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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라슈에뜨 La Chouette Feb 06. 2023

나물을 할까 말까?

누가 먹는다고?

모르고 지나갔으면 좋았을 텐데, 안타깝게도 보름이라는 사실을 알아버렸다. 온몸으로 갈등이 밀려왔다. 나물을 해? 말아? 나물이라면 껌뻑 죽는 우리 딸이 있으면 모를까, 남편에게는 그냥 한식 중의 하나일 뿐인 나물을 굳이 뻗쳐가며 해야 하나 싶은 마음에 게으름이 밀려 올라왔다. 


하지만 딸이 괜히 나물을 좋아하겠는가? 엄마인 내가 좋아하니 그 입맛이 그 입맛인게지. 사 먹는 나물은 모두 가짜이고 엄마의 나물만 진짜 나물이라고 주장하는 딸은 이웃나라에 있다. 너무 먹고 싶다고 해서, 딸 보러 갔던 어느 겨울에는 집에서 나물을 해서 진공포장으로 싸가지고 비행기를 탄 적도 있다.


문제는 그 엄마인 나 역시 사 먹는 나물은 질색이라는 것이다. 이럴 때에는 만들어 놓은 것 한 접시 사면 딱 만만 할 텐데... 한인 마트에서도 분명히 반찬코너에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사면 분명히 후회를 할 것이다. 요새 사 먹는 반찬에는 모두 설탕이 들어가서 들큼한 것이 내 입맛에는 정말 아니다. 


아무리 바빠도 매년 나물은 꼭 챙겼다


남편에게 말했더니 당연히 하리라 받아들이는 것 같았다. 남편이 원하는 바는, 내가 캐나다 와서 그와 결혼해서 살지만, 그렇다고 한국에서 하던 것들을 포기하지 않았으면 좋겠는 마음인 것이다. 결국 갈등하다가 장 보러 가기 전에 집안을 뒤졌다. 놀랍게도 아홉 가지 말린 나물이 집에 모두 있었다. 사놨던 고사리와 토란대, 고구마줄기도 있거니와 누가 전에 줬던 취나물, 마당에서 수확해서 말려둔 건호박, 건가지, 무말랭이, 고춧잎, 도라지까지... 이럴 수가? 나, 캐나다 사는 거 맞아? 


사정이 이러니 안 할 수가 없었다. 검은콩, 강낭콩, 흰콩이 있었고, 팥도 있고, 기장도 있고, 찹쌀도 있고, 안 할 핑계를 찾으래야 찾을 수가 없었다. 결국 부럼 삼아 호두와 땅콩만 좀 사 왔더니 보름 준비가 되고 말았다.


남편에게 대보름을 다시금 소개를 해주고, 내일 하루 종일 9번 밥 먹을 수 있냐고 물었더니 껄껄 웃었다. 원래 오곡밥, 아홉 가지나물을 하루동안 아홉 번에 걸쳐서 먹는 것이라던 어머니 말씀이 떠올랐다. 


한주먹씩 마련해서 아홉 가지를 채웠다


아침에 일어나서 눈 비비고 방에서 나오면, 벌써 나물과 오곡밥 다 지어놓으시고, 부스스한 우리에게 오곡밥을 퍼주시던 어머니가 생각난다. 나물을 가짓수 맞춰서 꼭 만들던 것은 결국 어머니한테 온 것인데, 나중에 우리 딸도 이렇게 해 먹으려나? 그건 잘 모르겠다.


일요일인 대보름 아침, 느지막이 일어나서 게으른 하루를 시작하면서, 우리는 9번 먹는 대신 3번만 먹자 했다. 어차피 아침은 안 먹으니까, 점심, 간식, 저녁 이렇게 먹자고... 


전부 한주먹씩 양은 얼마 안 되지만, 아홉 가지를 다 하려니 시간이 꽤 많이 걸렸다. 손이 많이 가는 일이다 보니 남편이 뭘 도우랴고 계속 물어봤다. 하지만 내가 이거 하는 동안 남편은, 빨래하고 청소기 돌리고 집안일 다 맡아하는데, 내가 이걸로 엄살을 부릴 수는 없지 않겠는가! 그래도 내 일 손을 덜라고, 김은 남편이 구웠다.


오전 내내 종종거려서 겨우 한 접시 나오는 한식의 위용


이렇게 우리 집의 점심과 저녁은 같은 메뉴로 완성되었다. 종종거려 나물을 아홉 가지나 준비했는데 달랑 한 접시 나오는 상이라니! 백김치랑 김 구워도 여전히 썰렁하니 남편 좋아하는 청국장 하나 끓여서 얹었다. 


남편은 조심스레 하나씩 맛을 보며 차이를 느껴보려 애를 썼다. 일 년에 딱 한번 먹으니 매번 새로운 느낌인 것 같다. 엄청나게 많은 일은 하는 것이 인상적이고, 그렇게 해서 각기 다른 맛이 나는 아홉까지를 다 진열해 놓고 먹는 것은 그에게 상당히 이국적인 기분을 느끼게 해 준다.


뭐가 제일 맛있냐는 말에, 하나를 딱 집어내지는 못했지만, 고유의 맛으로 각각 다 맛있다고 말해줬다. 오곡밥도 정말 속이 든든하다며 한 그릇을 다 먹었다. 사실 서양인들이 먹기 가장 힘든 것 중 하나가 찰진 음식인데, 그래도 퍼준 밥을 남김없이 먹었다. 


자기가 구운 김을 흐뭇해하며 싸 먹기도 하고, 백김치 잎으로 쌈으로 먹기도 했다. 아무렴, 복쌈을 먹어야지. 더위를 남편에게 팔기는 미안하니, 나한테 팔라고 가르쳐줬다. 나는 원래 더위 안 타는 사람이 좀 받아주지 뭐.


사실 뭘 꼭 먹고 싶은 것보다는, 이걸 이렇게 요리조리 만들고, 함께 먹고, 함께 명절을 즐기는 것, 아마 그것이 내가 정말 하고 싶은 것이었던 것 같다. 그리고 남편도 그런 내 모습을 보며 흐뭇했던 것이고...


식사를 준비하는 중에 딸에게 전화가 왔길래, 오늘 보름이니 달 보고 빌라고 말해줬다. 음식 하는 소리가 맛있게 들린다며 메뉴를 묻는다. 미안해서 말 못 하겠다 했더니 막 웃는 딸. 미안하지 말라며, 맛있게 많이 드세요 하길래, 다음 방학 때 오면 꼭 해주마고 약속했다. 맛있는 것을 먹으면 자식이 꼭 걸린다.


마지막에 달 보고 소원까지 빌어야 마무리가 되는데 아무래도 오늘 밤은 틀린 것 같다. 잔뜩 찌푸리더니 결국 비가 오네. 그래도 괜찮다. 부럼은 깨뜨렸으니... 흉내만 내는 명절이지만, 그래도 이렇게 할 수 있으니 좋다. 아마 내년에도 후년에도 갖은 엄살 다 부린 후에 또 한 상 차릴 것이다. 



레시피는 작년에 올렸으니 생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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