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우울할 때 맵고 단 걸 먹어

도시락과 앞치마는 나의 A.T.필드

by 찬란
A.T.필드 전개!!!



인생엔, 어쩔 수 없는 일들이 일어나기도 한다.

마음이 울적해 지는 건, 대부분 그런 날들 때문이다.



애니메이션 ‘에반게리온’에서 주인공 신지는 지구 멸망을 막기 위해 매번 로봇에 탑승하는 파일럿이다.

잊을 만하면 찾아오는 사도가 출현할 때마다, 거대한 로봇 에반게리온은 빛의 방어막을 펼친다.


이 방어막 이름은 ‘AT 필드’.


차라라~ 멋진 효과음과 함께 반짝 반짝 거리는 빛의 방어막이 펼쳐진다.

그 AT 필드를 방패 삼아 룽기누스의 창을 가지고 신지는 오늘도 싸운다.



우울하다 우울해.



우울할 때, 마음속에서 내 AT 필드를 발동시킨다.

나만의 자기 보호 튜토리얼,

일명 ‘내 방식으로 살아남기’ 모드 온이다.


어릴 적, 애니 덕후였던 나는 에반게리온에 푹 빠져 살았다.

‘에반게리온’은 그 옛날에도 어마어마한 센세이션을 일으키며 나 같은 추종자들을 많이 생성시켰었다.


작품을 철학적, 종교적으로 해석하는 책도 사보는 등 노력했지만, 솔직히 지금도 다는 이해 못 하겠다.

사실 난 그 작품이 있어 보이고 멋져서 좋아했다.


사람이 겉멋 좀 들면 어때.


예쁜 거 좋아하고 멋에 끌리는 것도

인간적인 거 아닐까.



에반게리온에서 AT필드는 주인공이 외치지 않는다.

본부 상황실의 엔지니어들이 다급하게 외친다.


“AT 필드! 전개!!”




피융피융하는 효과음과 같이 찬란한 빛의 방패가 날개 펴지듯 우리의 에반게리온을 감싸면

나도 같이 보호받는 기분이다.


이 장면은 내게 하나의 의식처럼 각인되었다.

특히 우울하고 속이 복잡하면 조용히 속으로 외친다.


“AT 필드..! 전개!!!”


그러면서 앞치마를 리듬감 있게 팡팡 턴다.

유명 셰프처럼 간지나게.

입 밖으로 소리내고 싶지만, 너무 웃겨서 의식의 엄숙함이 사라질까봐 자제한다.


이렇게 요란하게 준비하고 나서 요리를 시작한다.

이럴 때 내가 해먹는 음식들은 패턴이 있다.


자, 맛있는 걸 만들어 보자.
내 안에 내 애기를 먹여보자.





1. 아주 매운 요리


맵다고 다가 아니다. 내 경험에 따르면 매운 맛은 크게 세 가지다.


얼큰한 매운맛(빨간 고추), 통증을 유발하는 매운맛(청양 고추), 그리고 혀가 얼얼한 매운맛(마라)


우선 김치찌개를 끓여본다.

셰프들은 돼지고기를 추천하지만, 나는 햄과 소세지를 더 자주 쓴다.

무엇보다 집에 있을 확률이 높고, 조리도 편하다.


코인육수, 양파, 감자, 햄을 넣고 물 거의 없이 푹푹 끓인다.

거기에 자른 김치와 김치국물을 넣는다.

잘 끓는다 싶으면 콩나물이랑 두부를 넣고,

고추가루를 ‘뚜껑 빠졌나?’ 싶을 만큼 왕창 넣는다.


그렇게 끓이면 시뻘겋고 진한 김치찌개가 완성된다.


MZ호소인 답게 마라 소스도 쓴다.

중국 유학 시절, 밤마다 나가 사 먹을 정도로 마라탕을 좋아했다.

이제 한국에서도 대중화된 마라탕은 밀키트로도 많이 나온다.


좋아하는 미나리를 잔뜩 넣고 면과 함께 데친다.(불 두 개 쓰면 귀찮으니까).

여기에 미리 사 둔 마라 소스를 넣는다.

그럼 매운맛으로 뇌가 싹 비워지는 나만의 마라국수가 된다.


눈물 콧물 쏙 빠지고, 입안이 얼얼해지며 뭔가 시원해진다.

매운 맛은 통각이라는데 일종의 자학을 통한 희열인가 싶기도 하다.

복잡했던 머릿속이 좀 단순해 진다.

죽고 싶지만 떡볶이는 먹고 싶다는 말이 괜히 나온 게 아니다.



2. 도시락을 싼다.



불조차 쓰기 싫은 날엔 도시락을 싼다.

소풍 가듯 기분 내며

주먹밥이나 샌드위치를 만든다.


햇반을 데워서, 김가루, 멸치볶음, 참기름을 넣고 양푼에서 비빈다.

깨소금으로 간간하게 마무리한다. 작게 한 입 크게로 뭉친다.


한 번은 오이랑 햄을 작게 깍둑썰기해서 넣었는데,

햄을 프라이팬에 한 번 구웠더니 더 맛있었다.

(불 안 쓴다더니 결국 썼다.)


아이 도시락통에 사과랑 같이 담고, 거실에서 자릴 펴고 오래동안 먹었다.


기분은 조금 나아진다.


맛이 생각보다 괜찮아서 누군가에게 나눔을 빙자한 자랑을 하고 싶었지만 줄 이가 없어 아쉬웠다.



3. 달디단 디저트를 만든다.




그날은 AT 필드를 가동시키며 앞치마까지 팡팡 했지만, 정작 배가 고프진 않았다.

칼을 빼든 이상 무라도 썰어야 했기에 냉장고를 뒤졌다.


그래놀라, 크림치즈, 다이제스트, 초콜릿… 그래, 단 거다.


불 안쓰고 간단하게 만드는 나만의 티라미수.


다이제스트에 커피 원액을 적셔 맨 밑에 깔고,

크림치즈에 생크림과 설탕을 섞어 올린다.

그 위에 그래놀라와 초콜릿을 뿌리면 끝.

하지만 왠지 심심해서 그래놀라를 프라이팬에 살짝 볶았다.

(또 불을 썼다.)


생각보다 그래놀라는 빨리 탔다. 약간 탄 향이 나는 것 같지만 무시하기로 한다.

완성된 비주얼은 꽤 괜찮았다.

흑백요리사의 ‘밤 티라미수’에서 밤이 빠진 버전이라고 자기합리화를 하며, 혼자 웃었다.


요리를 하다 보면 시간은 훌쩍 간다.

완성된 음식을 식탁에 놓고 사진도 몇 장 찍는다.

딱히 공유할 곳은 없지만, 그래도 사진이 잘 나오면 기분이 좋아진다.


앉아서 한 숟갈 떠먹는다.

생각보다 맛있다.

아까보다 내 상태가 조금 나아진 것 같다.


조금 더 나아지면,

그 땐 “이 음식들, 나눠줄 사람이 없을까?” 고민하게 될 것이다.



좀 이따가 슬슬 하지 뭐.
난장판이 된 부엌을 수습하는 것도,
내가 겪고 있는 이 복잡한 시기도.




배가 차면, 마음도 좀 느긋해진다.

이따가, 슬슬 하면 된다.






*제 이야기를 담은 연재 브런치북을 읽으시면 이해에 도움이 되실 수 있습니다.

용기 내는 당신을 응원합니다.*


[연재 브런치북] 대기업, 성추행, 그리고 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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