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 허세다
난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사람을 제법 알아본다고 생각했다. 꼼수 부리는 사람, 진실하지 못한 사람, 요령 피우는 사람을 구분할 줄 안다고 자부했다.
누가 나에게 필요한 사람인지, 누가 신뢰할 만한지도 꽤 잘 파악한다고 믿었다.
하지만 완전히 착각이었다.
오늘 만난 한 사람이 내 오만함을 깨뜨렸다.
그는 나보다 훨씬 젊은 사람이다. 처음 그의 아내와 함께 만났을 때, 그는 말이 없었다.
아내가 대화를 주도했고, 그는 조용히 듣기만 했다. 나중에 그가 장인, 장모와 함께 있는 모습을 봤을 때는 더욱 그랬다. 주눅 들어 보였고, 기가 죽어 있는 것 같았다.
마른 체형에 선한 인상. 전형적인 '유약한 사람'의 이미지였다. 자기표현에 서툴고, 자존감도 낮을 거라고 단정했다. 살이 더 빠진 모습을 보며 '스트레스가 많은가 보다' 하고 동정하기까지 했다.
그런데 오늘, 단둘이 만났을 때 전혀 다른 사람을 발견했다.
그는 명확한 비전을 가지고 있었다. 하고 싶은 일이 분명했고, 큰 그림을 그릴 줄 알았다.
무엇보다 눈빛에 야망이 가득했다. 한마디로 "So cool", 정말 멋있었다.
그제야 깨달았다. 그는 유약한 게 아니라 겸손했던 것이다.
주눅 든 게 아니라 상대를 배려하고 있었던 것이다.
심리학자 에드워드 존스(Edward Jones)는 '대응 편향(Correspondence Bias)'을 지적했다. 우리는 타인의 행동을 볼 때 상황적 요인은 무시하고 그 사람의 성격 탓으로 돌리는 경향이 있다는 것이다.
조용한 사람을 보면 '소심하다'라고 단정하지, '지금 이 상황에서는 듣는 것이 적절하다고 판단했구나'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게슈탈트 심리학의 '지각의 법칙'도 이를 설명한다. 우리는 부분적 정보를 가지고 전체를 추측한다. 몇 번의 만남, 특정 상황에서의 모습만으로 그 사람 전체를 안다고 착각한다.
큰 목소리로 말하는 사람을 보면 '성격이 급하다'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열정이 넘친다'라고 볼 수도 있다. 일을 빨리 처리하는 사람을 '성급하다'라고 볼 수도, '추진력이 있다'라고 볼 수도 있다. 뚱뚱한 사람을 '게으르다'라고 단정할 수도, '넉넉하고 여유롭다'라고 볼 수도 있다.
사회심리학자 솔로몬 아쉬(Solomon Asch)의 '인상 형성 실험'은 흥미롭다. 같은 사람을 설명하는 형용사의 순서만 바꿔도 전혀 다른 인상을 받는다는 것이다. "지적이고 근면하지만 차가운" 사람과 "차갑지만 지적이고 근면한" 사람은 완전히 다른 이미지로 다가온다.
이는 나 자신을 볼 때도 마찬가지다.
거울을 보며 코만 뚫어지게 쳐다보면 코가 이상하게 보인다. 블랙헤드가 유독 도드라져 보인다.
귀만 집중해서 보면 귀가 못생겨 보이고, 점점 커지는 것 같다. 우리가 집중하는 것이 우리의 인식을 지배한다.
심리학자 대니얼 카너먼(Daniel Kahneman)은
"우리가 보는 것이 전부(WYSIATI: What You See Is All There Is)"라는 인지적 오류를 지적했다.
제한된 정보만으로 성급한 판단을 내리고, 그것이 전부인 양 확신한다는 것이다.
내 아이는 세상에서 가장 예쁘지만, 남의 아이는 그저 그렇다.
내가 열정적으로 아이 사진을 보여줘도 친구들의 반응은 시큰둥하다.
하지만 그들이 자기 아이 이야기를 할 때는 눈빛이 반짝인다.
노자는 "아는 사람은 말하지 않고, 말하는 사람은 알지 못한다"라고 했다.
사람을 안다고 자신하는 순간, 우리는 이미 그 사람을 모르고 있는 것이다.
작가 앙드레 지드(André Gide)의 말이 떠오른다.
"나를 판단하지 말라. 왜냐하면 당신은 내 영혼이 걸어온 길을 모르기 때문이다."
사람을 볼 줄 안다는 건, 사실 허세다. 진짜 지혜는 '나는 사람을 모른다'는 것을 아는 것이다.
그래서 오늘도 나는 다짐한다. 속단하지 말자. 단정 짓지 말자.
모든 사람은 내가 아직 발견하지 못한 우주를 품고 있다.
그 겸손한 청년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