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존감 회복의 약속
보육원 아이의 눈을 들여다보던 순간, 나는 내 안의 여덟 살 아이를 만났다.
"아저씨도 부모님이 없어요?"
열 살쯤 되어 보이는 남자아이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다른 봉사자들과 달리 나는 아이들과 금세 친해졌고, 그들은 본능적으로 뭔가를 알아챘다.
"응, 나도 비슷해. 난 새엄마가 열 번 바뀌었어. 장난 아니지?"
아이의 눈이 커졌다. 경계와 호기심, 그리고 묘한 안도감이 섞인 눈빛이었다.
그날부터 나는 정기적으로 보육원을 찾았다. 아이들에게 내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밀크캐러멜과
함께 사라진 어머니, 칼을 든 아버지, 눈밭으로의 도주. 평범한 사람들에게는 충격적인 이야기지만, 이 아이들에게는 '아, 나만 그런 게 아니구나'라는 위로가 되는 이야기였다.
"아저씨는 씩씩해서 그렇게 안 보여요.”
한 아이가 궁금한 듯 말했다. 나는 잠시 생각했다. 정말 나는 어떻게 여기까지 왔을까?
"너희들이 지금 느끼는 그 마음, 버려졌다는 그 마음 나도 조금은 알아. 근데 있잖아..."
나는 아이들을 둘러보며 말했다.
"엄마가 널 버렸어도, 너는 너를 버리지 마."
순간 내 목이 메었다. 이 말은 아이들에게 하는 말이면서 동시에 내게 하는 말이었다. 수십 년 동안 나는 나를 버리고 있었다. 어머니가 나를 버린 것보다 더 잔인하게, 나는 매일 나를 버렸다.
"아빠가 널 때렸어도, 너는 너를 때리지 마."
그리고 깨달았다. 나는 아버지가 나를 때린 것보다 더 많이 나를 때렸다는 것을.
자책과 자학으로, 술과 자해로.
아이들과 시간을 보내면서 신기한 일이 일어났다. 그들에게 해주는 위로의 말들이 부메랑처럼 내게 돌아왔다. 그들의 상처를 어루만지면서 내 상처가 치유되었다.
그들에게 "넌 정말 소중한 사람이야"라고 말하면서 처음으로 '나도 소중하구나'라고 느꼈다.
심리학자 크리스틴 네프(Kristin Neff)는 자기 연민(self-compassion)을 세 가지 요소로 설명한다. 자기 친절(self-kindness), 공통된 인간성(common humanity), 그리고 마음 챙김(mindfulness).
내가 보육원 아이들과 나눈 경험은 정확히 이 세 가지를 포함하고 있었다. 그들에게 친절을 베풀면서 나 자신에게도 친절해지는 법을 배웠고, 그들과 같은 상처를 공유하면서 나만 특별히 불행한 게 아님을 알았으며, 현재의 순간에 집중하면서 과거의 상처에 매몰되지 않는 법을 익혔다.
네프는 자기 연민이 자존감(self-esteem)과 다르다고 강조한다. 자존감은 종종 다른 사람과의 비교나 성취를 통해 형성되지만, 자기 연민은 실패하고 부족할 때조차도 자신을 따뜻하게 대하는 것이다.
"난 망했어"가 아니라 "인간은 누구나 실패해. 괜찮아."
"난 최악이야"가 아니라 "지금은 힘든 시간을 겪고 있어. 이것도 지나갈 거야."
칼 구스타프 융은 '상처받은 치유자(wounded healer)'라는 개념을 제시했다.
그리스 신화의 케이론처럼, 자신의 상처를 통해 다른 사람을 치유하는 존재.
보육원에서의 경험이 바로 그랬다. 내 상처가 아이들의 마음을 여는 열쇠가 되었다.
"아저씨도 그랬어요?"라는 아이들의 물음에
"응, 나도 그랬어"라고 답할 수 있는 것. 그것이 그 어떤 위로의 말보다 강력했다.
심리학자 어빈 얄롬(Irvin Yalom)은 이를 '보편성(universality)'이라고 불렀다. 나만 겪는 고통이 아니라는 깨달음이 주는 치유의 힘. 보육원 아이들과 나는 서로에게 그런 존재였다.
그 시절, 나는 성공에 대한 강박에 시달렸다.
'이런 환경에서 자란 사람이니까 더 대단해져야 해.'
'상처를 극복한 사람이니까 더 멋져야 해.'
하지만 아이들은 내게 다른 것을 가르쳐주었다. 그들은 내가 대단해서가 아니라, 같은 아픔을 가졌기 때문에 나를 신뢰했다. 내가 성공해서가 아니라, 살아남았기 때문에 희망을 얻었다.
심리학자 도널드 위니콧(Donald Winnicott)은 '충분히 좋은 어머니(good enough mother)'라는 개념을 제시했다. 완벽한 어머니가 아니라 충분히 좋은 어머니. 이는 삶의 모든 영역에 적용될 수 있다.
충분히 좋은 나.
충분히 괜찮은 삶.
충분히 의미 있는 하루.
이 '충분함'을 받아들이는 순간, 역설적으로 더 많은 것이 가능해졌다. 실패해도 괜찮았고, 그래서 더 많이 도전할 수 있었다. 완벽하지 않아도 괜찮았고, 그래서 더 진실할 수 있었다.
자존감 회복은 거창한 사건이 아니라 일상의 작은 실천들로 이루어졌다.
강연이 망했을 때 : "강연이 망한 거지, 내 인생이 망한 게 아니야."
시험에 떨어졌을 때 : "시험을 못 본 거지, 내가 못난 게 아니야."
관계가 끝났을 때 : "이 관계가 끝난 거지, 내가 사랑받을 수 없는 게 아니야."
심리학에서는 이를 '탈융합(defusion)'이라고 부른다. 생각이나 감정, 상황과 자신을 분리하는 것. "나는 실패자야"가 아니라 "나는 지금 실패했다는 생각을 하고 있어."
이런 분리는 삶에 숨 쉴 공간을 만들어주었다. 모든 것이 나를 규정하지 않았다.
나는 내 상처보다 크고, 내 실패보다 크고, 내 과거보다 컸다.
자존감이 회복되면서 가장 크게 바뀐 것은 관계를 대하는 태도였다.
예전에는 '이 사람이 아니면 안 돼'라는 집착이 있었다. 버려진 상처 때문인지, 한 번 맺은 관계를 놓기가 어려웠다. 설령 그 관계가 나를 아프게 해도.
하지만 이제는 다르다. 모든 관계는 선택이다. 머물 수도 있고 떠날 수도 있다.
누군가 나를 떠난다고 해서 내가 버려지는 게 아니다. 그저 그 관계가 끝날뿐이다.
정신분석가 하인츠 코헛(Heinz Kohut)은 건강한 자기애(healthy narcissism)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이는 병적인 나르시시즘이 아니라, 자신의 가치와 한계를 현실적으로 인식하는 능력이다.
"나는 사랑받을 만하지만, 모든 사람에게 사랑받을 필요는 없다."
"나는 소중하지만, 나를 소중히 여기지 않는 사람과 함께할 의무는 없다."
이제 나는 내 상처를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그것은 내가 살아남았다는 증거이고, 내가 강하다는 증명이며, 내가 특별한 이유다.
철학자 니체는 "나를 죽이지 못하는 것은 나를 더 강하게 만든다"라고 했다. 하지만 나는 조금 다르게 말하고 싶다.
"나를 죽이지 못한 것은 나를 더 부드럽게 만들었다."
강함이 아니라 부드러움. 무감각이 아니라 민감함. 방어가 아니라 개방. 이것이 진정한 치유의 모습이었다.
매일 아침, 나는 더 이상 거울을 보며 격려하지 않는다. 그럴 필요가 없어졌다. 대신 그냥 나를 본다. 상처도 있고, 주름도 있고, 실패의 흔적도 있는 그 얼굴을. 그리고 생각한다.
'이 정도면 충분해. 더 잘하지 않아도 괜찮아.'
보육원 아이들이 편지를 보내왔다. 삐뚤빼뚤한 글씨로 쓴 짧은 편지.
"아저씨, 저도 저를 안 버릴게요.”
”아저씨도 열심히 사세요.”
“다음에 또 놀러 오세요.”
눈물이 났다. 내가 그 아이에게 준 것보다 그 아이가 내게 준 것이 더 많았다. 우리는 서로의 상처받은 치유자였다. 열심히 살라니. 귀엽다.
자존감이란 대단한 무언가가 아니었다.
그저 매일, 매 순간, 나를 버리지 않겠다는 조용한 약속이었다. 그
리고 그 약속을 지키는 것. 넘어져도, 실패해도, 다시 일어서는 것.
오늘도 나는 나를 버리지 않는다. 그것으로 충분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