탔다. 까맣게. 까맣고 까마니 전소되었다는 표현이 적절한데 이 녀석에게는 전소라는 단어를 붙일 수 없다. 발화(發火)되어 탄 것이 아니라 말라버린 것이기 때문이다. 검게 그을린 잎을 처음으로 발견한 것은 일주일도 더 전의 일이었다. 날이 이렇게 덥지 않았더라면 큰 화재 끝에 재가 될 정도로 타버렸다고 생각할 만큼 녀석은 아주 새까맣게 타 있었다.
생기가 돌아야 할 화분이 열기로 가득한 것은 이변이었다. 생명을 깃들게 해야 할 태양이 산 것을 말려가는 것은 서글픈 일이었다. 산 잎이 더 많았다면 손이라도 써 보았겠지만 산 것보다 타 버린 것이 많았으니 죽어가는 녀석을 위해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애상하게도 유일하게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죽음을 지켜보는 것뿐이었다.
무언가의 죽음을 들여다보고 있는 것이 어쩐지 내가 그 죽음에서 물러나 있는 것을 선언하는 것 같아서, 화분을 내려다보고 있는 눈이 나는 마치 영영 살 것처럼 무심한 눈길을 남기는 것만 같아서 녀석을 오래도록 바라보고 있을 수 없었다. 언제 어디에서 태어나 어떻게 그곳에서 나를 만나게 된 것인지 모르겠으나 찬란했던 날들의 모습을 잃고 마지막 남은 생의 기운을 피워내고 있는 게 어쩐지 애처로워 보였다. 가슴이 뭉클해져 오는 게 눈물이 쏟아질 것 같았다.
줄기까지 다 타버렸으니 남은 생이 얼마나 될는지. 작열하는 태양을 올려다보며 언제 끝날지 모르는 생의 사투를 벌이고 있는 녀석의 남은 날들을 가늠해 보고 있는 게 어쩐지 죄스러웠다. 저물어가는 것의 끝을 차마 더는 바라볼 수 없어 등을 돌려 섰다. 화분의 주인이 녀석을 늦지 않게 양지바른 땅에 묻어주기를 기도하며.
주인은 녀석을 끝내 땅으로 돌려보내지 않았다. 그리하여 나는 오늘 몇 남지 않은 초록 잎을 붙들고 하늘로 고개를 들고 있는 녀석을 다시 만나게 되었다. 하얀 화분을 앞두고 있는데 투명한 뭔가가 눈에 아른거렸다. 까만 잎에서 피어오르는 생의 뜨거운 연기였다. 끝까지 생을 붙들고 마지막 남은 생명력을 피워 올리고 있는 이름 모를 식물의 분투였다.
뭔가를 손에 쥐려 노력하는 게 힘에 부쳐 중도에 손 놓아버리려 했던 수많은 일들이 머리를 스쳐 지나갔다. 세상의 속도에 맞춰 가려 애쓰느라 타버린 속을 보며 부당함을 탓하고 누군가를 원망하며 목 놓아 울던 기억이 떠올랐다. 나는 마치 아무런 잘못이 없는 것처럼, 늘 당하기만 한 것처럼 군 어리석은 날들의 기억이 까맣게 타며 말라가고 있는 녀석에 겹쳐졌다.
남은 생을 끝까지 붙들고 늘어지며 생의 소임을 다하고 있는 녀석에게 목적이나 목표는 없었다. 죽음을 향해가고 있다 하더라도, 남겨진 날이 얼마 없다 하더라도 생명이 깃들어 있는 한 남은 생명력을 끌어모아 죽는 그 순간까지 살아있음을 피워내고 있는 것뿐이었다. 살아있음은 그러한 것이기 때문이었다.
검게 그을린 화분에서 찬란한 빛을 본다. 서글프지 않다. 서럽지 않다. 까맣게 타들어 가며 죽어가고 있는 녀석이 산다는 것은 무슨 일이 있어도 끝까지 빛을 피워내는 일임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꽃을 피우고 열매를 남겨서가 아니라 죽음의 고통에 버금가는 괴로움과 두려움을 마주하며 앞으로 나아갈 용기를 내는 것, 그것만으로도 생은 값진 것임을 알려주고 있기 때문이다.
시시각각 타들어 가고 있는 화분을 지긋이 응시한다. 가슴에서 울컥 뭔가가 솟구친다. 수많은 포기의 순간을 넘어서오며 오늘을 살아가고 있는 이들의 따뜻한 눈이 떠오르기 때문이다. 그 눈 안에 내가 있고 당신이 있고 우리를 닮은 수많은 이들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내가 그러했듯 조용히 숨죽여 울며 상처투성이가 된 가슴에 말없이 따뜻한 손을 덧대줄 누군가를 찾고 있을 당신의 절박함 느껴지기 때문이다.
언젠가 이별을 고하게 될, 그리하여 타들어가는 고통을 벗어나게 될 이름 모를 식물이 내게 남긴 말을 당신에게 전하려 한다. 덧없이 사라지고 의미 없이 지워지고 있는 게 아니다, 투명하게 새겨지고 있는 것이다. 당신은 충분히 빛나고 있다. 다만 너무 투명하여 그 빛을 봐줄 수 있는 사람을 아직 만나지 못한 것뿐이다. 그러니 심장이 뜨겁게 뛰는 한 당신의 마음을 붙들고 있어 보기를. 당신의 가슴을 움직이는 그것을 끝까지 쥐고 있어 보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