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방을 옮겨도, 너는 어디에나 있는데
대학교 시절.
평일의 대부분을 자취방에서 살았지만, 금·토·일은 집에서 잠들어야 했다.
당시 집에 가기가 그토록 싫었던 건, 내가 쓰던 커다란 방에는 그 남자애의 흔적이 그대로 남아 있었기 때문.
그 남자애가 앉아서 웃던 의자부터 시작되는 기억.
끝 없이 이어지는 장면과 소리가, 실재하지 않음을 알면서도 견디기 힘들었다.
그때는 그 잔상이 다른 감정이라고 생각했는데, 이제 와 생각해보면 내가 너무 멍청했지.
아무튼 떠올리고 싶지 않았고, 나는 작은 방으로 굳이 옮긴다고 식구들을 괴롭혀댔다.
하지만 방을 옮겨도 집을 나설 때면, 문을 나서자마자 보이는 마당 난간에서 그 남자애가 보였다.
비스듬히 기대 있었던가, 나를 오해했다가 오해란 것을 깨닫고 새벽에 달려와 거기 서있던 그 남자애.
똑바로 마주보던 시선과 민낯에 당황스러우면서도 뭐라고 설명 못할 감정을 느끼던 나.
그날 대화를 위해 찾았던 3분 거리의 한강.
그 벤치에서 그 남자애는 얼굴을 가리는 내게 오늘이 제일 예쁘다고 말하며 예쁘게 웃었다.
내게 제일 예뻤던 건, 그 남자애였는데.
이제 와 돌이켜보면, 그만큼 표현하지 못했던 게 후회스럽기도.
이 모든 게 거의 10년 전의 이야기라는 게 아이러니지.
아주 오래 전인 그 순간이 이토록 선명한 것에 내 기억력을 핑계로 들 마음은 없다.
기억력이 좋은 편인 것은 맞지만, 의미 없는 것을 남기지 않는 것도 내 오랜 습관.
그 애 이후로 만난 사람들의 이름은 다 기억하지만, 대부분은 그 이상 기억나지 않는 게 증거라면 증거일까?
나는 한동안 강남도 가지 못했다.
집과 가까워 약속 잡기 좋은 이태원도 못 갔다.
아르바이트를 끝내고 나오면 그 앞에 기다리고 있던 그 남자애가 생각나서 애써 밝은 척을 해야 했다.
같이 아르바이트를 하던 또래 남자가 술 한 잔 하자고 말하며 뒤를 따라오다가 그런 이야길 했다.
"무슨 생각하는지 이제야 훤하네. 그래서 기분 나쁘고."
나보고 대체 무슨 생각을 하냐며 늘 묻던 사람이 이제 훤하다며 내가 보던 자리에 시선을 두는 게, 마치 비난 같았다.
내게 호감을 표했다가 거절당한 사람이라 그랬을 수도 있다.
물론, 내 입장에서는 그 사람이 날 좋아했다기 보다는
그저 관심받는 게 자기가 아니라는 이유로 내게 들이댔던 것 같지만.
어떻든 분명하게 말해야 했다.
내가 지금 혼자라고 해서 그게 당신에게 기회가 있다는 뜻은 아니라고.
명확하게 말해버려 후련했고, 혼자인 게 여실해 서글펐다.
그러나 지나갈 감정이라고.
그냥, 특별했을 뿐이라고.
그 남자애가 지나치게 저돌적이었기 때문에.
지나치게 순수했기 때문에.
혹은 그래 보였기 때문에.
지금껏 만나본 적 없는 유형을 만났고, 우선순위로 선택하지 않으려 했고, 그러다 끝났을 뿐.
그래서 이런 감정이 드는 거야.
그냥 죄책감의 다른 얼굴인 거야.
혹은 마음껏 질러볼 수 없었던 미련이거나.
어차피 곧 생각도 잘 안 날 거야.
접점이 없으니 마주칠 일도 없을 거야.
당시의 나는 필사적으로 나를 속였다.
본능적으로 방어했던 것 같다.
어쩌면 그때 실컷 앓으면서 울고, 불고 난리를 쳤어야 했을지 모른다.
그랬다면, 지금껏 내가 이 모양 이 꼴이지는 않았을 것 같은데.
적어도 마당 난간에 그 남자애의 모습이 보이는 것만 같아 이를 악물어야 하는 날이 몹시 적어졌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