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4 사랑이라 말할 수 없어서

<부동산으로 불타버린 사람들의 이야기>

by 경국현

1부; 2005-2010년


04.


밖으로 나왔다.
담배 연기 사이로 남자의 뒷모습이 보였다.
어깨가 기울어져 있었다.
마치, 인생에서 몇 번쯤은 쓰러져 본 사람처럼.

‘저 남자… 나랑 닮았다.’

“어디 갈까?”
여자가 물었다.
“한잔 더할 수 있어?”
대답은 없었다. 대신 남자는 걸음을 옮겼다.

깜빡이는 불빛 아래, 말없이 걷는 밤거리.
여자가 팔짱을 낀다.
남자가 풀어낸다.
대신 손을 잡는다.
차갑지 않았다.
그 손이, 무섭게 따뜻했다.

2층의 바.
천장에서 내린 조명, 술병이 빛을 머금는다.
진열대 앞에 선 젊은 여자들.
그 맞은편, 커튼이 드리워진 테이블 네 개.

양주 한 병, 치즈 접시.
아가씨가 조용히 와서 커튼을 내려준다.
세계가 닫힌다.
두 사람만 남는다.

테이블 위, 여자의 손이 있다.
손등. 손가락. 가지런한 살결.
남자의 시선이 머문다.
기억 속 무언가가 스멀거린다.
그러다—
본능이 먼저 움직인다.
남자의 손끝이, 여자의 손등을 더듬는다.
보드랍다.
이건 감정이 아니다. 소유다.

여자의 시야가 흐릿해진다.
조명이 남자를 실루엣으로 만든다.
술잔, 반쯤 비어 있다.
남자가 손을 더 깊게 잡는다.
그 안으로, 여자의 손이 천천히 사라진다.
그 순간—
공기가 멈춘다.

정적.
침묵.
숨소리마저 없었다.

여자가 고개를 든다.
남자의 눈과 마주친다.
숨이 턱 막힌다.
남자가 움직인다.
몸을 내밀고, 입술을 훔친다.

피하지 않았다.
고개를 돌릴 수 있었지만, 하지 않았다.
멍했다.
입술이 닿는다.
술 향이 코끝을 타고 오른다.
입술이 벌어진다.
혀가 파고든다.

순간,
세계가 부서진다.
둘만의 시간이 흐른다.

눈을 뜬다.
눈빛이 바뀌었다.
남자의 눈, 욕망으로 젖어 있다.
여자의 눈, 뜨겁다.
눈물이 흐른다.

살고 싶다.
이 사람으로, 다시 살고 싶다.
그러기엔, 너무 늦었다.

여자는 얼굴을 만져본다.
뜨겁다.
술 때문이 아니었다.
부끄러움이었다.
몸이 아니라, 마음이 벗겨진 기분.

눈을 감는다.
침묵이 다시 찾아온다.
그러다—
잔을 든다.
입을 뗀다.

“우리, 불륜이야.”

말이 떨어진다.
공기가 떨린다.
남자는 아무 말 없다.
그러나 그 침묵 안에, 대답이 있다.

사람은 자기 사랑에
의미를 부여하고
집착을 만들고
희생을 감내하고
분노를 숨긴다.

여자는 속으로 중얼댄다.
가볍게 생각하자.
남자는 조용히 받아들인다.
이건 아름답다.

사랑을 아는 척 하지만,
사랑이 뭔지 모른다.
대부분, 죽음으로 끝난다.
남는 건… 위선이다.

지금, 여기에 남은 건 단 하나.
에로스.
그것이면, 지금은 충분했다.



작가 소개

부동산학 박사

실무와 이론을 넘나들며 한국 부동산의 뒷 세계를 소설로 밝힌다.

국내 최초 부동산 소설을 쓸 수 있는 사람은 정해져 있다.


다음 이야기 예고

5장. 미끼를 던지면 사람들이 문다. 미끼를 문 사람들 덕에 돈을 번다.

부동산에 거래되는 돈은 단위가 크다. 그 돈을 버는 방법에 눈을 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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