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그림을 그립니다.
미니를 따라 프랑스로 왔을 때 제일 먼저 한 것은 120색 색연필을 산거다. 외딴 곳에서 백수가 되었으니 어릴적 로망이던 그림그리는 삶을 살아보겠노라 결심했다. 안되는 불어로 니스와 모나코의 화방을 다 둘러봐도 당장 살 수 있는 곳이 없어 남편이랑 비행기타고 파리에 가서 샀다. 그렇다고 내가 그 색연필로 그림을 미친듯 그렸느냐하면 그건 또 아니다. 시작조차 안했고 그렇게 몇 년이 지났다.
돌이켜보니 참 바보같다. 살면서 제일 하기 싫었고 앞으로도 하지 않았으면 하는 말이지만 후회가 된다. 특별히 잘 그리는건 아니지만 못그리지도 않는 그런 실력. 그래서 선뜻 시작하기가 두려웠다. 너무 잘 하고 싶은데 못할까봐. 내 기대치는 만리장성인데 결과는 내 발끝만도 못할까봐 두려움이 앞섰다. 참... 이 마음을 이렇게 진부하게밖에 표현하지 못하다니 처참하다. 만리장성이라니...
아주 어릴때부터 그림그리는걸 좋아했지만 나이가 들면서 세상엔 그림 잘 그리는 사람들이 너무 많다는걸 알았다. 평가받고 실패하고 좌절한 경험들이 뭉쳐지니 그림은 내 인생의 중심에서 점점 밖으로 밀려났다. 당장은 중요하지 않은 것, 돈벌이와는 거리가 먼 것, 좋아하지만 눈에 띄게 잘 할 수 있을진 확신할 수 없는 것.
그림은 그렇게 내 인생에서 사라졌다.
프랑스에 오기 전엔 강의를 했다.
나는 내 일이 좋았다.
그 겨울엔 갑자기 봇물이 터졌는지 시간강사로 나가던 대학에서 초빙교수 제안을 받았다. 총선에 맞물려 정책컨설팅 회사에서도 파트너로 일해보자고 연락이 왔고 한국사람은 다 아는 대기업에서도 스카웃 제안을 받았다. 물론 이 모든 것이 한 순간에 이루어진 것은 아니었지만 그동안의 말못할 고생이 보상받는 것 같아 기뻤고 갑자기 이게 무슨 복인가 싶었다. 이렇게 열심히 공부하고 경력쌓으면 나도 언젠가 골드미스가 될 수 있겠다는 희망으로 넘실거리던 어느 날, 지금의 남편을 만났다. 첨엔 한국에서 만나고 연애했지만 그가 본국으로 돌아간 후에 이어진 장거리 연애는 쉽지가 않았다. 무엇보다도 시차가 너무 안맞았다. 그는 그대로 퇴근하자마자 피곤한 몸으로, 나는 나대로 새벽 3~4시까지 졸린 눈을 부벼가며 스카이프 앞에 앉아 있었다. 계속 그럴 순 없는 노릇이었지만 헤어질 수도 없었다. 2012년 가을, 나는 다 포기하고 짐을 쌌다.
그 당시 나는 프랑스어 알파벳도 읽을 줄 모르는 까막눈이었다. 오전엔 어학원 제일 낮은 레벨의 반에서 공부를 하고 오후엔 혼자 남겨진 강아지마냥 모나코로 출퇴근하는 그가 오기만 기다렸다. 나름 야망을 쫓는 삶을 살다가 직업도 없고 말도 잘 못하는 외국인으로 살려니 서글플 때가 한 두 번이 아니었는데 그런 내 생활을 누구보다 잘 알던 동생은 그림을 그려보라고 종용했다. 정말 잊을만하다 싶을 때마다 얘기를 꺼냈는데 그때마다 생각해보겠노라 답했다.
자신이 없었다...
성인이 되고 밥줄에 매달린 후로 맘먹고 그림을 그린 적이 없었기 때문에 더더욱 그랬다. 돈이 되는 일을 해야 인정받을 수 있을 거라는 생각, 특출나게 뛰어나지 않으면 소용 없다는 생각, '한국에서 하던 일이라면 당장 시작해도 잘 할 자신이 있는데.'라는 과거에 머무는 못난 미련이 발목을 잡았다. 설상가상으로 미니의 일때문에 우린 니스에서 파리로, 파리에서 한국으로, 다시 파리로 4년간 3번을 이사했다. 이건 거의 유목민 수준이 아닌가?
나는 어느새 경력단절인이 되었다. 더 늦기 전에 대안을 생각해야만 했다. 몇 달에 걸쳐 유럽을 중심으로 대학원들을 알아보기 시작했고 런던에 있는 두 학교로 후보군을 추렸다. 새로운 연관학문을 배우고 유럽학위를 취득하면 경력단절의 골을 매울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 때문이었지만 솔직히 학위를 딴다고해서 미래가 보장되는게 아니라는 것즘은 나도 알고 있었다. 이 수천만원짜리 도박같은 도전을 동생은 명예욕이라고 했고 가장 친한 친구는 남들보다 자아가 강한거라고 했으며 또 누군가는 돈지랄이라고 했다. 확고히 결심했다 생각했건만 마지막 순간에 난 또 망설이고 있었다. 한국에서 싸들고 온 그림책들을 뒤적거렸다. 정말 이런 내 자신이 바보천치 쭈구리 같았다.
여전히 쭈구리로 지내던 어느 날, 미니가 데이트 신청을 했다. 그리곤 말없이 나를 데리고 간 곳은 엄청나게 큰 파리의 화방이었다.
우와! 이 종이 냄새, 물감 냄새… 심장이 벌렁벌렁 했다.
울컥했다. 친구들과 화방에 들락날락하던 고 3때 생각도 났고 사심없이 그림그리길 좋아했던 예전의 내 자신도 떠올랐다. 엄청나게 뛰어난 재능을 타고난 것은 아니지만 좋아하는 친구들에게, 존경하던 은사님들께, 지금은 각자의 인생을 살고 있을 과거의 누군가에게 그림을 선물했었다. 그림은 나에게 마음을 표현하는 수단이었던거다.
한참을 서성이다 붓 몇 자루를 샀다. 애증의 수채물감도 같이. 고백하건데 난 사실 고등학교 미술시간 이후론 수채물감을 써 본 적이 없는, 정말 말하기 부끄럽지만... 디자인 전공자다. 관련경력도 전무후무, 심지어 제대로 된 첫 직장은 항공사였다. 그럼 뭐 어떤가? 이번엔 맘이 가는대로 집어 들었다. 이제 미술선생님한테 그림을 검사맡을 일도 없고 이걸로 대학을 가는 것도 아니니까 그냥 그리고 싶은걸 그리면 된다. 요즘 한창 수채화가 예뻐보이던 참이었다.
일요일 오전내내 유튜브를 뒤적이던 미니는 갑자기 물감을 꺼내고 물통에 물을 받아왔다. 전문가들은 다 이렇게 하는거 같다며 수채화 초보인 나를 위해 색상차트를 만들어 주고 항상 볼 수 있는 곳에 세워두었다. 나를 이렇게 응원해주는 남편의 기대에 부흥하고 싶었다.
이참에 동생이 소개해 준 브런치에 작가신청을 했다. 한 달을 망설이다 첫 글을 발행했지만 봐주는 이는 없었다. 딱 한 명의 구독자가 있었는데, 그건 내 동생.
하지만 상관없었다.
동생이 잘하고 있다고 응원해 주었고 남편은 내가 자랑스럽다고 했다. 게다가 나만의 공간이 주어지고 이곳을 채워나갈 그림을 그리는 것만으로 내 맘은 기분좋게 일렁이고 있었다. 뭔가 생산적인 작업을 요하는듯한 의무감도 좋았다. 난 이제 작가니까... 명예욕도 좀 채워주는거 같다. 작가라고 불러 주니까! 그러고보면 브런치는 참 똑똑하다.
이제 곧 다시 새로운 한 해가 올 것이고, 나는 한 살을 더 먹는다. 20대 후반, 강의를 시작했을 무렵엔 강연자로서의 멋진 30대를 꿈꾸었고 그건 내 인생의 플랜 A 였다. 그렇게 꿈꾸었기 때문에 지치지 않았고 행복할 수 있었다는 중요한 사실을 까맣게 잊고 있었다.
나는 행복하고 싶다.
앞으로도 그랬으면 좋겠다.
그래서 마음속에 꽁꽁 묶어두었던 수줍은 플랜 B를 꺼내 쌓인 먼지를 털고 닦아내는 중이다. 20대의 내가 꿈꾸던 30대의 모습과 조금 다른 모습일지라도 괜찮다. 30대의 난 이제 또 다른 모습의 뜨거운 40대를 꿈꾼다.
결국은 용기가 없었던걸까?
가졌던 것에 대한 미련, 새로운 것을 향한 두려움에 스스로를 겁쟁이로 만들고 그 많은 시간을 허비했던걸까? 이제야 비로소 용기를 냈다. 어쩌면 평생을 마음속 플랜 B로만 간직했을 '그림그리는 삶'은 '내 인생의 진행형 플랜 A'가 되었다.
인생의 플랜 A와 B를 구분짓는 방식은 사람마다 조금씩 다를거라 생각한다. 내가 생각하는 플랜 A는 말그대로 일순위 목표이면서, 목표의 실현을 위한 세부사항 실천이 지금 당장 가능한 일.
플랜 B는 굳게 믿었던 플랜 A가 좌절됐거나 더 이상 시도할 수 없는 환경에 맞닥뜨렸을 때, 실망한 내 자신을 추스려 툭툭 털고 일어날 수 있는 대담함, 온 힘을 다해서 '다시 시작할 수 있는 용기'야말로 진정한 플랜 B가 아닐까?
요즘 나는 그림을 그린다. 알아주는 사람도 없지만 재미있고 신난다. 이런 내가 좋아지기 시작했다.
이제 나는 그림을 그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