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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Panda May 07. 2023

도쿄의 두 가지 얼굴


2022년 12월, 겨울 서울


일본에서 알게 된 친구들과 한국 여행을 했다. 이렇게 각 잡고 서울을 여행해 본 적이 거의 처음인 거 같다. 기분이 굉장히 묘했다. 한국을 한 번도 와 본 적 없는 친구들이었기에 K컬처란 이런 거다. 한국이 얼마다 좋은지, 일본에서 느낄 수 없는 한국만의 정서와 문화를 보여줘야 한다는 엄청난 사명감을 갖고 시작한 여행이었다. 도쿄에 정착해서 살고 있는 지금, 한국을 방문할 때 여행하는 기분으로 와야 한다는 것도 내게는 참 새로운 시선이었다. 새삼 내가 외국에 살고 있구나를 느끼는 순간이었다.


그렇게 처음해 보는 서울여행이 시작되었다.


처음 도착하자마자 한국의 정을 느끼기도 전에 서울의 민낯과 마주해 버렸다. 인천공항에서 숙소가 있는 선정릉역으로 가려고 리무진을 타려고 할 때 작은 캐리어라 이 캐리어를 버스를 들고 올라가도 되냐고 묻자마자 아저씨가 덜컥 화부터 내시는 것이었다. 짐을 왜 버스 안으로 들고 올라가냐며. 너무 당황에서 뭐라 묻지도 못하고 짐을 맡겼다. 일본에서였으면 버스 안내하는 아저씨가 안된다고 대답을 하기 위해서 엄청나게 서두를 이끈 후 미안하다고 했을 것이다. 만약 짐을 타고 리무진을 못 탄다면 말이다.


두 번째 당혹감는 연속되었다. 숙소에 짐을 풀고 광장 시장을 첫 목적지를 정했다. 너무너무 추운 날씨 탓에 택시를 탈 수밖에 없었다. 택시 타고 얼마 지나지 않아 택시 기사님께 전화가 왔고 아저씨가 약 20분 동안 스피커 폰으로 개인적인 통화를 하는 것이었다. 뭐라 설명할 수 없는 부끄러움이 몰려왔다. 아마 혼자였음 대수롭지 않게 여겼을 것이다. 그런데 ‘이것이 한국의 정이다’를 보여주고자 계획했는데 처음부터 삐그덕 거리는 게 한두 개가 아니었다.


서울의 12월은 정말이지 쉽지 않았다. 추울 거라는 걸 알고 있었는데도 충분하게 두꺼운 옷을 가지고 오지 못해 편의점에서 옷에 붙이는 핫팩을 사러 갔다. 스티커형 핫팩을 사고 나도 오랜만엔 이용해 보는 거라 어리바리하고 있을 때 편의점 아주머니가 그걸 눈치챘는지 뜯는 법을 알려주셨다. 추울 거라며 잘 붙이라고. 우리가 편의점을 나오는데 끝까지 우리를 보며 걱정스러운 눈빛을 바라보는 게 느껴졌다. 가짜 친절이 아닌 진짜의 정.


내가 그리웠던 한국의 정.


묶었던 호텔이 예전에도 한번 이용한 적이 있었고 그때 호텔 옆에 김밥이랑 쫄면을 팔던 가게나 너무 가고 싶어 다음날 아침 일찍 일어나 찾아갔다. 가게 자체가 주변 직장인들만 이용하던 식당이라 외국인은 손님은 있기가 어려운 곳이었다. 친구들 중에 한 명이 엄마가 넷플릭스에서 우영우 드라마를 보고 한국의 김밥을 너무 먹고 싶다고 했단다. 그래서 한국에 놀러 가면 꼭 김밥을 먹고 오라는 친구 엄마의 특명도 있었다. 김밥과 쫄면을 먹고 계산하고 나가는데, 주인아저씨가 아주 간절한 눈으로 맛있는 한 끼가 되었는지, 맛있게 잘 먹었으면 좋겠다고 꼭 친구들에게 전해 달라는 것이었다. 12월의 혹독한 추위 속에서 여행하는 우리가 걱정된 거 반, 그냥 한 끼 잘 먹고 놀다 갔으면 하는 거 반의 느낌이 전해졌다. 괜스레 마음이 따뜻해졌다. 별거 아닌 아저씨의 한마디가 말이다.

식당에 찾아갈 때마다 재미난 일들이 여러 번 있었다. 삼겹살을 먹으러 간 식당에서 삼겹살과 같이 먹는 양파가 너무 맛있어 식당 주인분께 양파를 몇 번 리필을 요청했더니, 주인아저씨가 사발에다가 양파를 가득 채워놓고는 테이블에 아무 말 없이 툭 던져놓고 갔다. 순간 웃음이 터져 나왔다. 이걸 친절하다고 해야 할지 친절하지 않다고 해야 할지. 도쿄에 살다 보니 도쿄에서였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아마도 양파지를 더 달라고 했다면 굉장히 어색하고 친절한 미소로 양파를 더 주고 싶지만, 정말 미안하지만, 더 줄 수 없다며 미안하다만 외치고 절대로 리필을 주지 않았을 것이다. 근데 한국인인 내게는 더 요청하지 말라는 의미로 사발에 잔뜩 양파지를 툭 던져놓고 간 아저씨에 무심함이 더 좋다.


여행자가 아니면 느낄 수 없었던 여러 다양한 면모의 서울을 보게 되었다. 서울은 때론 츤데레 남자 친구 같기고 하고 때론 푸근한 시골집 할머니 같기도 하다.



도쿄

도쿄에 살면서 나는 모든 면에서 조심하며 살게 되었다. 한국 살 적에는 인도에서 주변 사람들 상관없이 그냥 내 갈길만 가며 앞만 보고 걸어 다녔다. 그런데 도쿄는 인도가 매우 비좁다 보니 옆에 가는 사람, 앞에 가는 사람, 반대로 걸어오는 사람들을 신경 쓰지 않을 수 없다. 대부분의 보행로가 두 사람이 걷기에도 때론 비좁을 때가 있기 때문이다. 인도에서 반대쪽에 걸어오는 사람이 보이면 먼저 지나가라고 양보를 하고 양보한 사람에게 고맙다는 목인사를 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처음에 그 모습을 보고 나는 꽤나 큰 인상을 받았다. 한 번은 공원 계단에서 막 뛰며 계단을 오르던 아주 어린아이가, 한 7살 되어 보이는, 내가 내려오는 모습을 보고 잠시 뛰는 것을 멈추고 같이 있던 동생에게도 뛰지 말고 잠시 멈추고 기다리라고 막는 것을 보고, 어릴 때부터 참 교육이 잘되어 있구나를 느꼈다. 어린아이에게서도 배울 점이 있었다.

한 번은 버스를 탔는데, 휠체어를 탄 할아버지와 동행한 할머니가 올라탔다. 버스 기사님이 버스를 정차하고 버스에서 아예 내려 할아버지 휠체어를 버스에 올려드리고 버스에 휠체어가 타는 공간에 안내하고서야 버스가 출발했다. 그 과정 때문에 버스가 한 10분에서 15분 정도 움직이지 않았다. 당연한 일일 수도 있겠지만 왜 나는 저런 장면을 한번도 살면서 본 적이 없었던 걸까. 10분 동안 움직이지 않는 버스에 그 누구도 불평하는 사람은 없었다.


여기까지는 행복한 이야기다. 나를 화나게 한 적도 한두 번이 아니다. 식당에서 한국인 동료들과 한참을 떠들고 있는데, 식당에서 일하시는 아주머니께서 우리에게만 와서 조용히 해달라고 한다거나, 우리에게만 와서 이 식당에서는 마스크를 쓰고 있어야 한다는 말도 안 되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여러 변 있기 때문이다. 조용한 곳이었으면 그러려니 하겠지만, 우리뿐만 아니라 모든 손님이 밥 먹으면서 떠들고 있었으며, 마스크를 써달라고 부탁한 곳에서는 다들 마스크를 쓰고 있지 않았다. 반박하지 못하고 식당에서 나와서는 분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왜 이렇게 차별을 받아야 하는지. 분통을 터트렸다. 누가 봐도 한국어로 말을 하는 우리가 듣기 싫었던 게 분명해 보였다.


도쿄에 오래 산 지인은 도쿄 사람들의 친절은 어렸을 때부터 주입된 거라고 한다. 친절하고 매너 있지 않으면 본인 체면이 구겨지는 거기에 친절해야 하는 매뉴얼대로 행동하는 것뿐이라고. 그래도 그게 무엇이 되었던 친절한 건 좋다. 그리고 가끔씩 마주하게 되는 그들의 또 다른 얼굴에 실망도 여러 번 한다. 도쿄는 젠틀한 신사 같다가도 얄미운 깍쟁이 아가씨 같기도 하다.

서울이 그렇듯, 도쿄가 그렇듯 도시에도 다양한 얼굴을 가진다. 어떤 도시를 한 가지로 정의하기가 어렵다. 완전히 악하지도 선하지도 않는. 큰 기대를 가지고 살면 실망하기도 하고, 뜻하지 않게 따뜻함을 느끼기도 한다.



도시가 그런데 사람은 어떨까. 나는 때론 착한 사람좋은 사람이 되려고 한다. 그게 내 마음이 편해서라고 이야기한다. 친절한 게 편해라고 하지만, 근데 스스로를 자세히 나를 들여다보면 내가 좋은 사람이 되려고 하는 이유는, 누군가에게 미움받기 싫은, 예전 베스트셀러의 제목과 반대로 미움받을 용기가 없어서 일지도 모르겠다. 나를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해 주고 모두에게 사랑받고 싶어 하는 마음 때문에. 너를 위한 친절이라기보다는 나를 위해 너에게 친절한 이기심에서 시작된 것일지 모르겠다.


일본에서 와서 알게 된 친구와 작년에 발리 여행을 같이 갔다 온 이후로 잠시 소홀해졌었다. 역시 누군가와의 여행이 생각보다 쉽지 않듯이, 일주일 내내 같이 있다 보니 안 맞는 부분들을 많이 발견하게 되었다. 더운 날씨 때문인지 친구는 작은 일에 짜증을 냈다. 그게 시발점이 되었다. 앞서 서두를 길게 이야기한 것처럼, 친절 강박증이 있는 내게, 자주 짜증을 내는 친구를 감당하는 일이 쉽지 않았다. 아마 내가 이만큼 친절하니 너도 그만큼의 친절을 베풀어라는 마음이 아주 깊게 자리 잡았는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여행 중에 대판 싸웠다. 싸우고 나서 바로 풀기는 했지만, 조금 앙금이 남아있던 내게 친구와의 조금의 거리가 필요했다. 그렇게 한동안 소원해졌는데 몇 달 후 친구에게 연락이 왔다. 자기 집에서 여러 친구들과 같이 밥도 먹고 와인도 마시려는데 오지 않겠냐며 초대를 해왔다. 생각해 보니 친구는 마음을 표현하는데 말로는 서툴지만 늘 그렇게 베풀었었다. 친구들을 초대하고 요리를 해주고 술까지 대접해 주고, 모든 것에 후했다. 자기 사람들이라고 생각하면 돈을 쓰는데 아깝지가 않다고 했던 말이 생각이 났다. 물론 당시 발리로 여행하면서 했던 친구의 행동이 이해가 되거나 완전히 용서가 되거나 하지는 않는다. 어찌 보면 많이 달랐던 거다. 사실 너 정말 못됐어라고  생각했지만, 사람에게는 정말 다양한 면이 존재한다는 걸 나는 작년까지도 느끼지 못했던 거였다. 내가 가지는 아주 못된 면은 고려하지도 못한 채 말이다.

도시던, 사람이던 우리는 다양한 면을 가진다. 나와 100% 일치하는 사람은 존재하지 않는다. 나와 완전히 맞는 도시도 존재하지 않는다. 어딜 살던 늘 불평을 하게 되기 때문이다.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며 적당한 존중을 하며 다름을 인정하면서 살면, 너로 인해 가지는 실망감은 조금은 줄여지지 않을까. 나도 못된 내가 당연하게 존재하기 때문에. 아마 상대방도 나와의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며 나를 받아들이며 살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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