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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Yuj Mar 21. 2017

행복해서 마신 거야!

La bonne heure

프랑스에 정착하면서 술을 참 많이도 마셨다. 정확히는 와인을... 미니는 나에게 가능한 여러 종류의 와인을 맛보게 해 주고 싶어 했고 우리는 각종 와인 페어에도 열심히 참여했다.  


니스에서 파리로 이사 와서 부모님 댁에 살던 시기에 우리의 주량은 정점을 찍었는데 아페리티프(apéritif), 짧게 줄여 아페로(apéro) 라고 하는 프랑스의 식전주 문화 때문이었다.

미니의 부모님은 유난히도 사교적이셔서 하루가 멀다 하고 지인들을 초대하셨는데 이때에 빠질 수 없는 것이 바로 이 아페로였다. 본격적으로 식사를 하기 전에 각자 취향에 맞는 와인이나 칵테일 등을 한 잔 하면서 안부도 묻고 분위기도 띄우는 사교의 장이라고나 할까.

아페로 하는 날!

이 아페로 타임이 나는 본식을 먹는 것보다 더 좋았다. 왜냐하면 일단 식사시작하면 테이블에 둘러앉아 최소 세 시간은 엉덩이를 붙이고 못 알아듣는 불어에 고개를 끄덕이고 있어야 했지만, 아페로를 할 때만큼은 자유로웠다. 와인이든 뭐든 홀짝거리며 왔다 갔다 맛난 안주거리도 먹을 수 있는 그 캐주얼함이 좋았다. 미니는 보고 싶던 사람들을 만나니 그저 즐거웠을지 모르겠지만 나의 경우엔 말이 안 통하는 새로운 사람들과의 만남, 언어로 인한 스트레스가 활발한 음주의 동기가 되기도 했다. 을 마시면 수줍음이 줄고 좀 더 사교적이 되는 나의 성격상 그러했다.


그런 나에게 단 한 가지 문제는 바로  술버릇이었는데 술을 계속 마시면 모를까 조금 마시다 멈추는 그 순간부터 잠이 쏟아진다. 그래서 가끔은 민폐 며늘아기가 되기도 했으나 다행히 아무도 그런 나를 신경 쓰지 않았다. 왔다 갔다 하면서 신나게 마시다가 구석에서 한 숨 잔 다음에 본식이 시작될 때 짠~하고 일어나서 테이블에 앉으면 되는 거였다. 그리고 식사하면서 새로운 와인을 또 마시고, 디저트를 먹으며 또 다른 와인을 마셨다. 말을 못 알아듣는 그 지루함을 술로 달래느라 따라주는 술은 절대 거절하지 않았다.


그렇게 시부모님과 10개월을 보내고 미니의 일로 우리는 한국에서 몇 달 머무르게 되었다.

미니에게 이것은 기회였다.

우리 가족에게 아페로를 전수할 기회!

어느 주말 모든 가족 친지를 다 초대했고 뚜벅이였던 우리는 배낭을 메고 택시를 타고 세 번에 걸쳐 술을 사다 날랐다. 역시나 흥 많은 가족, 음악을 듣고 잔을 부딪히고 대화하면서 리는 참 많이 웃었고 내게는 젤 즐거웠던 아페로의 추억이다.

그 날을 계기로 미니와 우리 가족은 종종 아페로를 했다. 이 사진들이 바로 한국에서 가족들과 한 아페로의 흔적들. 아~ 그립다 한국.


시댁에서 10개월, 한국에서 7개월을 보내고 나서 우리는 드디어 분가를 했다.

우리 집에 놀러오세요!

한국에서 돌아온 후 집을 구하느라 몇 주간 다시 시부모님 댁에서 지내야만 했는데, 이사를 하고 우리 둘만 사는 집이라고 생각하니 더 흥이 나서 주말이면 재래시장에 가고 와인전문점에 들락날락하면서 술을 사다 날랐다. 멤버십 가입을 하니 세일 때마다 연락이 와서 참새방앗간 드나들 듯이 했다. 맛 좋은 와인을 발견하면 몇 병 더 사두었다가 특별한 날에 마시거나 친구들이 놀러 오면 마셨는데 와인 맛을 아는 친구들과 마시면 그 즐거움이 배가 되어 새로운 병을 따고 또 땄다.

그렇게 음주의 즐거움에 쏙 빠져 살다가...



작년 봄.

미니와 나는 건강을 위해 술을 줄이기로 했다.

안 마시면 줄어드는 것이 주량 아니던가.

이제둘이서 와인 한 병도 버겁다.

그러나 여전히 애주가인 우리는 가볍게 맥주를 즐겨 마시는데 마셔봐야 250ml 한 병, 술이 달다 싶은 날엔 두병 정도 마시거나 식사하면서 와인 한두 잔 곁들이는 정도.


그런데 얼마 전부터 미니는 친구들을 만나기만 하면 살짝 취한 상태로 집에 들어오는 거다. 술을 한참 즐기던 때에도 밖에서 술 마시고 취하는 것이 싫어 집에서 놀던 우린데 은근 신경이 쓰였다.


다행히도 취하는 걸 목적으로 마시는 것아니기 때문에 곤드레만드레가 되진 않았지만,

"아페로나 할까?" 하면서 만나 식전에 한두 잔 하는 것이 일상적인 이 곳에서 일 끝나고 피곤한 상태로 빈 속에 마시는 술이 원인인 것 같았다. 암튼 그때마다 술 마시고 늦게 오면 걱정되니까 안 취하게 조심해야 한다고 잔소리를 다다다다 했는데, 얼마 전 남편의 친구로부터 놀라운 이야기를 들었다.


미니가 요즘 주변 사람들을 만나면 내 브런치 자랑을 하고, 레스토랑 직원 심지어 옆 테이블에서 술마시는 사람들에게까지 내 그림을 보여주면서 의견을 묻는다고 했다. 그리고 그림이 좋다는 얘길 들으면 그렇게도 뿌듯해하면서 맛있게 술을 마신다는 거다.

아...



생각해보니 미니는 그랬다.

내가 그림을 그릴 때마다 레이저를 쏘며 보고 있었다. 처음엔 "잔소리 대마왕 저리 썩 물러가라!"를 외치며 짜증을 내기도 했는데 미니는 이제 나에게 없어서는 안 될 최고의 조언자가 되었다. 브런치에 올리는 나의 글을 잘 이해할 순 없어도 그림만큼은 얼마나 엄하게 체크하고 잔소리를 하는지 모른다.


그러다 사전 점검만으로는 지원사격이 부족하다고 생각했는지 언젠가는 나 몰래 브런치 앱을 다운로드 받았다. 그러나 결국 혼자선 영 안되겠는지 공유는 뭐고 라이킷은 뭐고 구독은 한국말로 뭐냐고 묻고 또 물었다.

첫 글을 발행했던 작년 11월부터 지금까지 매번 내 글을 가장 먼저 확인하는 사람은 미니다.


얼마 전엔 주문한 것도 없는데 턱 하니 택배가 왔다. 그렇게 무심한 척하면서 내가 맘 속에만 품고 있던 그림책들을 알아서 주문해 준 것도 미니였고,


구독자가 천 명이 되던 날, 몰래 준비해 둔 샴페인을 따고 나보다 더 기뻐해 준 것도 미니였다.


밖에서 술 마시는 걸 별로 좋아하지 않던 사람이 요즘 왜 이러나 싶었는데...

미니는 기분이 좋아서 그런 거였다.




우리 집 주말 저녁은 거의 같은 패턴이다.

미니는 요리를 하고 나는 그 옆에 왔다 갔다 하면서 잔심부름을 하고 수다를 떤다.

그리고 동시에 가볍게 아페로를 한다. 


지난 주말에도 같은 풍경이었다.

미니는 요리를 하고 우리는 감자칩에 맥주 한 모금하면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했다.

그런데 어찌 서둘러 두 병째 맥주를 마시더라니 미니는 살짝 흥이 난 듯했다.

난 이제 막 시작인데 혼자 먼저 취하다니...!

"남편 벌써 취했어?"라고 나도 모르게 날카롭게 쏘았는데.


헉!

남편이 한 수 더 떠서 나를 확 노려보는 게 아닌가.

그리고 당당히 예스라고 대답했다.

자기는 취했단다.

그리고 빙그레 미소를 짓더니 얘기했다.


응! 행복해서 취한 거야! 내 인생은 행복해~! 우리는 행복해!
기분이 너무 좋아. 왜냐하면 난 행복하니까!


미니의 말에 내 맘은 꽃밭이 되었다. 


남편을 만나고 프랑스에 와서 사는 삶이 늘 즐겁지만은 않았다. 특히 극우 성향의 남부 도시 니스에 살 때는 이 나라가 정말 싫었다. 결혼을 했음에도 매년 거지 취급받으며 줄 서서 비자를 연장받는 외국인의 삶이, 시누아 소리 들으며 (많은 프랑스인들 눈에 동양인은 다 중국인, 시누아chinois는 프랑스어로 중국인이란 뜻이다) 콧대 높은 프랑스인들과 엉켜 사는 이 삶이 항상 유쾌할 수는 없으니까.

그런데 내 남편이 행복하다고 말하는 그 순간 이 모든 게 괜찮아졌다. 내 맘 속에 꽃이 폈다.


긴 한국어를 이해하지 못하는 미니는 내가 쓰는 이 글을 읽을 수가 없다. 그래서 내가 설명해 주지 않는 이상 그 날의 내 기분을 모를 테고 앞으로도 모르겠지만 괜찮다.

하지만 마음에 꽃이 피는 그 느낌을 미니도 느낄 수 있다면 좋겠다.


돌아오는 주말엔 내가 먼저 말해줘야지.

나는 지금 행복하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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