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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꿍꿍이 많은 직장인 Jan 05. 2020

05 고백_포맨 (사랑 / 고백)

시간이 흐른 뒤엔 날 바라보면서 웃을 거야

2010년 8월 9일


그녀와는 학교 동아리에서 만났다.


나는 다른 학교를 다니다가 군대/재수 후 입학을 해서 동기들과는 4살 차이가 났다. 그녀는 동아리에서 말이 없기로 유명했고, 쉽게 친해지기 어려웠다. 항상 배시시 웃으면서 좋으면 위/아래로, 싫으면 왼쪽/오른쪽으로 고개를 흔드는 것이 의사표현의 전부였다. 그 수줍은 미소가 참 순수하게 느껴졌다.


대학교 첫 여름방학, 그녀와 친한 친구, 나와 남자 동기 한 명은 초복, 중복, 말복에 함께 만나서 놀기로 했다. 8월 9일은 그 해 말복이었는데, 뭔가... 운수가 무척 좋은 날이었다. 


아침 일찍 전액 장학금을 확인했고, 그녀의 친구가 개인적인 일로 오늘 나오기 힘들다는 연락이 왔다. 여러 가지로 내가 바라는 게 이루어지는 날이었는데, 신의 계시 같은 그런 느낌이 들었다. 바로 동기에게 연락해서 오늘 밤 적절한 타이밍에 자리를 좀 비켜달라고 부탁을 했다.  


식사 후 영화 한 편을 보고, 동기는 계획대로 자리를 비켜주었다.

나는 그녀를 지하철 역까지 배웅해주었고, 가는 길에 벤치에 잠깐 앉아 있다가 가자고 했다.

그리고 준비한 그 말을 꺼냈다.


"저기... 음... 그러니깐... 음............... 나랑... 사귀어 주면 안 될까?"


"예?....."


그녀는 당황해하며 오랫동안 고민에 빠졌다. 아니, 사실 오랫동안이라는 표현은 순전히 내가 느낀 시간이다. 그녀가 '어.....', '음.....' 하며 고민하던 시간이 길어야 몇 분이 넘었겠냐 마는, 성격 급한 내겐 30분은 지난 것 같았다. 그녀는 안절부절못하며 입술을 잘근거리고 있었다. 


 나는 젠틀 한 척, 괜찮은 척, 쿨한 척, 다시 말을 건넸다.


"괜찮아, 싫으면 싫다고 해도 돼. 천천히 생각해 보고 답해주세요~"

"아, 그리고 혹시 차더라도 동아리에서 모르는 척하기 없기다~?"


"... 예... "


천천히 답해달라고 하곤 또 시간은 흘러갔다. 

보통 시간이 길어져서 결론이 좋은 경우는 별로 없었다.

망했다 싶었다.....


'사귀어 주면 안 돼? 라니... 구걸하는 것도 아니고, 나랑 사귈래? 가 더 나았으려나?

'아... 영화로 아저씨를 보는 게 아니었는데... 방금까지 원빈 보고 있었는데... 원빈... '

'차이면 동아리 그만둬야 하나...'


그녀는 이런 내 맘을 아는지 모르는지, 시선을 피하면서 어색한 미소만을 띤 채 주변을 두리번거리고 있었다. 내게 마치 어떻게 좋게 거절할까를 고민하는 것처럼 보였다. 지금이라도 없던 일로 할까 어떡할까 고민하던 찰나에 그녀가 대답을 했다.


"그래요..."


"응?... "

"그러니까... 지금 오케이 한 거 맞지?"


"예"


2010년 8월 9일. 

내가 그녀에게 처음 고백한 날이다. 


그렇게 나는 그녀와의 D+1일을 맞게 되었다.

사실은 고민했었어 네가 떠날까 봐 내 맘은 불안했었어

내 나름대로 나 많이 생각했어 네가 날 외면할까 봐

내게 부담 가질까 봐 난 두려웠었나 봐 ~      

Don't Say Goodbye ~

<노래 : 포맨 '고백' 중>


핑크빛 하늘을 선물해준 그녀


그녀를 지하철까지 배웅해 준 후, 나는 솔로 탈출을 위해 함께 고군분투하던 친구에게 바로 연락을 했다.

이제는 변절자가 되어버린 나의 상황을 설명해 주었고, 축하주를 들기 위해 친구 집으로 뛰어 가는 길이었다. 너무 기쁜 마음에 잠시 멈춰 하늘을 보았다.


무더운 말복 여름밤이었을 텐데...

그날 밤은 바람도 시원했고, 하늘이 핑크빛으로 보였다. 

핑크빛 하늘 얘기를 하면 사람들은 대부분 '그래, 어련하시겠어' 라며 웃곤 한다.

하지만 그날 하늘은 내 눈엔 분명 핑크빛이었다. (정말!!)


정식으로 만난 첫 데이트 날,

코인 노래방 안에서 그녀 앞에서 처음 부른 노래가 바로 포맨의 '고백'이다.


내게 핑크빛 하늘을 선물해준 그녀,

나는 진심으로 평생 그녀를 행복하게 해주고 싶었다.


난 네게 부족하지만 참 많이 부족하지만

세상을 다 뒤져도 나 같은 남자 없다는 걸 아니

조금은 어색하지만 많이 부족하겠지만

시간이 흐른 뒤엔 날 바라보면서 웃을 거야

 - 포맨 '고백' 중 -

 

<에필로그>


'아니, 천천히 생각해 보라고 했으면 집에 보내 줬어야 됐는 거 아니가 ㅎㅎ.'


그녀에게 그날을 되뇌며 얘기를 꺼내자 내게 했던 말이다. 

너무 맞는 말이라... 뭐라고 반박을 못했다.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아마 절대 보내주면 안 된다는 직감이 들었나 보다.

아마도 생각이 길어져서 결론이 좋았던 경우가 없었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알고 있었던 것 같다.


열심히 차였던 과거가 빛을 발하는 순간이었다.

기특한 것.


사진작가 : 정민호 (인스타그램 : https://www.instagram.com/mejmh0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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