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PACS: 혼인 너머의 제도

by 라온재


프랑스는 오랫동안 개인의 자유와 다양한 삶의 형태를 중시해온 나라다. 이러한 문화적 토대 위에서, 프랑스는 1999년 전 세계에서 유례없는 제도를 도입했다. 바로 PACS(Pacte Civil de Solidarité), 즉 시민 연대 계약이다. 이는 법적으로 등록된 비혼 커플이 결혼과 유사한 권리를 누릴 수 있도록 보장해주는 제도이며, 결혼을 꺼리는 수많은 프랑스인들에게 제2의 선택지를 제공했다.


이 제도는 처음에는 동성 커플을 위한 대안으로 도입되었지만, 시간이 흐르며 점차 이성 커플에게도 널리 퍼졌다. 오늘날 프랑스에서는 결혼보다 PACS를 선택하는 커플의 비율이 오히려 더 높다. 특히 젊은 세대와 황혼기에 접어든 중장년층 사이에서 PACS는 합리적 동반자 관계를 설계하는 방식으로 각광받고 있다.


황혼기에 접어든 프랑스인들은 다양한 이유로 결혼 대신 PACS를 선택한다. 첫째, 결혼은 복잡한 절차와 강한 법적 구속력이 따르지만, PACS는 비교적 간단한 절차로 관계를 등록할 수 있다. 둘째, 이혼 시 법적 분쟁을 피할 수 있고, 재산 분리나 상속에 있어 유연하게 조율이 가능하다. 셋째, 배우자 사망 시 유족연금 문제나 세금 혜택 등에서 실질적인 보호를 받을 수 있다.


특히 은퇴 이후의 삶을 재정적으로 안정적으로 꾸리고자 하는 이들에게 PACS는 제도적 장치이자 정서적 안전망이다. 두 사람은 함께 생활하면서도 각자의 연금을 유지할 수 있으며, 별도 계약을 통해 재산 관리 및 사망 이후의 조치를 명확히 합의할 수 있다. 이것은 황혼기의 동거가 단순한 동반이 아닌, 설계된 연대임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예다.


프랑스 정부는 PACS 커플에게도 소득세 공동 신고, 주거 계약 공동 명의, 병원 치료 시 대리 권한 부여 등 여러 권리를 부여한다. 결혼은 아니지만, 삶을 함께하는 데 필요한 최소한의 법적 기반을 갖춘 것이다.


PACS의 도입은 프랑스 사회 전반에 중요한 메시지를 던졌다. 즉, 함께 산다는 것은 반드시 결혼이라는 이름을 통해서만 이뤄져야 하는 것이 아니라는 인식의 전환이다. 이 제도는 전통적인 가족 모델에 균열을 일으켰고, 동시에 비혼 커플의 삶을 제도적으로 인정하는 길을 열어주었다.


특히 황혼기에 접어든 이들에게 PACS는 다시금 삶을 공동으로 설계할 수 있는 실질적인 도구가 된다. 자녀와의 갈등을 줄이고, 재산 문제를 명확히 하며, 무엇보다 감정적 관계에 부담을 덜 수 있는 장치이기 때문이다. 결혼의 무게 없이, 그러나 그에 못지않은 진지함으로 서로를 돌볼 수 있는 관계. 프랑스는 이를 제도적으로 가능하게 만들었다.


한국에서도 이와 같은 제도가 도입될 수 있을까? 아직은 요원한 이야기로 들릴 수도 있다. 하지만 프랑스의 사례는 하나의 방향을 제시한다. 다양한 삶의 형태를 인정하고, 개인의 선택을 존중하는 사회는 반드시 제도와 법의 뒷받침이 필요하다는 것. 황혼의 계약 동거가 단순한 트렌드를 넘어서려면, 바로 이러한 제도화된 인정이 필수적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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