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색 언론
다섯살 여름 즈음에 외가가 있는 동네는 떠들썩했다.
마을 뒷자락에 자리 잡은 마을에서는 딱히 큰일이라고 하면 동네 어른이 돌아가시거나 농사가 안되는 일뿐이었다. 그 작은 동네에 벌어진 사건의 심각성은 암울하고 꽤 컸다. 지금은 계절의 구분이 다소 모호해졌지만, 그때는 사계절이 뚜렷했다. 4월에 접어들기 전의 시골 동네는 봄기운이 움트고 있었고 바람은 아직 쌀쌀함을 머금고 있었다. 유치원을 다니기 시작할 때여서 주말 즈음에 어머니 손을 잡고 외가로 갔는데 항상 마중을 나오던 외할아버지는 근심 어린 표정을 하고 우리를 맞이했다.
"영숙아, 종식이 저거 아부지, 니랑 성서국민학교 나왔제?"
"네, 맞심더. 와카는데예?"
"얼라가 없어졌다. 종식이 가 애비랑 애미 다들 난리 났다."
걱정스러운 대화가 부녀 사이에 오갔고 멋모르던 나는 냇가에 개구리 잡겠다고 나서려다 된통 혼났다. 지금 동네가 난리인데 밖에 나가지 말라는 엄포를 놓고서 외할아버지와 어머니는 마을 회관으로 향했다. 어둑어둑 밤이 되어서야 돌아온 어른들의 표정엔 근심이 가득했다. 그도 그럴 것이 나보다 나이다 고작 너덧 살 정도밖에 차이 안 나는 동네 아이들이 사라졌으니 말이다. 며칠 지나지 않아 전국이 떠들썩해졌고 각종 매체에서 대대적으로 이 사건을 보도했다. "개구리 소년 사건" 심리학자라는 대학교수가 범인이 다섯 아이들 중 한명의 아버지라며 추궁을 하다가 된서리를 맞았고, 본인이 용한 무당이라며 애들이 화장실 아래에 묻혔다고 말을 해서 화장실을 파냈지만, 아무것도 나오지 않자 착각했다며 도망간 사람도 있었다. 외가가 있는 그 동네에는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단속이 되었고 사람들은 점점 말라갔다. 바야흐로 봄이었건만 외가 동네는 겨울에 머물러버린 것이다.
몇 년이 지나고 외할아버지가 돌아가신 그때, 조문객들이 찾아온 밤이었다. 두루 친하게 지내던 외할아버지라 조문객들도 많이 있었고 오래 머무르기도 했다. 조문객들 중에 어머니의 친구인 종식이 아버지도 있었다. 아들 또래의 아이들을 멍하니 바라보는 종식이 아버지의 눈빛에 물기가 어렸던 것 같다. 맛있는 것 사 먹으라며 돈을 단단히 쥐여주던 종식이 아버지의 투박한 손의 체감이 한참 동안 내 손에 남았었다. '개구리 소년 사건'이라는 큰 덩어리가 잊혀갈 즈음, 그때는 월드컵이 끝난 뒤였다. 다섯 아이의 유해가 발견되었다는 뉴스였다. 미제로 남을 뻔한 사건이 해결되는구나 했다. 아니었다. 황색 언론들은 이런 저런 가쉽거리만 내세울 뿐이었고, 참 밉게도 유족들의 현재를 취재하기도 했다. 자식을 가슴에 묻은 이들인데. 그들에게는 그저 이야깃거리의 한 꼭지였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