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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쁨공식> 김인강 교수에게 배우는 인생

by Lanie

시부모님께서 사시던 집, 그러니까 남편의 본가로 이사와 남겨진 책들을 정리하다가 <기쁨공식>이라는 책을 발견했다. (나중에 알고 보니 우리 엄마가 남편에게 선물했던 책이었다.) 애용하던 학교 도서관과는 멀어졌지만 집에는 이미 읽을 책이 충분했다. 당분간은 집에 있는 책이나 다 읽어야겠다.


읽어야겠다고 생각한 책은 한 더미였지만 그중에서도 이 <기쁨공식>이라는 책을 가장 먼저 집어든 것은, 나는 요즘에 기쁨으로 사는 것에 대해 관심을 많이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사실 결혼 전에는, 그러니까 20대 싱글일 때에는 기쁨 자체가 삶의 목적이나 목표가 되지는 못했다. 그러나 결혼을 하고, 출산을 하고, 가정생활이라는 것을 하면서 삶이란 무엇인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에 대한 답은 재정립되었고 그 답은 간단히 말해서 결국에 우리는 기쁨을 추구하고, 매사에 기뻐하며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신의 허락이자 명령이기도 하다.


빌립보서 4:4 -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
데살로니가전서 5:16 - "항상 기뻐하라"


나는 이 책의 제목만 보고 이것이 누군가의 자서전인 줄은 몰랐다. 그러나 책을 펴보니 이 책은 김인강 교수의 자서전이었다. 김인강 교수는 자신의 인생 전체를 한 권의 책으로 펴내면서 그 제목에 기쁨이라는 키워드를 붙였다. 김인강 교수 역시 자신의 삶을 기쁨으로 살아냈고, 또한 마땅히 그래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이리라.


그렇다면 그 공식은 무엇일까? 어떤 방법을 통해서 우리는 삶을 기쁨으로 살아낼 수 있을까? 나는 그 답을 5가지로 추려볼 수 있었다.




첫째, 누군가를 위해 희생하는 삶도 가치 있다.


누군가를 위해 희생하는 인생도 값지다. 어쩌면 이 사회에서 주목받고 빛나는 한 사람이 탄생하려면 그를 돌보기 위한 수십 명의 사람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요즘은 돌봄의 가치가 매우 평가절하되고 있다. 누군가 타인을 위해 희생하는 삶을 자처한다면 우리는 그 사람을 쉽게 "호구"라고 손가락질할지 모른다. 혹은 "그러지 말고 네 인생을 살아라"라고 값싼 조언을 할지 모른다. 그래서 요즘 사람들은 각자 자기 인생을 빛내기 위해 애쓰는 것 같다. 각 가정의 어머니들에게 남편이나 자식한테 희생하지 말라고 한다. 자식이 자식을 낳아도 괜히 황혼육아의 길에 들어서지 말라고 한다. 고생만 하고 알아주는 사람 없을 거라고 경고한다. 그 결과는 어떠한가? 나 또한 돌봄 받지 못하고 모든 것을 스스로 해결해야 하게 된다. 그러다 보니 각자의 삶은 버거워지고 번아웃과 우울에 빠지게 된다. 그러나 김인강 교수는 희생의 삶의 가치를 간파하고 깊이 인정한다.


어머니의 돌봄과 희생

하루의 고됨으로 모두 코를 골며 곯아떨어진 한밤중에도 어머니는 쉬지 못하셨다. 밀린 빨래와 설거지, 다음 날 식사 준비로 새벽이 가까워서야 겨우 토막잠을 청하셨다.

이 짧은 문장 속에 한 어머니의 삶 전체가 담겨 있다. 가족들이 모두 잠든 후에도 계속되는 노동, 토막잠으로 버티는 일상. 이런 희생은 눈에 보이지 않기에 쉽게 잊힌다. 하지만 누군가의 성공과 행복 뒤에는 언제나 이런 보이지 않는 돌봄이 있다.


누나의 돌봄과 희생

(재활원 시절) 둘째 누나는 한 달에 몇 번씩 나를 자취방으로 데리고 가서 목욕시키고 빨래해 주고 내가 좋아하는 콩나물지짐이를 해주었다. 남들은 놀러 가고 자기 발전을 위하여 시간을 쓸 때 누나는 동생들을 위하여 없는 시간을 쪼개고 자신을 희생했다. 내 빨래와 뒤치다꺼리를 하느라 일주일에 한 번 쉬는 일요일마저 포기하고 나를 돌봐주었다.
누나는 결혼 후에도 내 뒷바라지를 위해 서울로 오신 어머니를 대신해 아버지와 남은 동생들을 거두어주었다. 묵묵히 가족들을 위해 희생하는 누나에게 항상 미안한 마음을 금할 길이 없었다. 어려운 가정환경을 탓하지도 않고 자기에게 맡겨진 가족들의 짐을 마다하지 않고 대신 져주었던 누나. 그 희생에 머리 숙인다.

젊은 시절 자신을 위해 써야 할 시간을, 에너지를, 꿈을 가족을 위해 내어 준 누나. 김인강 교수는 이 희생을 단순히 '당연한 것'으로 치부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는 자신의 성공이 이런 희생 위에 세워진 것임을 분명히 인정하고, 누나의 인생을 자신의 인생만큼이나 가치 있는 것으로 높인다.


둘째, 어린 시절과 성장 과정에 필요한 것은 삶의 여백과 생각할 시간이다. 공부도 마찬가지이다.


서울대를 나오고, 버클리 유학을 거쳐 카이스트, 서울대, 고등과학원 교수를 지낸 김인강 교수는 자신의 어린 시절, 사춘기 시절, 그리고 어떻게 공부했는지를 아래와 같이 회상한다. 그는 과외 한 번 받아본 적 없고, 엄마와 누나의 돌봄은 받았지만 닦달당하지는 않았다. 이는 요즘 자녀에게 어떤 환경을 마련해 줄까, 어떤 경험을 더 시켜줄까, 무엇으로 자녀의 스케줄을 꽉꽉 채워줄까 고민하는 부모들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고, 그간 교육학 공부를 하면서도 느껴온 바와도 일치한다.


어린 시절과 성장 과정

나는 열한 살이 될 때까지 집에 머물러 있어야 했다. 무료함을 달래기 위해 집안일을 거들었다. 담배 잎 꼭지도 짓고 콩나물 콩도 고르고 불도 땠다. 아무도 가르쳐주지 않았지만 어깨너머로 한글을 뗐고 혼자서 익힌 계산은 제법 속도가 빨랐다. 집안 살림을 돕느라 공부할 시간이 없는 작은누나의 산수 숙제, 그림 그리기, 글쓰기, 만들기는 내가 도맡았다.
하루 종일 라디오를 들으며 남진, 나훈아 노래를 따라 불렀더니 저절로 음감이 발달했다. 신곡이 나오면 한두 번 듣고 그대로 따라 불러 누나들을 즐겁게 해 주었다. 중학교에 다니던 누나가 영어 단어를 외우면 옆에서 나도 같이 외웠다.
낮에 혼자 집에 있으면 형, 누나들이 읽던 책들을 닥치는 대로 읽었다.... (중략)... 무슨 의미인지 몰랐지만 여러 별들을 여행했던 어린 왕자처럼 나도 이곳에도 가고 저곳에도 가는 꿈을 꾸었다. 하지만 내게 주어진 세상은 외딴집과 과수원 그리고 밭, 그것이 전부였다.

학원도 과외도, 시야 확장을 위한 해외여행은커녕 국내여행도 없었지만 그는 스스로 배웠다. 무료함이라는 여백에 스스로 집안일을 하고, 책을 읽고, 공부도 했다. 피아노학원은 다니지 않았지만 라디오 음악을 들으며 음감을 발달시켰다. 요즘 아이들의 스케줄표를 보면 숨 쉴 틈이 없다. 놀이의 영역까지도 스케줄화된다. 부모들은 나만 아무것도 안 해주면 아이를 바보 만드는 게 아닐까, 하고 불안해한다. 그러나 김인강교수의 어린 시절은 결코 그렇지 않음을 증명해 준다.


사춘기 시절의 방황

질풍노도의 시기를 그들은 몸으로 겪었다면 몸이 자유롭지 못한 나는 정신적으로 겪었다. 십 대의 답답함과 혼돈, 정제되지 않은 감정을 통기타로, 사색으로, 책으로, 글쓰기로 풀어보려고 했지만 해결하지 못했다.
... 수업이 끝나면 학교에서 집까지의 가로수 길을 일부러 멀리 돌아서 갔다. 열몇 살 소년이 감당하기에 너무 큰 인생의 문제를 고민하느라 종종 가로등이 켜져야 집에 들어갔다....
... 나는 집 옆 작은 동산에 앉아 비를 맞으며 몇 시간씩 혼자 있거나 작고 침침한 방에서 불도 켜지 않은 채 오랫동안 생각에 빠져 있곤 했다.

사춘기의 방황, 깊은 사색의 시간. 이런 시간들은 한 사람의 내면을 깊고 단단하게 만든다. 인생의 의미를 고민하고, 존재에 대해 질문하고, 자신의 감정과 씨름하는 시간. 어쩌면 이런 과정은 성숙한 인간이 되기 위한 필수적인 시간이다. 그러나 우리는 사춘기 아이들에게 이런 시간을 허락하고 있는가? 이런 시간을 허락받지 못한 사춘기 아이들의 고민과 방황의 에너지는 어디로 향하고 있는가?


공부법에 대하여

아무도 푸는 방법을 가르쳐주지 않았기 때문에 그게 오히려 내게는 약이 되었다. 모르는 문제는 스스로 알아내야 했고 그렇게 한 것은 잊어버리지 않았다. 공부하는 시간은 많지 않았지만 나의 성적은 갈수록 좋아졌다.
... 그렇게 공부한 아이들은 뒷심이 달렸다. 부모의 의지에 밀려 공부하는 친구들은 자기가 가는 길에 확신이 없어서 중간에 방황하거나 폭발적인 에너지를 발산하지 못했다. 멀리 내다본다면 그건 참 불행한 일이다. 공부를 하려면 스스로 세운 목표가 있어야 한다. 나는 내가 사는 동안 부모님과 사회에 짐이 되지 않기 위해 공부했다.
영어공부는 따로 해본 적이 없다. 학교 공부와 AFKN 듣고 보기 그리고 영어 소설 읽기가 전부였지만 의사소통에는 지장이 없었다.

책상에 오래 앉아 있는 것이 결코 공부를 잘하는 길이 아니다. 어떤 특별한 공부법이나 비결을 가르쳐주는 것이 효율적인 것도 아니다. 공부의 동기도, 공부의 방법도 스스로 터득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진짜 효율적인 공부를 가능하게 하는 방도다.


홀로 서기

장애가 있건 없건 성인이 되어서도 홀로 서지 못하면 진짜 자기 인생을 시작하지 못한 것이다. 사람은 뒤로 물러설 곳이 있으면 절대로 앞으로 나가지 않는다. 머물 곳이 많다는 것은 축복인 동시에 화(禍)이기도 하다.

이 말 또한 나에게도 부모로서 경각심을 준다. 부모는 자녀에게 안전망을 제공하려 하지만, 그 안전망이 때로는 독립을 가로막는 장애물이 되기도 한다. 진짜 성장은 불편함과 어려움 속에서 스스로 길을 찾을 때 일어난다. 그러나 우리는 아이가 그 불편함과 어려움을 겪을까 봐 불안해한다.


어린 시절에서 사춘기, 입시 준비 기간을 거쳐 성인에 이르기까지, 부모가 해야 할 것은 오로지 생의 여백의 허용이 아닐까. 어린 시절에는 주변 세계 탐구 기회의 허용, 사춘기 시절에는 생각할 시간의 허용, 성인기에는 불편한 독립의 허용.


이와 관련해서 약 2년 반 전에도 글을 쓴 적이 있다. 이 내용과 일맥상통하다.

https://brunch.co.kr/@lanie/178


셋째, 인생의 행복은 (서울대 출신 교수에게도 결국) 순수한 인간관계, 그 사람들과 함께하는 소소한 시간, 자연이 주는 감각적 만족감, 주어진 것에 대한 자족에서 온다.


김인강 교수는 글에서 중간중간 인생에서 행복한 순간들을 회상한다.

너무 일찍 생의 어두움을 알아버린 나였지만 늘 우울했던 건 아니다. 우리끼리는 농담도 하고 장난도 치고 유행가도 부르고 운동도 했다. 다리를 못 쓰는 친구들과 함께 손으로 하는 축구, 야구, 심지어 발목을 잡고 하는 달리기도 했다. 흙먼지를 뒤집어써도 좋았다. 공을 따라 운동장을 기고 구르며 웃고 함성을 질러냈다.
고맙게도 우리 반 친구들 몇 명이 아침저녁으로 내 가방을 들어다 주었다. 그 친구들은 공부를 잘하지도 못하고 집안도 넉넉지 못한 애들이었다. 똘마니, 요즘 말로 하자면 이른바 '찌질이'들이었다. 새벽마다 신문을 돌리고 매시간 떠들거나 숙제를 안 해 와 선생님께 꿀밤이나 맞던 말썽쟁이들이었지만 마음은 순수하고 따뜻했다. 우리는 비좁은 자취방에 모여 라면을 끓여 먹고 기타를 치면서 목청껏 노래를 불렀다.
때 묻지 않은 장난질에 킥킥대고 노는 그 애들이 나는 좋았다. 실컷 놀다가 지치면 숙제를 했다.
... 신문배달을 하던 친구는 내가 다른 고등학교로 진학해 헤어졌는데도 3년 동안 공짜로 신문을 넣어주었다. 흰 눈 위에 곱게 접혀 떨어져 있는 신문을 주우며 뜨거운 눈물을 여러 번 삼켰다. 지금도 가끔 전화가 오는 똘마니 친구들, 그들 때문에 얼마나 웃고 얼마나 행복했는지 모른다.
주님 안에서 이루어진 사랑의 공동체는 세상에 있는 천국의 모형이다.

김인강 교수는 재활원을 삶의 음침한 골짜기로 표현하기도 하지만, 그러한 고통 속에서도 함께였기 때문에 웃을 수 있었다고도 말한다. 또한 학창 시절, 잘난 친구들은 아니었지만 그 친구들과 함께 얼마나 즐겁고 행복했는지를 회상한다. 즉, 행복은 완벽한 조건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함께하는 사람들과의 순수한 순간에서 오는 것임을 드러낸다.

몇 개월 만에 처음으로 방을 나와 바깥세상을 구경했다. 가을 하늘이 이렇게 투명하게 푸르렀던가? 나뭇잎 사이로 반짝이는 황금 햇살이 이렇게 눈이 부셨던가? 뺨 위를 스치는 공기가 이렇게 가슴이 툭 터지도록 시원했던가? 세상이 그렇게 아름다울 줄 처음 알았다. 세상에 고통 없이 숨 쉴 수 있고 마음껏 태양빛을 즐길 수 있는 것, 그것보다 더 감사할 일이 어디 있겠는가. 너무 흔하고 평범해서 인식도 못했던 것들이었다. 그러니 나머지 것들은 더 말할 것도 없었다. 범사에 감사하는 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란 것을 나는 가슴으로 체득했다.

자연과 계절이 주는 감각적 만족감과 평범한 일상의 소중함과 감사함을 찬미하며 기뻐하는 대목이다. 병으로 방에 갇혀 있다가 몇 개월 만에 바깥세상을 본 순간. 우리가 당연하게 여기는 것들, 푸른 하늘, 햇살, 바람이 얼마나 큰 선물인지를 그는 깨닫는다.

포동포동한 볼을 지닌 하린이를 보고 있으면 마음이 참 평화로워진다. 우유에 만족하고 엄마 아빠의 사랑과 눈빛에 천하를 얻은 것처럼 기뻐하는 아이. 그래서 예수님은 천국이 어린아이의 것이라 하셨나 보다. 하나님의 사랑 어린 눈빛 하나로 만족하는 사람들이 가는 곳이라서 말이다.

또한 김인강 교수는 이와 같이 작은 것으로도 크게 만족하는 둘째 딸아이를 보며 마음의 평화를 얻고, 신의 마음을 헤아린다. 나도 얼마 전 비슷한 경험을 했다. 낮잠을 푹 자고 난 나의 아기가, 나는 아무것도 안 하고 눈만 마주쳤을 뿐인데 그것으로 까르르 웃는 것이었다. 정말 그 순간 행복이 감각적으로 느껴지면서 동시에 창조주 하나님의 마음을 알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었다.



넷째, 모든 시대, 모든 세상살이, 모든 인생들은 생각보다 공평하다.


즉, 최정상의 삶에도 고통이 있고, 최하위 삶에도 웃음과 즐거움이 있다는 것이다. 혹은, 인간이 너무나도 간사해서 어떤 환경에서도 불만을 품고, 동시에 인간은 위대하기 때문에 어떤 환경에서도 기쁨을 발견할 수 있기도 한 것이다.

니체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늘 자신을 보라. 바깥을 보면 분노할 것만 보이지만, 자신을 보면 바꿀 수 있는 것들이 보인다. 세상은 그렇게 나로부터 조금씩 나아지는 것이다." 사실 이 말을 처음 접했을 때, 나는 쉽사리 공감하지 못했다. 사회가, 정치가 너무 암울해 보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모두가 안타까이 여기는 재활원과, 모두가 선망하는 서울대나 세계적인 명문대를 모두 경험한 김인강 교수의 목격과 증언은 니체의 말을 생생하게 증명해 주었다.

서울대에 들어갔다고 마을잔치가 벌어지고 축하 현수막이 마을 어귀에 붙었던 시골 출신 아이들은 낯선 도시문화와 상대적으로 잘나 보이는 학우들 때문에 열패감에 시달렸다. 반대로 아무 걱정 없어 보이는 애들은 행복이 행복인지 몰라 불행했다.
서울대에 다니면 공부 잘하고 미래도 보장되는데 무슨 고민이 있겠냐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겠지만 절대로 그렇지 않다. 그들이 겪는 열등감과 우월감 사이의 간극, 지나친 경쟁심, 주위의 기대가 무거운 짐이 되고, 미래에 남들보다 더 잘되어 있어야 한다는 압박감은 그들을 황폐하게 만들었다.... 아무 고통이 없는 사람은 없었다.

김인강 교수가 보기에 어떤 위치든 고통은 존재하고 있었던 것이다. 완벽한 조건, 완벽한 환경이라는 것은 없었다. 실제로 중요한 것은 주어진 환경이 아니라 그 안에서 어떻게 의미를 찾고 기쁨을 발견하느냐다. 공간적 차이뿐 아니라 시대적으로도 마찬가지이다.

하지만 세상을 바꾸겠다는 큰 목표가 사라진 곳에는 개인주의와 성공제일주의, 연애지상주의 같은 다른 가치관들이 들어와 차지하고 있었다. 그 안에서 학생들은 여전히 방황했고 지나치게 경쟁하며 상처 입고 서로 소외되었다.

좋은 시대는 없다. 배고픈 시대는 배고파서, 배고픔이 해결된 시대에는 이념에 맞서느라, 배도 부르고 나름 민주적이고 공정한 시대에는 또 개인의 성공에 대한 압박 때문에 고통스럽다. 시대 또한 탓할 것이 못된다.

나는 어려서부터 고난을 겪었고 하나님이 자유함을 주셔서 그런지 사람들의 판단과 구조 속에 휘말리지 않고 생존의 수렁 앞에서도 초연한 편이다. 내가 남에게 인정받고 시선이 집중되는 자리에 서려는 거대한 경쟁의 소용돌이 속에 있었다면 아마도 내 영혼은 제대로 성장하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버티지도 못했을 것이다. 교만한 자리에 오르고 싶다는 욕망은 인생을 좀 먹는 가장 무서운 죄성이기 때문이다.

역설적이게도 그의 장애와 고난이 그를 세속적 경쟁에서 자유롭게 했다. 때로는 약점이 축복이 되고, 제한이 자유를 가져다준다. 그는 장애를 지녔고, 세상 잘난 사람도 많이 만나봤지만 세상은 공평하다고, 신은 공평하다고 감히 이야기한다.



다섯째, 수두룩한 나보다 잘난 사람들 속에서 자족하는 법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나에게 주어진 조건과 환경에서 어떻게 자족할 수 있을까? 김인강 교수는 이에 대한 실천적 해답까지 제공해 준다.

학년이 올라갈수록 더 똑똑한 학생들이 나타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꿋꿋이 견뎠다. 이것을 견디지 못하면 학문을 계속할 수 없다. 나의 가치를 똑똑한 것에 두면 늘 불행하다. 지구 위에는 나보다 똑똑한 사람이 해변의 모래알보다 많으니까.

어차피 지구 위에는 나보다 나은 사람이 해변의 모래알보다 많다는 말. 이것은 절망적인 사실이 아니라 평안과 자유를 주는 진리다.

남보다 쉽게 길을 찾는 사람들을 우리는 천재라고 부른다. 하지만 수학에 천재만 필요한 것은 아니다. 나 같은 보통 사람들이 때때로 천재들이 풀지 못하는 문제를 풀 때가 있다. 천재들은 큰 그림을 보고 달려가기에 빈틈이 많다. 이 빈틈을 보통 수학자들이 열심히 메운다.

천재들이 놓치는 것을 보통 사람들이 채운다니. 천재들도 구멍이 있다니. 천재들을 시기할 필요도, 보통 사람인 나에게 실망할 필요도 없다. 모두가 각자의 자리에서 각자의 역할이 있다. 세상은 천재들만으로 돌아가지 않는다. 성실하고 꾸준한 보통 사람들, 어쩌면 단순하고 때로는 미련해 보이는 보통 사람들의 노력이 세상을 지탱한다.

나는 하나님으로부터 성실하게 공부하되 자족하는 법을 배웠다. 내가 할 수 있는 만큼 행하며 내가 가진 만큼 사람들을 섬기는 것이다. 공부 역시 내가 할 수 있는 만큼 하지만 온 맘을 다한다. 경건하고 윤리적이며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말씀을 전하며 실력 있는 학자가 되는 것, 이것을 나는 하나님을 믿는 자의 소명으로 삼았다.

성실하되 자족하는 것. 온 맘을 다하되 결과에 연연하지 않는 것. 이것이 김인강 교수가 찾은 답이다. 내가 할 수 있는 만큼, 내가 가진 만큼 행하고 섬기는 것. 이보다 더 평안한 삶의 태도가 있을까?

나는 건우가 평범하고 영혼이 맑은 사람으로 잘 자라주면 그만이다.

그가 자녀에게 바라는 바는 그의 말이 진실임을 방증한다. 그가 자식에게 바라는 것은 특별한 성공이나 뛰어난 업적이 아닌 평범함과 맑은 영혼이다. 그는 광범위한 삶의 경험 속에서 정작 행복은 평범한 데서 찾았고, 맑은 영혼을 가진 자는 자족하고 기쁨을 누리기에 더 유리하기 때문이다.



여섯째, 가족의 소중함과 존재 자체의 가치에 대하여


그에게는 장애 말고도 가시가 하나 더 있었다. 바로 아버지이다.

(재활원 입소할 때) 엄마와 누나가 나를 재활원에 입소시키고 돌아선 순간 나는 울지 않으려고 이를 악물었다. 따라가고 싶었다. 아무리 아버지가 술을 먹고 괴롭히는 집이라 해도 가고 싶었다.
철이 든 나는 아버지를 이해하려고 애를 썼다. 재활원에서 보낸 광야생활 3년 동안 그런 아버지라도 있는 집을 얼마나 그리워했던가.

오늘날 인간관계, 특히 가족관계에서 우리는 존재 자체의 가치를 인정하지 못한다. 그래서 어떤 구성원이 나를 괴롭힌다거나 자기 몫을 못할 때, 우리는 그 존재로서 품어주지 못하고 부담으로 느끼곤 한다. 어찌 보면 참 잔인하다. 사실 자기 몫 잘할 뿐 아니라 오히려 나와 우리 가족을 도와주는 엄마, 아빠, 동생, 그리고 남편과 시부모님만 있고, 아직까지 가까운 가족을 잃거나 오랜 시간 멀리 떨어져 있어 본 일이 없기 때문에 이 대목 100% 이해할 수는 없다. 그러나 박완서의 <한 말씀만 하소서>에서 아들을 잃은 어미가 어느 노파를 보고서, 그 노파의 아들이 죽을 때까지 어미를 고생만 시키는 노숙인이라 할지라도 아들을 위해서 뭐라도 할 수 있는 그 노파가 몹시도 부러웠다고 쓴 부분을 접할 때 다소 충격을 받았고, 존재 자체의 가치를 입증하는 대목이라고 생각한 적이 있다. 박완서의 일기를 통해, 그리고 이제는 김인강 교수의 글을 통해서도 가족의 소중함과 존재 자체의 가치를 배워간다.




나의 이 책에 대한 감상평을 한 문장으로 말해보자면, 이토록 삶을 통합적으로 살아내고 또 해석할 수가 있을까, 하는 것이다. 김인강 교수는 사회의 약자 및 소외된 집단과 주류의 집단을 모두 경험하고, 또한 그 두 집단을 객관적이고 이성적으로 바라보며, 자신의 인생뿐 아니라 자신을 있게 한 주변의 인생들에 대한 희생과 그 가치를 숭고한 것으로 높인다. 게다가 글솜씨가 좋아서일까, 그는 커다란 것들을 말하면서도 그 문장이나 표현이 두루뭉술한 것이 없고 참 구체적이고 선명했다. 물론 그는 비상한 머리를 타고난 것 같기는 하다. 그러나 기쁨은 결코 어떠한 특권이나 운에 기인하지 않는다는 것, 이 책을 읽는 누구든지, 어떤 상황과 시공간에 처해 있든지 기뻐할 수 있다는 것을 그의 생생한 문장들을 통해 알 수 있었다.


김인강 교수의 <기쁨공식>을 통해 나는 기쁨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 기쁨은 완벽한 조건에서 오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불완전함 속에서, 고통 속에서, 평범한 일상 속에서 발견하는 것이다. 누군가의 희생을 알아보고 감사할 때, 삶의 여백 속에서 스스로 성장할 때, 소소한 관계 속에서 사랑을 나눌 때, 주어진 환경의 공평함을 깨달을 때, 비교를 멈추고 자신의 자리에서 성실할 때, 존재 자체의 가치를 인정할 때, 그곳에 기쁨이 있다.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이것은 명령이면서 동시에 허락이다. 어떤 상황에서도 기뻐할 수 있다는 것, 기뻐해야 한다는 것. 이것이 바로 기쁨의 공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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