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한정선 Nov 05. 2021

가을의 통과의례.. 단풍 그리기.

바야흐로 단풍의 계절이다.

단풍을 만나러 나선 길에 슬그머니 욕심이 발동, 주섬주섬 그림도구를 챙겼다.

산책도 하고 그림도 그리고, 야무진(?) 생각에 스스로 흐뭇해하며.

그러나 단풍 그리기는 말처럼 쉬운 것은 아니다. 내가 경험한 바로는 잘해야 본전이다.   

기분 좀 내다보면 울긋불긋 이발소 그림이 되고 차분하게 분위기 좀 잡다 보면 퇴색한 낙엽송이 되기 십상이다.

어설픈 목수가 연장 탓한다고, 이럴 때는 햇샤워 중인 단풍을 표현할 안료를 찾을 수 없다며 -누가 뭐라 하지도 않았는데- 재료 탓을 하기도 한다

그냥 보기만 할까? 잠시의 망설임은 그 화려하고 오묘한 색감의 유혹에 묻혀버리고 가을의 통과의례라는 핑계를 대며 기어이 단풍을 그린다.

봄이 오면 꽃을 그리고, 여름에는 숲을 그리듯이 가을에는 어쨌든 단풍을 그려줘야 할 것 같은 의무감 같은 것. 어차피 이맘때는 단풍을 빼고는 그릴 것도 논할 것도 없다.

작년의 단풍과 올해의 단풍이 다르듯, 작년과 올해의 내 그림도 다르겠지 살짝 기대도 하고, 모네도 지베르니 정원의 수련을 수없이 많이 그렸다는 말도 안 되는 비교도 하면서 또다시 단풍을 그린다.

가을이니까.. 이 한마디는 많은 것을 이해하게 한다.



“시작(時作)은 머리로 하는 것이 아니고 심장으로 하는 것도 아니고 몸으로 하는 것이다.”

단풍구경에 그림까지 욕심껏 그리고 온몸이 물적신 솜이 되어 돌아오는 길, 김수영의 이 말이 갑자기 떠올랐다. 이 문장에서 ''대 신 '그림'을 대입하면 시쳇말로 딱 ‘내 말이~’ 된다.

물론 그림 대신 음악, 무용, 연기 등을 넣는다면 그 분야의 작가들 또한 제각각 '내 말이~'를 외칠 것이다.

이유는 몸이라는 공통분모, 내가 가장 아끼고 사랑하는 몸을 써서 하는 무언가는, 물리적 사랑을 능가하는 무언가를 충족시켜 주기 때문이다. 하는 것보다 안 하는 것이 더 힘든, 이율배반적 이게도 안 하면 도리어 몸이 아픈, 고통스러운 사랑을 전제조건으로 한다.

그런 이유로, 내 몸이 이렇게 피곤한 것은 온몸으로 그림을 그린 증거라고 자문자답하고, 두 마리 토끼 잡기에 한눈을 파느라 부실해진 작품을 ‘절반의 성공’이라며 자화자찬까지 곁들이니, 돌아오는 발걸음이 한결 가벼워진다.

가을이니까..로 애써 머쓱함을 마무리한다.


    

생각과 달리 도심의 단풍은 아직 진행 중이었다.

단풍 반 초록 반,  떠나지 못하고 서성이는 여름과 매몰차게 내쫓지 못하는 가을이 섞여 엉거주춤 또 하나의 계절을 만들고 있었다.

가을 소슬바람은 여름색 가을색 가리지 않고 골고루 불어주고, 길가에는 초록빛 잎사귀와 낙엽이 섞여있다.

다시 돌아오지 않을 지금 이맘때, 무언가를  갈구할 필요도 아쉬워할 필요도 없이, 더도 덜도 없이 눈앞의 풍경을 즐긴다.

어차피 11월은 매일매일 옷을 갈아입는 멋쟁이 달.

단풍은 런웨이의 모델이다.

작가의 이전글 가깝고도 먼 인천, 1박 2일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