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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강 작가의 독일삶
Oct 05. 2021
생의 마지막은 모두가 공평해진다.
풍요도, 명예도 아름다움도 노년의 주름 앞에 무릎을 꿇는다. 왕년에 아름다움의 대명사였던 여배우도 늙고 병들면 과거의 흔적은 온 데 간 데 없다. 부와 명예를 쥐고 흔들었던 권력자도 초라한 휠체어와 의료용 배변 용기 속에 수치심은 내던진 지 오래다.
인생은 하나의 동그란 지구 같다. 지구의 원을 그리면 시작점에서 다시 마지막이 맞닿은 것처럼 인생도 마찬가지다. 막 태어난 신생아는 기저귀를 차고, 걷지 못한 채 부모의 품 속에서 노닌다. 노년이 되면 다시 신생아처럼 노인용 기저귀를 차고, 휠체어나 보조용 기구에 의지한다. 결국 인생은 돌고 돌아 원점에 귀착한다.
하지만 사람들은 가끔 잊어버린다. 자신의 젊음이나 건강이 계속될 것 같은 착각 속에 빠진다. 설사 알고 있다 할지라도 자신에게만은 더디 올 것이라 생각한다.
양로원에서는 인생의 마지막이 어떤지 알게 된다. 죽는다는 것의 가벼움과 산다는 것의 무거움을 순간순간 경험한다. 또한 젊은 시절, 아무리 좋은 직업을 가졌다 할지라도 노년의 모습은 별반 다르지 않다. 신분의 평등이 온다고 할까?
물론 약간의 개인차는 있을 수 있다. 약간 귀티가 있고, 방에 놓인 엔티크한 옷장이 말해준다. 하지만 그건 조금이나마 자신의 몸을 추스릴 수 있을 때야 자랑할 만하다. 대부분 병상에 누운 노인에게서 젊은 시절의 모습은 찾아보기 힘들다. 비싼 옷들은 이미 구제물품 속에 던져지고, 침대에서 눕기 편한 단벌 옷에서 안식을 찾는다. 노인돌봄사가 다루기 쉬운 티셔츠나 늘어진 고무줄 옷이 가장 좋은 옷이다.
독일 양로원의 시설 등은 대부분 비슷한 양상이다. 물론 럭셔리 양로원도 존재한다. 가격이 비싼 양로원에는 우체국, 은행 등 모든 기반시설이 구비되어 있다. 독일에서 매달 만 유로(한화 약 1300만원) 이상을 지불해야 거주가능한 곳을 본 적이 있다. 하지만 대부분 어느 정도 거동이 가능한 이들이 산다. 자신이 가진 돈을 누리고 오롯이 느끼려면 어느 정도 지탱 가능한 육신이 있을 때에야 가능하다. 그래서 대부분 욕심 없이 일반적인 양로원에 거주하는데 그것 또한 저렴하진 않다. 기본적으로 3000유로(한화 450만원 정도) 정도는 지불해야 한다. 그래서 양로원 비용이 독일에 비해 훨씬 저렴한 동유럽 국가로 이주를 하는 노인들도 많다. 자신의 재산과 연금을 정리해서 쏟아부어야 한다. 매달 거주비용은 자신의 돈으로 충당하기도 하고 자식이 있으면 모자란 부분을 부담해야 한다. 그도 저도 아니면 시에서 사회부조로 지불 가능하다. 하지만 이런 경우는 원하는 중심지 양로원이 아닌 외곽으로 배치될 확률이 높다.
독일 양로원에는 방문자들도 드물다. 자녀가 있는 경우에도 자주 찾아오는 경우는 글쎄다. 독일의 가장 큰 명절인 크리스마스에는 홀로 있는 노년에겐 가장 슬픈 시간이다. 옆방의 아무개에겐 찾아오는 이가 있다면 상실감은 더 커진다. 그래서 양로원에서는 특별히 과자를 굽는 등 평소와 다른 프로그램을 만들곤 한다. 그나마도 찾아오는 이가 있다는 것은 행복한 노년이다.
언젠가 근무 중간 휴식시간이었다. 복도에서 동료들의 수다를 한참 듣고 있었다. 갑자기 내 앞에 앉아 있던 남자 동료가 일어서서 인사를 하는 것이다. 뒤를 돌아보니 초로의 중후한 남자가 서 있었다.
“안녕하세요. 다들 즐거운 모양입니다. 허허”
나는 처음에 그가 누구인지 몰라서 머뭇거리고 있었다.
노신사가 날 쳐다보더니 물었다.
“처음 보는 분인데 어느 나라에서 왔지요?”
“네, 저는 한국에서 왔어요.”
“그렇군요. 반갑습니다.”
그는 빙그레 웃으면서 나에게 악수를 청했다.
말투가 친절하고 삶의 오랜 관습에서 배어나온 우아함이 있었다. 겨우 헐렁한 티셔츠와 조끼를 걸쳤는데도 뭔지 모를 중후함이 느껴졌다. 나중에 동료에게 물어보니 그는 베를린 시장을 오랜 동안 역임한 딥겐 (Diepgen) 씨라는 것이다.
그는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기 전 5년, 그리고 통일 후 1991년부터 약 10년을 시장으로 지냈다. 장벽으로 닫혀있던 베를린의 통합과 재건을 위해 나름대로 성과를 많이 낸 시장이라는 정평이 있었다. 풍채에서 풍겨나는 카리스마가 느껴졌다.
그는 우리 양로원에 친척이 있어서 보러 왔다고 했다. 딥겐 시장의 친척은 그러고보니 성이 같았다. 그 전에 전혀 눈치채지 못했는데 아마도 형이나 사촌형쯤이 아닐까?
우리 양로원에 살고 있는 시장의 친척은 상당히 인텔리한 분이었다. 몸이 불편한 건 아니었지만 자신의 아내가 양로원에 있었기 때문에 다른 방을 빌려서 함께 들어온 것 같았다. 아내는 더 중증이었기 때문에 돌봄사의 도움이 더 필요해 독방을 쓰고 있었고, 이분도 독방에 살기는 마찬가지였다. 늘 혼자 담배를 피우고 있었고, 책을 끼고 사는 등 누가 봐도 지식인의 모습이었다. 가끔 도움이 필요한지를 묻기 위해 문을 두드리면 도움이 필요 없다,고 정중히 말하곤 했다. 종아리에 꽉 끼는 혈전 처방 의료용 스타킹을 입고 있었기 때문에 벗을 때 힘을 요구했다. 잠 자기 전 그때서야 알람을 울리며 스타킹을 벗겨달라는 것이 유일한 요구였다.
그는 홀로 있는 노년을 즐기는 것 같았다. 방 밖으로 나온 것을 본 적이 없다. 그의 방을 열고 들어가면 마치 오래된 유럽영화 속 배우처럼 담배를 피우고 연기 자욱한 방에서 신문을 읽는 것을 보곤 한다. 문득 자신만의 성에서 홀로 사는 늙은 황제 같다. 방을 들어가는 것 조차 가끔 송구스럽다. 방안은 마치 흑백필름을 보는 것 같다. 아마도 회색가운을 입었기 때문이리라. 주로 회색이나 카키색의 목욕가운을 걸치곤 했는데 그 모습은 어떨 땐 중세의 신부처럼 보였다.
양로원의 각 방들을 방문할 때마다 그들만의 독특한 세계와 분위기를 느낄 수 있다. 독일 양로원은 대부분 독방을 쓰기 때문에 자신이 쓰던 몇 가지 물건이나 사진들을 비치해놓곤 한다. 어떤 어르신은 자신이 기르던 앵무새를 데리고 있었다. 그 할머니는 마치 오즈의 마법사의 도로시 같았다. 이상한 소리로 앵무새와 대화를 하곤 했다. 그 앵무새는 이야기를 하고 있다가도 사람처럼 깔깔깔 소리내어 웃었다. 그들만의 대화법인 듯 했다. 그러다가도 낯선 사람이 다가가면 입을 꾹 닫아버린다. 나는 가끔 짓궂게 침대 밑으로 숨어서 앵무새에게 안보이게 하고 숨죽이고 있으면, 앵무새는 내가 갔는 줄 알고 다시 떠들어댄다. 그럴 때면 앵무새도 사람을 의식하고 있구나 생각이 들었다.
젊은 시절에 찍었던 자신의 사진이나 부모님의 오래된 부부사진은 단골 메뉴다. 20세기 초반에 찍었을 빛바랜 흑백사진들은 인걸이 사라진 시간에서 오롯이 남아서 존재감을 드러낸다. 그런 사진들을 마주할 때마다 그들의 세계 속으로 나도 모르게 빠져드는 것 같다. 그들이 걸어왔던 시간들을 나 또한 걸어가며 한껏 공감의 창을 열어놓는 것이다.
하지만 그들이 걸어왔던 유년과 현재의 모습은 아무리 연상하고 오버랩시켜도 연결고리가 불가능하다. 너무 멀리 달려왔던 것일까? 그저 그 시간대로의 의미만 있을 뿐이다.
시간은 재빨리 달려나가 육신의 기운을 빼앗고는 그저 추억 한 줄기만 사진첩 속에 덜렁 남겨놓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