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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층 강아지가 2층에서 내렸다

어떨 때는 동물의 정이 더 따뜻해

by 유녕

나는 강아지를 좋아한다. 가족과 아파트에서 살고 있기 때문에 강아지를 키우지는 않지만, 인터넷에서 매번 강아지 SNS나 유튜브 채널을 보면서 미소를 짓는 랜선 집사다. 그리고 언젠가는 큰 마당이 있는 집에서 반려견을 키우면서 사는 게 꿈이다.


흔히들 잘 물어보는 질문 중 하나가 “그럼 어떤 종을 좋아해?”다. 비록 인간의 기준으로 나눈 견종 기준을 별로 좋아하지는 않지만, 그래도 굳이 말한다면 골든 리트리버를 좋아한다. 예전에는 시베리안 허스키를 제일 좋아했지만 바뀌었다. 이렇게 된 이유는, 추억 때문이다.




내가 제일 먼저 정이 든 골든 리트리버는 내가 사는 아파트의 16층에 사는 강아지, 휴고였다. 웬 강아지 이름이 휴고냐고 할 수도 있지만, 우리 아파트 16층에는 미국인 부부가 살았다. 대부분의 서울 아파트 주민들이 그렇듯이 서로를 잘 몰랐다. 그리고 매일 출근하는 아저씨가 묘하게 차갑게 느껴졌기에 가까워지지는 않았다.


오히려 이상한 규칙이 있는 인간들보다는 동물들이 허물없이 다가올 때가 있다.

휴고가 그랬다.


휴고가 나에게 다가온 건 4년 전이었다. 부부와 아이들을 대신해 주 3회 정도 아파트에 와서 휴고를 산책시키는 아주머니가 계셨다. 가족들과 함께 외식하고 아파트 로비에 들어가는 길에 휴고와 아주머니가 보였는데, 우리를 보자마자 휴고가 갑자기 로비 문 앞에 앉아버렸다. 영문을 모르고 휴고를 피해 나오고 나서야 알았다.


“아… 쟤가 우리랑 같이 들어간다고 기다렸던 거였구나.”


그리고 이는 구애(?)의 시작에 불과했다.




휴고는 똑똑하고, 눈치가 백단이었다. 휴고를 알아갈수록 휴고를 산책시킬 때마다 자부심 있는 표정으로 미소 짓는 16층 아저씨가 이해될 정도였으니까. 휴고는 출퇴근할 때마다 직접 산책시키는 아저씨를 제일 좋아했고 따랐다. 두 아들과 놀 때도 있었지만 말을 따르는 정도는 분명히 달랐다. 가끔 나와 마주할 때, 누구와 함께 있느냐에 따라 휴고의 태도가 달라졌다. 큰 아들과 밖에서 놀다가 나를 보았을 때는 뒤도 돌아보지도 않고 나에게 뛰어왔지만, 아저씨와 함께 있을 때면 같이 엘리베이터에 타도 얌전히 있었다. 그런 휴고가 귀엽기도 했지만, 점차 우리 가족과 16층 아저씨가 친해지면서 휴고의 태도도 변했다.


아직도 기억난다. 언니를 보러 가족들과 미국에 갔다가 일이 생겨서 혼자 일찍 한국에 들어온 적이 있다. 혼자서 공항버스에서 내려 캐리어 2개를 끌고 집에 들어가던 날, 우연히 산책을 마치고 아파트에 들어오는 휴고와 아저씨와 함께 엘리베이터를 탔다. 유독 많이 지쳐있던 날이라 힘들어 보였나. 그날은 처음으로 휴고가 아저씨 앞에서도 내게 반가워했고, 아저씨가 웃었다. 아마 휴고는 속으로 쾌재를 부르지 않았을까.


“아싸! 아빠 앞에서 아는 척해도 된다!”




두 번째로 내 기억에 남아 있는 골든 리트리버는 미국 캘리포니아에서 만났다. 봄 방학에 가족들과 함께 캘리포니아 여행을 할 때, 거의 마지막 날에 묵었던 펜션에는 강아지 두 마리와 고양이 한 마리가 살았다. 샌프란시스코에서 잘 나가는 IT 사업가였다가 은퇴한 부부가 운영하는 곳이었다. 겁이 많은 엄마는 처음에 대형견 두 마리를 보고는 무서워했다. 그러나 그다음 날 주인 할머니가 직접 요리하는 브런치를 먹으면서 엄마의 태도가 달라졌다.


그 펜션의 골든 리트리버 이름은 피니건이었다. 같이 펜션에 머무는 사람들과 함께 아침식사를 하는데, 웬 강아지가 식탁 밑으로 슬금슬금 오더니 내 다리에 기대는 거 아닌가. 심지어 잠시 머무른 것도 아니고 식사가 끝날 때까지 내 다리에 기대어 있었다. (아니 언제 봤다고!) 식사가 끝나고 나서도 다가오더니, 시키지도 않았는데 앞발을 주지를 않나… 정작 같이 사진 찍고자 하는 아빠한테는 고개를 돌려버린 게 함정이다.




미국에서 한 학기를 보내고 다시 서울에 돌아왔을 때, 휴고는 여전히 나를 반겨주었다. 아니, 예전보다 더 반가워하는 듯했다. 주인아저씨와 함께 있어도 인사했고, 다른 사람과 있을 때면 더 방방 뛰었다. 무료하면서도 바쁘고 반복되는 일상 속에서 오히려 매일 휴고를 기다리게 될 정도였으니까. 집을 나갈 때 16층에서 엘리베이터가 내려오면 “휴고 볼 수 있을까?”라는 생각을 했다.


그래서 엘리베이터에서 생긴 일화도 있다. 비가 오는 날, 산책을 하다 들어온 휴고와 엘리베이터를 같이 탔다. 아저씨가 아니라 두 아들이 산책을 시키고 오는 길이라 더 반가워하는 거 있지. 엘리베이터에서도 내내 앉지를 못하던 모습이 얼마나 귀엽던지.


비록 아쉽지만 2층에서 내리려는 찰나에, 나와 같이 2층에 내려버리는 것 아닌가.

엘리베이터 안에서 “휴고 다시 들어와!!!”라는 아이들의 외침은 덤.


집에 들어가서 엄마에게 이야기했더니...

“걔 문 열어줬으면 우리 집에 들어왔을 걸?”

(아주 틀린 이야기는 아닌 것 같다)




이렇게 골든 리트리버들의 추억을 계속 쌓으면서 “행복하게 잘 살았답니다”로 끝나면 참 좋으련만.

동물이든 인간이든 삶이 맘대로 되지는 않아서.


노부부가 관리를 잘해주던 캘리포니아의 피니건은 불과 5살에 무지개다리를 건넜다. 1박만 머물렀던 펜션의 소식을 듣게 된 건 아빠의 이메일을 통해서였다. 마음이 따뜻한 노부부는 자신의 펜션에 투숙했던 손님들에게 이메일로 피니건의 소식을 접했다. 곧은 아니더라도 다시 캘리포니아에 오는 날에는 꼭 보고 싶었는데.

삶의 활력이 되어준 휴고도 조만간 내 삶에서 사라질 듯하다. 출퇴근 전후로 항상 휴고를 산책해주던 주인은, 어느 날 쓰러져 일어나지 못했다. 부인과 두 아들은 미국에 보낸 후였다. 그 후로 마주한 큰 아들의 얼굴은, 세월을 두 겹은 입힌 듯했다. 이 모든 소식을 일하는 아주머니에게 들은 엄마는 펑펑 울고야 말았다. 슬픈 눈을 한 휴고가 시야에서 내가 사라질 때까지 응시하는 게 슬펐다. 주인아저씨의 장례식을 치른 가족은 이제 완전히 한국을 떠나겠지. 덩치도 큰 휴고가 비행기 타고 갈 생각 하면 걱정부터 먼저 든다. 한동안은 16층이 비어 있겠지.


그래도 추억은 계속 간직하고 있을래.

동물이 주는 정이 더 따뜻하고 기억에 오래 남을 때도 있는 법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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