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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kyul Sep 25. 2024

'어느 곳의 선물'의 서사.

프롤로그.

몸을 잔뜩 웅크린채 새우처럼 누워 있는 여자의 모습.

누울 공간도 많은데, 굳이 구석에서 누워있는 여자의 모습.


그 여자의 모습이 그때 내 모습이었다.


고층을 좋아하는 나는 24층에서 내려다보이는 집의 뷰를 좋아했다. 

창문도 커서 시티뷰와 호수뷰가 내 시야를 가득 채웠다.

낮에는 아파트뷰와 크게 펼쳐진 호수, 마알간 하늘이 훤히 보여서 좋았고

밤에는 아파트들의 불빛, 호수공원의 산책로 조명, 여름에는 음악분수 조명까지 볼 수 있어 좋았고,

저녁과 이른 아침에는 주황빛으로 물든 하늘을 볼 수 있어 좋았고,

봄에는 벚꽃으로 물들인 공원을, 겨울에는 하얀 눈으로 뒤덮인 공원을 볼 수 있어 좋았다.


그때 그 집은 뷰만 가진 게 아니었다.

혼자 살기에 넉넉하고, 둘이 살아도 괜찮은 집이었다. 

침실과 거실은 슬라이딩문으로 분리되어 있었고, 주방은 한쪽으로 길게 있었다.


지하철역과도 가깝고, 인프라도 좋았다. 신도시인데 이미 번화가가 된 동네라서 동네에는 생활이나 즐길거리에 필요한 것들이 이미 갖춰진 상태였다. 지하철 뿐만 아니라 버스도 잘 되어 있어서 대중교통으로 여기저기 가기에도 좋았다. 


마음에 들지 않는 부분도 있었지만, 내가 원하는 조건들을 충족한 집이었다.

비록 월세라서 남의 집이었지만, 눈치 보거나 신경 써야 할 사람도 없어서 편하게 혼자 잘 지낼 수 있었다. 

나는 혼자 사는 걸 무서워하거나 외로워하는 사람도 아니었다.


원하는 집에 살면서 이를 누렸던 기간은 그리 길지 않았다.

경보기 오작동이 시작됨과 동시에 나는 다시 불안해졌다.

이미 전 집에서부터 오작동과 이를 방치하는 거에 진저리가 나 있었다. 

오작동이 맞는지 정확하게 확인을 안 하고 바로 오작동이라고 하는 모습을 보면서부터 더 무서워진지 오래였다.


이사하면서 불안해지지 말자, 괜찮을거라고 생각하자고 다짐했다. 그리고 정말 마음 놓고 살았었다. 

나의 노력을 비웃기라도 한 듯, 

이사한 집에서도 같은 상황이 발생했고 그 후로 경보기 오작동은 매우 빈번하게 발생했다. 

그러면서도 별다른 조치도, 개선도 없어보였다.


물론 잠깐 불안이 완화됐던 시기도 있었다. 그러나 다시 심해졌다.


그렇게 나는 원하던 집에서 잠시라도 있는 걸 어려워했다. 

남자친구가 옆에 있을 땐 그나마 괜찮았지만, 심할때는 같이 있어도 불안에 떨었다.


원하던 조건을 충족한 집은 금세 공포의 장소가 되었다.


사실, 그 집에 살기 전의 집에서도 늘 불안했었기에 한계를 넘어서면서 불안이 폭발했던 것 같다.

(나중에 알고보니, 나의 불안의 원인이 경보기 오작동이 아니었다. 어릴적부터 갖고 있었던 우울과 불안은 성인이 되어서까지 계속 이어지고 있었던 거다. 이를 자각하지 못하다가 정도가 심해지자 알아차리게 됐다. 때마침 경보기 오작동과 같은 자극적인 상황에 반복적으로 놓이게 되자 불안이 그 쪽으로 튀어버렸던 거다.)


단순히 도피처로만 보였던 곳들이 '각도의 변화'라는 선물을 받은 순간부터 달리 보였다.

잠시라도 불안에서 벗어나 휴식을 취할 수 있는 곳으로 느껴졌다.

잠깐의 휴식으로 내일도, 모레도... 하루하루를 살아냈다. 


하지만 그때뿐이었다. 다시 불안에 휩싸였다. 

언젠가부터는 공포의 장소에서 벗어나도 불안해졌다. 


그러던 어느 날, 꾸준하게 걸어가고 있던 나를 발견했다.

불안에서 벗어난 건 잠시뿐이었지만, 한 발씩 내딛고 있었다.

어떤 날은 한번에 열 발자국을 걸어갔고, 또 어떤 날은 가만히 있다가 다시 걸어가기도 했다.


뒤를 돌아 걸어온 길을 살펴보니 선물이 발자국마다 놓여있었다.

어느 곳을 거치면서 받은 선물들이었다.


그 중, 몇 가지를 골라 사람들에게 공유하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아주 오랜만에 쓰고 싶은 글이 생겼다. 오랜 고민이 해결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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