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백수 남편의 일기 (3)
눈을 뜨자 오전이 끝나가고 있었다. 침대 위로 쏟아지는 햇살이 집요하게 두 눈을 찌른다. 햇빛에 뒤척이게 될 줄 알았더라면 암막 커튼을 달아두었을 텐데. 늘 새벽 5시면 일어나 출근 준비를 했기에, 암막커튼이 없을 때의 불편함은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퇴직은 순조로웠다. 제법 많은 사람들과 덕담 섞인 점심을 나누었고, 그보다 조금 적은 수의 저녁을 알코올에 젖어 보내자 한 달이 훌쩍 흘러가버렸다. 달력은 어느새 2월로 넘어갔고, 나는 백수가 되었다.
퇴사하던 날, 오후가 되기 전에 사무실을 나섰다. 떠나는 자를 위한 작은 배려 이리라. 퇴직 회람서에 사인을 하고 집에 돌아오자마자 이불속에 몸을 묻었다. 그 후 일주일은 내리 잠을 잤다. 연속된 술자리로 지친 간을 달래주며, 마치 어미의 주머니 속 새끼 캥거루 마냥 푸근한 잠에 빠졌다. 회사와의 아름다운 이별. 제법 예쁘게 장식된 그 모습이 제법 만족스러웠기 때문이리라.
핸드폰에는 아내의 메시지가 쌓여있다.
오전 7시 : 회사에 도착했어요.
오전 9시 30분 : 오늘 일에 문제가 조금 생겼어요. 퇴근이 좀 늦어질 것 같아요.
오전 11시 : 아직 자나요? 냉장고에 찌개 있어요. 꺼내서 데우기만 하면 돼요. 밥 거르지 말고 꼭 챙겨 먹어요. 사랑해요, 애기.
마지막 한 문장이 뇌리에 맴돈다.
“사랑해요, 애기.”
잘 떠지지 않는 눈을 비비며 물을 꺼내다, 냉장고 구석에 자리한 뚝배기가 눈에 띈다. 두부와 버섯이 가득 든 된장찌개. 가스레인지로 자리를 옮겨 따따딱, 불을 붙인다.
창 밖의 세상은 평화롭다. 오전을 갓 넘긴 창 너머로 서서히 녹아가는 얼음빛 하늘. 고고히 흐르는 구름을 멍하니 보고 있자니, 보글보글 된장 끓는 냄새가 거실을 채워간다.
아침인지 점심인지 모를 식사를 마치자 오후가 되었다. 지금쯤이면 아내도 점심시간일 텐데.
“점심 먹었나요? 난 방금 일어나서 밥 먹었어요. 오늘 퇴근 많이 늦나요?”
지워지지 않는 카톡의 숫자 1. 핸드폰을 내려놓고 다시 창가로 걸음을 옮긴다.
눈에 들어오는 모든 것이 평소와 달리 한 템포 느리게 다가온다. 멀리 보이는 아파트 단지. 발 밑에 깔린 낮은 지붕의 공장과 빌라. 언덕길을 따라 드문드문 오가는 1톤 트럭의 힘겨운 엔진 소리. 뒷산 능선을 사뿐사뿐 내려오는 들고양이의 낙엽 밟는 소리와 놀란 까치의 날갯짓 소리. 아스팔트의 주름 하나까지 생생하게 깨어있는 기분. 매일 보던 풍경에서 이렇게 세상을 느낄 수 있었던 것을, 나는 왜 지금까지 알지 못했던 것일까.
음악이 듣고 싶어 진다. 커피를 내려 소설책 한 권과 함께 식탁에 기대어 앉는다. 거실을 가득 채운 달달한 재즈 멜로디가 커피 향을 타고 가슴을 적신다. 먼지만 가득 쌓여가던, 큰 맘먹고 질렀던 블루투스 스피커의 감동적인 음향. 이 시간에, 이 곳에서, 이렇게 시간을 보낼 수 있다니. 휴식이라는 단어가 이보다 더 잘 어울릴 수 있을까.
느린 감각과는 다르게 시간은 빠르게 흐른다. 책장을 넘기던 손을 멈추고 고개를 들자, 금빛 황혼에 거실이 물들어간다. 해가 짧다,라고 혼잣말을 중얼거린다.
빛이 사그라들고 어둠이 깔리면 아내가 돌아올 것이다. 그러면 어김없이 김이 오르는 밥공기를 놓고 마주 앉아, 소소한 이야기를 반찬처럼 꺼내어 놓을 것이다. 그리고 아내가 묻는다. 나의 하루는 어떠했냐고.
아내가 묻는다. 나의 하루는 어떠했냐고.
잘 쉬었어요, 라는 대답에 웃으며 고개를 끄덕일 아내. 이 평화를 당신과 함께 느낄 수 있다면 참 좋을 텐데. 다시 한번 핸드폰을 꺼내 든다. 여전히 사라지지 않은 카톡의 숫자 1.
아주 잠깐 마음에 평화. 한동안 계속될 육신의 평온. 아내를 기다리는 동안, 집을 둘러싼 산속의 밤은 어둡고 깊어져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