힐링된 느낌이라는 건 존재하지 않는다.
"괜찮습니다."
"지금까지 잘 살아왔습니다."
"당신이면 충분합니다."
물론 좋은 말이고 맞는 말이다. 이런 류의 힐링의 메시지들이 가득하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우리 사회는 여전하고 정작 내 삶도 그렇게 힐링되지 않았다. 왜 그럴까? 그 메시지들이 문제일까? 그렇지는 않다. 그냥 그런 메시지를 듣는 자체가 좋은 것이다. 마음도 편안해지고, 가끔씩 다가오는 유머도 재미있다. 그래서 그런 강연들을 찾아 듣고, 그런 책을 찾아서 읽는다. 감동도 받고, 눈물도 종종 흘린다. 나도 정말 그런 강연을 찾아서 듣고, 방송에서도 듣고, 실제 찾아가기도 했다. 그렇게 사람들은 내 삶이 괜찮다고 생각하고, 또 삶의 의미에 대해서 고민하기도 한다. 어렵고 힘들고 상처받았던 일도 그런 위로와 힐리의 메시지를 통해서 많이 위로가 된다. 하지만 딱 거기까지다. 그렇게 생각만 하고 느낌만 가지고 끝이라는 거다. 너무 비관적이라고 생각하는가?
삶이 진짜 괜찮고, 나 자체만으로도, 그냥 존재만으로도 충분하려면 느낌만 가지고는 곤란하다. 힐링된 느낌이라는 건 존재하지 않는다. 힐링은 느낌이 아니라 변화다. 변화 없이 변화된 느낌이 있다고 해서 다 된 걸까? 그렇기 때문에 삶이 여전한 거다. 그래서 이 사회가 여전한 거다. 느낌만으로 취해서 행동하지 않고 변화를 위한 노력을 하지 않아서 그냥 그대로인 거다. 왜 그럴까? 행동에는 대가가 따르고 변화에는 고통이 따르기 때문이다. 그런 건 싫은 거다. 좋은 말을 듣고 위로의 느낌 속에 있는 것은 얼마든지 좋지만 실제로 맞닥뜨리는 것은 싫은 거다. 앉아서 강연을 들으면서 눈물을 쏟는 것으로 내가 처한 어려운 상황들과 감정들이 모두 해결될 수 있는 충분한 조건이 되었으면 한다. 하지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기분 좋고, 편안해지면 되는 거지, 왜 그래? 뭘 더 바라는 거야? 너무 하는 거 아냐?"
"그냥 다른 사람들 잘되는 것이 배 아파서 그러는 거야."
라고 여길 수도 있겠다.
상관없다. 어쩌면 그런지도 모르겠다.
"좋은 게 좋은 거다."
라는 말은 세상에서 제일 비겁한 말이다. 그 말을 하는 것 자체가 이미 상황에 대한 부정적이든 아쉬움이든 존재한다는 말이다. 조금은 아쉽고 부족하고 못마땅한 것이 있지만 그냥 넘어가자는 의미가 포함된 것이다. 그래서 진심과 다른 표정들을 겉으로 드러낸다. 마치 자신이 평화주의자까지는 되지 않더라도 선한 사람 정도는 되는 것처럼 말이다. 꽉 막힌 사람이거나 상황을 불편하게 만드는 삐딱한 사람이 아니라고 증명하는 것처럼. 하지만 그런 생각과 표정과 반응이 실제로 처한 어려운 상황과 현실들을 해결해 주지 않는다. 그런 것처럼 보이는 것일 뿐이다. 겉으로만 평화로우면 괜찮은 것은 전형적으로 속는 삶의 형태다.
"그걸 누가 모르냐?"
라는 말은 세상에서 제일 게으른 말이다. 차라리 그럴 모르는 게 낫다. 말 자체에 <나도 그쯤은 다 알고 있다>가 포함된 말이다. 모르면서 안 하는 것은 납득이 되지만 알면서도 하지 않는 것은 정말 게으른 것이다. 힐링의 메시지나 감동의 메시지도 좋고, 착하고 감동 있는 에피소드들을 펼쳐 놓는 것은 정말 좋다. 하지만 거기서 끝난다. 당연하게 메신저의 문제는 아니다.
그러고 나서 삶의 변화나 상황과 사회의 변화, 현실과 형편의 변화가 없으면 비관하고 비난한다. 세상은 불공평한 것이라고 비난하고, 내 마음을 아무도 몰라준다고 비난한다. 사실 세상은 원래 불공평하고 내 마음은 이 세상 그 누구도 모르는 것이 정상이다. 그 속에서 내가 어떻게 살아내느냐가 진짜 힐링, 진짜 회복의 시작인 거다. 위로는 누군가 어깨를 토닥거리면서 괜찮다고 해야 되는 것이 아니다. 나 스스로 그럼에도 살아내겠다고 자리에서 일어설 때 시작되는 거다. 위로가 된 느낌을 갖는 것은 일종의 환상이자 착각이자 신기루일 뿐이다. 자기 스스로 자기 자신을 속이는 거다. 느낌으로 치유되고 회복되는 것은 가짜다. 그러니 당신의 삶이 바뀌길 바란다면, 정말 위로받고 회복되길 바란다면 나 좀 봐달라고 응석을 부릴 것이 아니라 털어내고 일어서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