 계급, 혹은 신전에서 노래와 의식을 담당했던 ‘신의 가수’ 같은 역할을 했을 가능성이 있어 보였다.
벽화 속 그는 대부분 조용한 자세로 등장한다. 향을 들고, 손을 모으고, 눈을 감은 채 기도하듯 서 있다. 누군가를 향해 지시하거나 제국의 크기를 과시하는 장면은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자신보다 더 큰 존재 앞에서 몸을 낮추는 장면들이 반복된다. 그래서인지 그의 무덤은 하나의 큰 신전 같기도 했고, 또는 고요한 기도실 같기도 했다.
그의 이름이 ‘콘수’였다는 것도 흥미롭다. 달의 신 콘수와 같은 이름을 가진 그는, 실제로도 밤의 고요함처럼 말없이 신을 섬긴 사람이었을까. 이곳에 머물수록, 이 무덤이 그저 죽은 자를 위한 공간이 아니라, 그가 살아온 방식이 담긴 장소라는 느낌이 들기 시작했다.
가장 먼저 마주친 건, 작은 배 위에 앉은 사람과 제물을 든 이들의 모습이었다. 배는 정지해 있는 듯 보였지만, 그 주위에 흐르는 선들—곡선과 물결, 손끝의 방향과 시선의 흐름—그 모든 것이 이 배가 분명히 어디론가 향하고 있다는 인상을 남겼다. 고요한 장면이지만, 정적인 느낌은 아니었다. 오히려 무언가 막 시작되려는 순간처럼 느껴졌다.
“누구를 기다리고 있나요?”
나도 모르게 속으로 물었다. 그러자 벽화 속 사공 하나가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는 것 같았다. ‘떠나는 이를 위한 배입니다.’ 그렇게 대답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 말은 바람결처럼 내 안에 들어와 머물렀다. 배 위에는 많은 것들이 실려 있었다. 살이 통통하게 오른 오리 한 마리. 색이 깊은 포도주 항아리. 조심스럽게 놓인 빵들과 향로. 그리고 꺾인 듯 정리된 꽃다발.
그것은 어떤 부의 상징처럼 보이기도 했지만, 곧 그것을 넘어서 다른 의미로 다가왔다. 단지 생전의 소유물을 옮겨가는 장면은 아닐지도 모르겠다. 오히려, 그가 한 사람으로 살아가며 마음을 담았던 것들—누군가에게 나눴던 친절, 되돌아온 존경, 매일의 기도, 곁을 지켰던 사람들과의 기억들—그 모든 것을 함께 실어 보내는 장면처럼 보였다.
그가 아꼈던 것이 물건이 아니라면, 그 배는 물건의 배가 아니라 마음의 배일지도 모른다. 오리 한 마리에는 그의 식탁에서 나눈 평화가 담겼을 수도 있고, 포도주 항아리 하나에는 친구와 나눈 기쁨이 담겨 있었을 수도 있다.
꽃다발은 그가 아마도 매일처럼 신에게 바쳤던 경외의 형상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향, 그 향은—그의 마지막 기도였을까?
이 배는 그런 것들을 하나하나, 조용히 싣고 떠나려 하고 있었다. 어딘가로 가야 한다는 조급함도 없이, 떠나야 한다는 슬픔도 없이. 그저 자연스럽게, 강이 흐르듯. 나는 그 앞에 잠시 서 있었고, 이 장면 전체가 장례식이라기보다 삶의 정리처럼 느껴졌다.
그의 죽음이 아니라,
그가 사랑했던 것들을 잘 정돈해 하나씩 실어 보내는,
그런 준비의 순간.
조금 더 안쪽으로 들어가자, 나일강을 따라 흘러가는 듯한 또 다른 장면이 내 눈앞에 펼쳐졌다. 흐릿한 빛과 마주한 벽에는, 물 위를 조용히 가로지르는 작은 배 하나가 그려져 있었다. 색이 바래 있었지만, 오히려 그 흐릿함 덕분에 더 신비로워 보였다. 오래된 기억을 떠올릴 때처럼, 정확한 모양보다 ‘느낌’이 먼저 전해졌다.
정지된 그림인데도, 나는 분명히 그 배가 천천히 움직이고 있다고 느꼈다. 어디론가 흐르는 듯한 방향감, 물결의 부드러운 곡선, 그리고 배 위 사람들의 절제된 몸짓이 그렇게 보이게 했다. 그것은 마치, ‘떠나는 법을 아는 사람’의 마지막 여정 같았다.
‘콘수는 이런 식으로 세상을 떠나고 싶었을까?’
소란스럽거나 눈물로 얼룩진 작별이 아니라, 강이 알아서 데려다주는 이별. 누군가의 통곡이 아닌, 강물의 기도로 떠나는 사람. 나는 무심코 그런 상상을 하게 되었다.
그리고 벽의 다른 쪽에는, 향을 바치고 음식을 정돈하는 인물들이 조용히 서 있었다. 그들의 손끝은 신기할 만큼 섬세했고, 움직임은 마치 예전부터 약속된 춤처럼 정확했다. 누가 지시한 것도 아닌데, 서로 눈을 마주치지 않아도 하나의 리듬으로 이어졌다.
그 속에서 콘수의 모습은 직접 드러나지 않았다. 하지만 나는 분명히 그 장면 너머, 제단 앞에 조용히 선 한 사람을 느낄 수 있었다. 말없이 손을 모으고, 고개를 숙인 채 향을 피우는 사람.
힘으로 기억되기보다, 기도로 남길 바랐던 이.
그의 삶이 이 장면 속에 스며든 듯했다.
더 안쪽으로 들어가자, 벽에 하나의 장면이 펼쳐졌다. 이곳에는 더 이상 배는 없었다. 대신, 하나의 의식이 중심이 되고 있었다. 누군가의 무릎은 꿇려 있고, 누군가는 양손에 천을 들고 움직이고 있었다. 중앙에는 하늘색과 녹색이 섞인 형상이 앉아 있었고, 그 앞에 조심스레 제물을 바치는 듯한 이들이 줄지어 서 있었다.
아마도 신 앞에 서 있는 순간일까. 죽은 자의 심장을 저울에 올리고, 그 삶의 무게를 재는 장면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장면 속엔 거창한 감정이 없다. 슬픔도, 기쁨도, 당혹도 느껴지지 않았다. 대신 오랜 기다림처럼, 마치 ‘이제 이 순서가 왔다’는 듯한 침묵의 흐름이 벽을 감싸고 있었다.
그 오른편에 선 붉은 피부의 인물은 손을 번쩍 들어 올리고 있었다.
그 동작은 경외 같기도 하고, 무엇인가를 증언하는 손짓 같기도 했다. 그 앞의 사람은 손을 교차해 가슴 위에 얹은 채, 눈을 감은 듯 보였다. 이 장면을 보고 있으니, 문득 콘수의 마지막 길이 ‘선언’이 아니라 ‘기도’였다는 느낌이 들었다. 누군가를 납득시키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저 자신을 드러내고 내려놓기 위해 준비한 순간처럼.
모든 움직임은 느리고 정중했다.
각 인물은 자신의 동작을 알고 있는 듯했고, 벽화 전체가 하나의 연극처럼, 혹은 오래된 예식처럼 흘러갔다.
말 없는 고백, 몸짓으로 이어지는 예배.
콘수의 무덤 속 이 장면은, 생의 마지막도 조율된 리듬 속에 있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듯했다.
그 순간, 그 모든 풍경을 감싸는 듯한 또 하나의 벽화가 떠올랐다. 애통하는 여인들의 얼굴. 머리를 풀어헤치고,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 쥔 그들의 모습. 고통스러운 이별의 순간이지만, 그 속에 단순한 슬픔 이상의 것이 담겨 있는 듯했다.
그리움, 존경, 그리고 놓아주는 용기.
“좋은 분이었어요. 신께 드리는 사람 같았어요.”
“그가 사라진 자리는, 우리 마음속 의식 하나로 남을 거예요.”
벽화 속에서, 그들의 침묵이 그렇게 말하는 듯했다. 나는 한참 동안 그 장면 앞에서 움직이지 못했다. 베니아가 세상을 질서로 다스렸다면, 콘수는 그 질서에 ‘의미’를 더한 사람 같았다.
고요하게, 아무 말 없이, 그러나 깊이 남는 사람. 그의 무덤은 성대한 찬양 대신, 하나의 기도처럼 조용했다. 무덤을 나서려던 순간, 어느 벽 한 구석에서 한 문장이 나에게 속삭이는 듯했다.
“당신은 어떤 방식으로 기억되고 싶은가?”
나는 그 물음 앞에서 발걸음을 멈췄다.
그리고 한참을 고요히, 그 앞에 서 있었다.
무덤 밖으로 나와 잠시 햇빛 아래 섰다. 한 줄기 바람이 지나가고, 뺨에 닿은 먼지 사이로 두 무덤의 기억이 어른거린다.
베니아와 콘수.
같은 땅에 묻혔지만, 그들의 삶은 전혀 다른 방향을 향해 흘렀다. 베니아는 제국의 행정과 질서를 책임진 사람이었다. 수많은 사람과 물자의 흐름을 조율하며, 한 나라를 구조로 세운 인물. 그의 무덤은 웅장하고, 벽화는 정돈되어 있으며, 음표 하나까지도 마치 그의 명령처럼 정확했다.
반면 콘수는 신의 곁에서 향을 피우던 자였다. 그는 손끝의 기도로 신에게 다가갔고, 고요한 배 위에 영혼을 실어 저편의 세계를 바라보았다. 그의 무덤은 덜 화려했지만, 더 깊었다. 조용했고, 그러나 멀리까지 울렸다. 나는 이 두 사람 사이 어딘가에 서 있었다. 어떤 삶이 더 고귀한가를 묻고 싶지는 않았다.
그보다는, 두 사람이 얼마나 ‘정확히 자신의 자리를 알고’ 살아냈는가를 묵상하게 되었다. 베니아는 움직임의 중심에 있었고, 콘수는 침묵의 중심에 있었다. 그러나 두 사람 모두 자신에게 주어진 하루하루를 낭비하지 않았다.
그 하루들이 쌓여, 지금 나의 발 앞에 무덤으로 남아 있었다. 나는 오늘, 아침부터 저녁까지 어떤 자리에 서 있었던가.
누구를 위해, 무엇을 향해, 어떤 마음으로.
삶이 언젠가 그림이 되고, 무덤이 될 때,
그 위에 남는 건 권력도, 업적도 아닐 것이다.
남는 것은 정성과, 고요함과, 기억의 색채.
그리고 누군가가 조용히 속삭이는 한 문장.
“이 사람의 삶은, 참으로 곱게 정리되어 있었다.”
사진: 나그네 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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