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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Kyle Lee Oct 22. 2019

혼잣말이 늘다

어느 백수 남편의 일기 (7)

혼잣말이 늘었다. 재잘거림은 아내의 전매특허였는데.

 

“여자는 적어도 하루에 이만 오천 단어는 이야기를 해야 정신건강에 좋대요. 고작 하루에 만 단어 정도로 지쳐 떨어지는 남자랑은 달라요.”

 

찻잔에서 티백을 건져내며 아내가 말했다.

 

“그러니까 구시렁댈 생각 말고 얌전히 들어요.”

 

응, 알았어요, 그래야지요,라고 말하며 읽던 책을 덮고 아내를 향해 자세를 고쳐 앉는다. 그러면 아내는 차가 식는 줄도 모르고 이야기를 쏟아내곤 했다.

 

전원이 들어온 아내는
결코 방전되는 법이 없다.


가끔 농담 삼아 아내에게 "스피커 같다”라고 말하곤 한다. 음량도 음질도 결코 떨어지는 법이 없이, 늘 일정한 품질로 다양한 소리가 흘러나온다. 회사 이야기를 할 때면 아침 드라마가 나오는 TV 스피커가 되고, 철없는 동생 이야기를 할 때면 구성진 MC가 진행하는 라디오 스피커가 된다. 어젯밤 꿈 이야기를 할 때는 블록버스터급 영화의 돌비 6.1 서라운드 시스템 못지않다. 아무리 야근에 절어도, 배가 고파도, 잠이 부족해도, 일단 입을 열면 그걸로 스피커에 전원이 들어온다. 전원이 들어온 아내는 결코 방전되는 법이 없다. 

 

문제는 아내의 스피커 전원이 언제 들어올지 결코 예측할 수 없다는 것이다. 밥을 먹다가, 잠자리에 누워 전등을 끄다가, 영화에 몰입되어 있을 때, 책을 읽거나 운동을 하고 있을 때, 심지어는 다른 방에 있을 때에도 아내의 전원은 반짝, 빛을 발하며 들어오곤 했다. 

 

그리고 안타깝게도 리모컨은 늘 아내가 쥐고 있다. 내게 음소거 버튼이나 전원 버튼을 누를 권리 따위는 없는 것이다. 그나마 다행히도 아내는 내게 볼륨 버튼을 눌러 달라고 ‘부탁’할 수 있는 특권을 주었다. 이 얼마나 관대하고 감사한 일인가.

 

직접 세어보지는 못했지만, 이만 오천 단어로 표현하기에는 아내의 하루하루가 너무도 특별했다. 매일매일 벌어지는 아내의 일상은 식스센스보다 더 충격적인 반전과 반지의 제왕보다 거대한 서사가 있었다. 이 이야기를 남편에게 하지 않는다는 것은 추운 겨울 마주친 뜨끈한 어묵 국물을 외면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아내가 사용하는 단어 수가 늘어나는 만큼, 내가 사용하는 단어 수는 줄어들었다. 원래 말수가 많은 편은 아니었기에 아내가 말수를 늘리는 만큼 나의 말수를 줄이면 되었다. 그게 우리 부부에게 딱 적당한 방법이었다. 아내는 이야기를 하며 행복했고, 나는 그런 아내를 보며 만족했다. 하지만 혼자 머무는 시간이 늘어나면서, 나의 언어생활 패턴에 변화가 생기기 시작했다. 

 

시작될 수 없는 나의 대화는
철저히 아내에게 의존했다.


하루의 대부분을 침묵 속에서 보내는 일상이 계속되었다. 특별할 것 없는 일상이 반복되었고, “오늘 하루는 어땠나요?”라는 아내의 물음에 “그냥 잘 보냈어요.”라는 대답이 문제지의 정답처럼 자리 잡았다. 그리고 이어지는 나의 물음, “당신은 어땠나요?”

 

시작될 수 없는 나의 대화는 철저히 아내에게 의존했다. 나의 대화는 대부분 “응”, “그랬어?”와 같은 리액션과 “아, 그래서?”, “그랬더니?”와 같은 질문에 머물렀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계절이 바뀌었다. 저녁도 먹지 못하고 출장지에서 돌아오는 아내를 위해 볶음밥을 만들던 어느 날, 프라이팬 속 통통하게 살이 오른 새우를 보며 혼잣말을 하고 있는 나를 발견한다.

 

“꽁꽁 얼었던걸 녹이느라 시간이 좀 걸리네. 이제 후추도 좀 뿌려줄 거야. 너무 많이 넣으면 맵다고 싫어하니까 조금만 넣을게. 아, 마늘 갈아놓은 것도 있는데 조금만 넣을까? 비린내 잡기에 딱 좋을 것 같은데.”

 

과묵하고 듬직한 남자가 멋지다고 생각했다. 평소에는 입을 열지 않지만, 한 번 입을 열면 좌중을 압도하는 그런 포스를 가진 그런 남자. 그랬던 그 남자가 지금은 철없이 촐랑대며 영양가 없는 혼잣말을 늘어놓고 있다.

 

10시가 넘어 돌아온 아내가 밥을 먹는 동안, 나는 다시 입을 닫고 그녀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접시를 하나 둘 비워가면서, 아내의 말 사이사이에 공백이 길어지기 시작한다. 달그락 거리는 접시 소리가 울리는, 그 사이를 붙잡고 말문을 연다.

 

“오늘 서재 창문 너머로 고양이가 보였어요.”

 

아내의 눈에 반사된 전등 빛이 반짝, 빛난다.

 

“새끼 고양이를 몇 마리 달고 다니는 엄마 고양이인데, 사람 그림자만 봐도 풀숲 너머로 사라져요. 불쌍할 정도로 말라 보여서 뭐라도 먹일까 했었는데, 너무 빨리 도망가버리는 바람에 헛걸음만 했어요.”

아내는 숟가락을 내려놓고 핸드폰을 꺼내어 메모장 쇼핑리스트를 연다. 또각또각 부지런히 움직이는 손가락.

 

“내일 돌아오는 길에 마트에 들러야 했는데, 간 김에 고양이 간식도 조금 사 올게요. 고양이는 사람 먹는 음식을 먹으면 수명이 줄어든대요. 염분이 없는 고양이 사료나 간식을 먹여야 해요.”

 

설거지를 마치고 침대에 누워 전등불을 끈다. 산속의 정적이 방 안으로 스며들면서, 차분히 가라앉은 달빛이 새로 단 블라인드를 은은하게 물들인다.

 

오늘 하루도 수고했어요.


“오빠.”

 

“응.”

 

“오늘 하루도 수고했어요.”

 

팔 안쪽으로 파고들며 아내가 말한다. 방금 감은 머리에서 샴푸 향기와 드라이어기의 뜨거운 온기가 잔잔하게 느껴진다.

 

“당신도, 고생했어요.”

 

“잘 자요.”

 

당신도, 라는 말이 목에 걸려 나오지 않는다. 아내의 온기가 팔에서 가슴으로 점점 짙어져 온다. 

 

눈을 감자, 한낮의 고양이 가족이 뒷산 능선을 뛰어올라 이내 사라져 버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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