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치는 없어도 죽은 맛있으니까
’험한 동네에서 자랐어요.‘가 입버릇이었다. 초등학교 체육시간엔 옆산을 탔다. 중학교 시절 반에서 놀던 친구들은 각목을 들고 다녔다. 그들은 사이즈를 지나치게 줄여 터질듯한 치마에 깻잎머리를 이마에 딱 붙인 채로 껌을 씹으며 다니곤 했다. 그들은 남녀무리를 지어 다녔다. 서로 파트너를 바꿔가며 사귄다고 했다. 한 번은 일진 무리 중 한 명이 수학 수업 시간 내내 들으란 듯 껌씹는 소리를 냈다.
짝….짝…..짝…..
수학선생님은 애써 못 들은 척 하며 수업을 이어나가다가 갑자기 분필을 던지더니, 괜히 만만해 보이는 얌전하고 조용한 친구 한명을 쥐 잡듯 잡았다. ”야, 너 그것도 못 풀어? 너 어떻게 되려고 그래??“ 친구들은 눈빛을 주고 받았다. 스승의 그런 모습이 한심하다는 표정이었다. 이제는 일진 친구의 껌 씹는 소리에 다른 친구들의 은은한 코웃음 소리가 합세했다.
하지만 그 와중에…
그렇다.
나는 눈치가 많이 부족한 은평구 헤르미온느였던 것이다.
험한 동네였어도 공무원 아파트들이 밀집해 있었기에 살림살이는 다들 고만고만했다. 그러나 그 안에서도 온갖 드라마와 영웅서사가 펼쳐지곤 했다. 내 이야기는 빠듯한 공무원 살림살이 속 공부 잘하는 장녀 스토리였다. 문신을 하고 각목을 들고 다니던 일진 친구들도 나에겐 곧잘 해주는 편이었다. 전교 1등을 놓치지 않아서였다. 문제는 내가 ‘전교 1등’ 뽕에 잔뜩 취해 눈치가 매우 부족했다는 점이었다.
”저 그거 알아요! 책에서 봤어요.“
”난 그 문제 풀 수 있는데…“
험한 동네에서는 친구들의 뒷담화가 필터 없이 전달되었다. “어우 저거 전교 1등만 아니었어도…” 물리적 폭력도 흔했던 시절. 나의 ’무눈치‘는 선을 아슬아슬하게 넘나들었다. 선생님들은 대견함과 걱정스러움을 동시에 담은 표정으로 나의 발표를 지켜보았고, 친구들의 나를 바라보는 눈은 점차 세모가 되어갔다. 상황을 악화시킨 것은 나의 심각한 현실 인식이었다.
“다 날 질투해서 그래. 다들 생각 없이 사는 것 같아.”
그랬다.
나는 니콜라가 아닌 아냥이었고,
혜나가 아닌 예서였다.
웃기게도, 그런 내가 중학교 3학년 때 ‘과학고등학교’를 도전하겠다고 선언하자, 주변 사람들은 나를 우쭈쭈하기 시작했다. 모두가 나를 응원하고 파이팅을 외쳤다.
이제 와 진실을 들춰보건데,
친구들은 나를 교실에서 치우고 싶었고,
부모님과 선생님은
“과고를 준비하는 영특한 아이”를 데리고 있어 좋았고,
나는
“뭔가 앞서나가는 느낌”에 취해있었다.
어디선가 엄마가 구해온 어려운 문제집을 펼쳤다.
하나도 이해되지 않았다.
사교육이 필요하다는 걸 느꼈다. 시험날이 다가오자 초조해지기도 했다. 어머니는 은평구에서 특목고를 가장 많이 보낸다는 대형종합학원, “명성학원”에 나를 등록시켰다. 내 내신점수를 들은 학원에서는 나를 최상위 과고준비반에 배치했다. 그러나 내가 가진 문제는 심각했다.
”파인애플, 넌 기초도 부족하고 열심히 하려는 열정도 없는 것 같다.“
”네? 제가요?“
나보다 훨씬 월등하고 똑똑한 학원 친구들 사이에서 더 이상 나는 헤르미온느가 될 수 없었다. 자존심을 내려놓고 친구에게 설명을 부탁해도 이해가 가지 않았다. 이제 우쭈쭈 해주는 이도 없고 수업내용을 못 따라가자 신경질이 늘었다. 쓸데없는 반항심이 꽃피었다. 내가 아무것도 아니라 느껴지자 공부를 열심히 해야겠다는 의지도 점차 흐릿해지기 시작했다.
어찌어찌 시간은 흘렀다. 과학고등학교 입시 시험을 보러 가는 날을 왠지 모를 불안감으로 맞이했다. 갱지에 인쇄된 문제들을 읽어내려갔다. 맨 앞장을 제외하면 전혀 풀지 못할 난이도였다. 중학교 3년 내내 일등이었는데. 나는 문제 해독도 제대로 못하고 낑낑 대다가 면접실에 들어갔다.
”파인애플 학생은, 과고 준비를 얼마나 했나요?“
”어? 어….“
면접실 문을 나서는 순간 ’아 떨어졌구나‘ 하는 확신이 들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합격 발표날은 학원에 다같이 모였다. 학원 최상위반 절반은 합격하고 절반은 떨어졌다. 그 떨어진 절반이 바로 나였다.
”아흐흐흑….흑흑….흑흑…“
”야 파인애플, 괜찮아? 야 진정해…“
데면데면하게 지내던 과고준비반 남학생들이 나를 어색하게 위로했다.
”어흐흑…너희…가서 잘 해야 해…내 몫까지….흑흑“
그 순간을 떠올리면 지금도 얼굴이 홧홧해진다. 수치사할 것 같은 느낌이 든다.
그 날 엄마 아빠는 나를 학원 앞에 있던 뽕잎 샤브샤브집에 데려갔다. 처음 먹어보는 샤브샤브였다. 빠듯한 살림이라 외식은 우리 집의 큰 이벤트였다. 집에서는 느껴보지 못한 짜릿한 육수와 조미료의 맛이 강렬했다.
”파인애플 엄청 잘 먹네. 그렇게 맛있어??“
”응… 절차와 방법이 있는 음식이라는 점이 좋아.“
나는 한참을 고기와 배추, 쑥갓, 어묵, 그리고 칼국수를 들이마셨다. 뜨거운 국물이 뱃속에 들어가자 살 것 같았다. 내가 아무 말 없이 달그락 거리며 먹고 또 먹자 부모님은 눈빛을 주고 받으며 조심스레 위로를 건넸다.
”파인애플아, 그…과학고 안 가도 돼.“
”어유 그럼. 고등학교 가서 내신 잘 받아 대학 가면 되지.”
“응, 알아. 근데 안 가는게 아니고 못 간거야.”
“……”
김과 노른자가 얹혀 있는 밥이 육수 국물에 들어갔다. 노른자는 회오리 모양으로 국물 안에서 보글거렸다.함께 졸여진 이 죽을 마지막으로 먹는다고 했다. 사장님은 마무리로 참기름을 뿌려 주었다. 나는 국자로 퍼낸 뜨끈한 죽을 앞접시에 받았다.
창 밖에 눈이 내리는 추운 날씨였지만 죽에서는 김이 펄펄 났다. 혀가 데일 것 같이 뜨거운 죽을 후후 불어 입에 넣었다. 엉덩이에서는 온돌의 열기가 따뜻했다.
밖은 춥고,
나는 눈치도 실력도 많이 부족하지만.
그래도 죽은 따뜻하고 맛있으니까.
한 그릇 먹고 나면, 기분이 나아질 것 같았다.
달그락 거리는 소리만 은평구 샤브샤브집에 가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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