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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라슈에뜨 La Chouette Aug 11. 2023

생존에서 호사로 변해버린 개념

삶을 대하는 방식의 차이에서 오는 변화

한국은 무더위를 지나 태풍이 몰아친다는데, 캐나다 밴쿠버는 가물고 뜨거운 날씨가 연일 이어지고 있다. 8월 초순 들어서는 비상사태 2단계로 들어가서, 더 이상 잔디에 물을 주지 말라는 규정이 나왔다. 화단에 스프링클러로 물 주는 시간도 아침 5시부터 9시까지. (늦잠꾸러기는 어쩌라고?)


아무튼 그럴수록 정원에는 일거리도 많고, 물도 더 필요하다. 이틀만 물 주기를 걸러도 금세 바삭하게 말라버리는 텃밭과 화단들은 포기를 할 수가 없다. 우리는 정원에도 싱크대가 있는데, 사용된 물은 양동이로 내려가게 되어있어서 물을 화단에 재활용한다.


7월 말에 두 주일 간 집을 비웠다. 돌아와서 보니 정원의 느낌도 확 달라졌다. 수확의 시즌이 시작된 것이다. 수확이란, 물론 먹거리 수확을 말하기도 한다. 오이도 본격적으로 달리기 시작했고, 고추도 잔뜩 매달려 따기 바쁘다. 호박도 종류별로 맺혀있고, 토마토도 드디어 붉은색을 띠어서 먹을 수 있게 되었다.


꽈리고추와 아삭이 고추만 땄는데 이만큼!


그런데 즉석에서 먹는 이런 채소 말고도, 씨앗의 수확도 시작되었다. 마당에 키우는 꽃들이나 잎채소들의 씨앗도 시기를 놓치지 않고 거둬들여야 내년에 또 씨를 심을 수가 있다.


면사포처럼 예쁘게 피었던 고수가 시들면서 한 달 만에 씨앗이 맺혔다


고수를 심어서 잎을 먹고 있었는데, 어느덧 꽃이 피더니 깨알 같은 씨가 잔뜩 달려서 그것도 수확을 했다. 다소 일이 더디지만 이렇게 모아보니, 한 그루에서 나온 것만으로도 마트에서 파는 양념병에 가득 차고 넘칠 만큼의 코리앤더가 준비되었다. 유기농이라고 해도 한 병에 만원도 안 할 테니, 씨 모으는 인건비도 안 나오겠지만, 그래도 모아놓고 보니 뿌듯했다.


또 다른 수확은, 심지도 않은 잡초, 블랙베리가 있다. 뒤마당 바깥쪽으로 이어지는 야산에 딸린 블랙베리는 우리 뒷마당도 수시로 침범한다. 열악한 환경에서도 잘 자라는 블랙베리. 베어 내고, 뽑아 내도 꾸준히 올라오는 불청객이지만, 이 계절이 되어 열매를 한가득 달고 나를 유혹하면, 나는 어느새 통을 들고 블랙베리 앞에 서있다.



장미와 같은 식구인 블랙베리는 가시도 아주 세다. 따면서 수도 없이 찔리고 긁히는데, 그래도 요령이 생겨서 이젠 잘 피하는 편이다. 까맣게 익은 것을 따는데, 만일 잘 안 떨어지려고 하면 그건 아직 덜 익었다는 증거이므로 억지로 잡아 뜯어봐야 시기만 하고 맛은 없다.


그렇게 한 시간 정도 따면, 통에 반 정도 차는데, 대략 1킬로 정도 된다. 그렇게 사나흘에 한 번씩 따 모았더니 어느새 4킬로 정도가 되었다. 매번 식초물에 씻어서 냉동해 두었던 것을 어제는 모두 들통에 쏟아 넣고 끓여서 시럽을 만들었다.


너무 많아 다 들어가지도 않다가, 어느 정도 끓으면서 주저 앉은 다음에 나머지도 비로소 쏟아 넣을 수 있었다.
냉동하려고 위쪽에 넉넉히 여유분을 뒀다


조금씩 하면 덜 힘들 것을, 귀찮다고 한꺼번에 하니 시간도 오래 걸리고 체망에 거르는 것도 힘이 들었다. 밤중에 시작하는 바람에, 거른 후 다시 졸이느라 오늘까지 일이 이어졌다. 그렇게 해서 넉넉히 완성.


설탕 듬뿍 넣은 시럽이 아니어서 상하기 쉬우니 냉동고에 보관하면서 하나씩 꺼내 먹기로 했다. 모두 3리터, 총 14병이 나왔다. 한 달에 하나씩 꺼내 먹어도 일 년이 넘게 먹네! 그냥 뿌듯하다.


저녁 식사 후에 남편이 디저트를 찾길래 아이스크림 먹을까 하면서, 쑥 젤라토를 꺼내 왔다. 생크림 휘핑이 귀찮아서 오늘 만든 블랙베리 잼을 같이 담으니, 세상 부러울 것이 없는 맛이다. 집에서 키운 쑥과 마당에서 딴 블랙베리... 입 안에서 럭셔리하게 녹아든다.


블랙베리 스마일


즐겁게 음미하던 남편이 말을 꺼냈다.


"이거 너무 멋지지 않아? 직접 키워서, 따고, 손질하고, 만들어서 이렇게 먹는 거... 정말 호사스러운 기분이야. 그런데, 그 생각을 했어. 이게 옛날에는 생존(necessity)을 위한 행위였는데, 이제 우리에겐 사치스러운(luxury) 일이 되어 버렸네."


그랬다. 옛날에는 먹고살기 위해서 했던 행동들이 이제는 선택에 의해서 이루어지고, 럭셔리하다는 기분을 느낀다.


옛날엔 이렇게 저장하지 않으면 겨울에 먹을 것이 없었다. 여름동안 농사 지어 모으고, 갈무리하고, 그걸 겨우내 먹었는데... 또한 닭을 키우고, 염소를 키우던 일을 회상하며 남편이 옛 생각에 잠겨 들었다.


이제는 이런 먹거리가 호사스러운 선택이 되고, 먹으면서 극한 행복을 느끼는 그런 것이 되었다니, 참으로 격세지감이다. 마트에만 가면 모든 음식을 쉽게 사 먹을 수 있는 세상에서, 유기농 작물을 길러서 신선하게 따먹고, 첨가물이 전혀 들어가지 않은 저장식품을 만들어 먹는 것, 이런 것들이 우리에게 주어진 축복이라 생각하며 감사한다.


내일은 또 마당에서 무슨 일을 하려나? 가을 수확을 위한 씨를 또 뿌리고, 잎을 정리하고, 물을 주고, 잡초를 뽑겠지. 사슴을 쫓고, 호박을 수정시키고 말이다,  너무나 사치스럽게!


내 고구마 순 먹지 마!

블랙베리 시럽 만들기 레시피는 예전의 브런치북에서 참고 :


쑥 아이스크림 만들기는 최근 글 참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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