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우연히 시작돼 뒤도 돌아볼 수 없게 만든 남자애
그러고 보면, 주변에 첫사랑 없는 사람을 본 적이 없다.
내가 아는 사람 중 가장 감정적이지 않고, 감정을 기꺼워하지 않는 사람이 있다.
그조차 첫사랑 이야기에는 아련해지던 것을.
나에게도 당연히 있다.
다만, 아주 오래도록 내 안에서 꺼내지 않았을 뿐.
나는 첫사랑 이야기를 처음부터 끝까지 다 해본 적이 없다.
아마, 앞으로도 어렵지 않을까?
다른 이유가 있는 것은 아니다.
그저 감정을 다 삼킬 수 있을 거라고 장담할 수가 없어서.
때는 내가 23살이 되기 조금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22살에 다시 돌아오게 된 한국,
뜨겁던 여름이 지나면서 5년만에 맛보는 추위에 나는 온몸을 떨었다.
몸 상태가 왔다 갔다 했고, 병원을 가보니 면역 체계에 문제가 생겼다고.
원래 5년 정도 추위를 안 겪었다면
다시 추위에 적응하는 데 15년이 걸릴 수도 있다고 한다.
이건 의사의 말은 아니고, 그냥 어디서 들은 거라 확실하진 않지만.
여하튼, 그 춥던 11월에 나는 아르바이트를 하다가 그 애를 만났다.
스쳐지나가기 딱 좋던, 수많은 사람들 중 하나.
내가 당시 하던 일은 많은 사람들 앞에 서는 일이었다.
설명회를 매일 몇 번씩 해댔으니.
1시간 전에 마주친 사람도 기억하기 어려울 정도였다.
뭐, 사랑에 빠지면 모든 게 운명 같다고 느낀다 하니 확신할 수는 없지만.
그래도 그 남자애는 제법 선명하게 뇌리에 남았었다.
어렸던 나와 나보다 더 어렸던 남자애는 생각보다 쉽게 사랑에 빠졌다.
혹은, 그렇다고 믿었거나.
내가 일하던 동네, 내가 살던 동네, 그 남자애가 살던 동네.
이태원, 강남.
짧은 기간이었는데도 너무 여러 장소에 기억을 뿌려버렸다.
데이트다운 데이트조차 몇 번 없이,
일이 끝나면 만나 수다를 떠는 게 거의 전부였던,
그런데도 시간이 아쉬워 발을 동동 구르던 때였다.
아주 짧은 인연이었는데, 별일이 다 있었던 것도 같다.
다시 그렇게 하라면 할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순간의 감정에 택시를 잡아 타고,
밤이고, 새벽이고 상관 없이 달려가고,
친구와 있다가도 달려가 추위에 떨며 기다리고.
그 남자애도 나도 그때는 미쳐 있었던 걸까?
태어나 전혀 모르던 곳에서 살아오다가
이제 막 만난지 얼마 안 된 사람에게
지나치게 많은 열정을 쏟은 것은 아니었을까?
마치 모든 게 처음인 것처럼.
혹은 정말 처음인 것도 있었고.
내 세상이 온통 그 남자애로 가득 차고 있었다.
정해놓은 규칙과 자리잡은 규칙이 모두 무너지는 걸 보면서
두렵기도 했고, 희열을 느끼기도 했다.
그런데 딱 한 걸음을 남겨놓고, 더 가지 못했다.
당시 우선순위조차 애매한 상태로
복잡해진 인간관계와 여러 이유 때문에
포화 상태였던 나는, 내 이기심에 잡았던 손을 느슨하게 풀어버렸으니까.
손이 느슨해진 시점부터 내 감정과 관계 없이
끝이 빠르게 찾아오리라는 건 너무나 명확했다.
그 끝을, 나는 느꼈고, 어쩌면 원했는데.
그 남자애는 준비했을까?
그 남자애가 첫 남자친구는 아니었지만, 첫사랑이었다.
무서워 도망가고 싶을 정도로.
그리고 실제로 도망갔을 정도로 강렬했던 감정은 그때가 처음이자 마지막이었으니까.
그래서 나는 오래도록 도망만 쳤다.
그 남자애를 잃고도, 한참을 더 도망쳐서 바쁜 삶 속에 그 기억을 묻고 살았다.
아프기 싫었으니까.
정면으로 마주본다면, 떠올린다면, 고통스러울 거란 걸 알고 있었으니까.
모든 것에 정면으로 맞서야 직성이 풀리던 나 자신을
잃어버리는 기분이긴 했지만, 그 방법밖에는 없다고.
그때는 그렇게 생각했던 것 같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한국의 대학교로 다시 입학한 후 정말 바빠졌고,
새로 알게 된 사람들이 넘쳐나면서 자연스럽게 잊어가고 있다고 생각했다.
불쑥 생각나 마음을 뒤흔들어도.
그 남자애와 갔던 곳에는 발걸음조차 내딛지 못하면서도.
그래서 한동안은 그 남자애가 나의 첫사랑이라는 사실조차 모르고 지냈다.
몇 년 뒤, 우연처럼 그 남자애를 다시 마주하게 됐을 때조차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