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연채집
작년에는 공동텃밭을 일 년 동안 빌려 씨를 뿌리고 수확해서 먹었다.
작은 땅이었지만 공간을 쪼개서 앞쪽에는 꽃도 싶고 낮은 채소에서 키가 커지는 채소 순서로 공간을 나누었다. 그림책에서 본 것처럼 아이들 이름을 적은 나무팻말도 꽃아 두고 그 주변엔 아이가 좋아하는 한련화 꽃씨도 뿌려두었다. 사춘기 아이들을 밖으로 끌고 나올 핑계와 가족들끼리 씨를 뿌리고 수확하는 재미를 갖기 위해 야심 차게 시작했다. 하지만 아이들에게 주말마다 텃밭에 가자고 꼬드기면, 텃밭은 왜 해가지고 자꾸 귀찮게 하냐는 핀잔을 대차게 들어야 했다. 그렇게 봄에 주황색 한련화가 목이 꺾이도록 흐트러지게 피고 여름, 가을, 겨울이 될 때까지 씨 뿌리고 수확하고 잡초를 뽑는 즐거움은 나와 남편만 누렸다. 사계절이 지나는 동안 나무팻말의 주인공들은 딱 한번 왔다 갔다.
처음 시작하니 모르는 것 투성이라서 이 사람 저 사람한테 물어보는데 훈수 두는 이웃들의 조언을 담기엔 땅이 너무 작았다. 모종 파는 곳에 가니 별천지다. 서른 한 가지 모종 중에서 어떤 걸 골라 심어야 하나 깊이 고민하고 있는데, 모종들도 모두 때가 있다고 한다. 무슨 아이스크림 가게처럼 골라서 심을 수 있는 줄 알고 이것저것 골랐던 것을 다시 제자리에 갖다 놓았다. 다시 자연 앞에서 겸손한 마음가짐으로 기본에 충실하기로 하고 필수 야채인 상추를 일 순위로 고르고 샐러드 해 먹으라고 화원 주인장이 골라준 로메인, 루꼴라 모종만 받아 들었다.
날이 따뜻해지고 다시 화원에 들렀더니 심을 수 있는 모종이 더 많아졌다.
호기심에 딸기, 비트, 양상추, 당근도 두 개씩 샀다. 대파는 한살림에서 장을 보고 뿌리를 가져다 땅에 심었다. 쉽게 잘 자라니 열무는 꼭 심어보라고 이웃들이 권유한 말이 생각나 열무씨도 하나 달라고 했다. 만개쯤 되어 보이는 열무씨앗들을 깨를 뿌리듯 솔솔솔 뿌리고 흙을 덮어주었다.
열무김치를 담가 비빔밥도 해 먹고 소면에 넣어 열무국수까지 생각하니 침이 고인다. 물김치도 해서 여름 내내 시원하게 먹어야지.
1주일 후에 가보니 귀여운 열무새싹들이 동글동글하게 올라왔다. 땅의 힘이란 이런 거구나. 그저 씨만 뿌렸을 뿐인데, 땅은 이렇게 대가 없이 먹을 걸 준다.
열무는 매일매일 쑥쑥 자랐다. 같은 자리에서 여러 개의 열무가 자라느라 땅이 좁아 보였다. 무너기로 씨앗이 뿌려진 자리는 서로 얼굴을 내밀고 자라느라 빈틈이 없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조금씩 나눠서 씨앗을 뿌렸어야 했는데, 초보농사꾼탓에 서툴렀다. 부족한 내 솜씨에도 열무는 잘 자라주었다. 땅속에는 무가 자라고 땅 위로는 이파리가 푸릇푸릇 올라왔다. 빈 땅을 모두 메꾼 열무로 부자가 되어 흐뭇하게 텃밭을 바라보고 있는데, 이웃 텃밭주인들이 어서 뽑아서 먹어야지 뭐 하고 있냐며 핀잔을 준다. 야리야리할 때 뽑아서 먹어야 맛있지 더 굵어지면 질기고 맛이 없다며 오늘 당장 뽑아먹으라고 한다. 저거 보라고 애벌레가 먹고 있지 않냐고 한다.
아, 그런 거냐고 꽃을 보듯 열무를 감상하고 있던 나는 그제야, 열무를 수확했다. 애벌레가 먹던 열무 몇 개는 마저 먹으라고 남겨두었다. 땅속에서 윤기 나는 굵은 지렁이들이 나왔다. 니 덕분에 이렇게 열무가 잘 자랐구나 싶어 열심히 놀라고 흙으로 덮어주었다. 수확한 열무는 너무 많아서 안고 가야 할 정도였다. 문제는 집에 가져가도 저 양을 감당할 소쿠리가 없다는 거다. 싱크대에 넣고 여러번 나눠 씻는 건 씻는다지만, 물기를 빼두어야 하는데. 결국 마트에 가서 소쿠리를 장만했다. 씻어도 씻어도 끝이 보이지 않는 열무와 씨름하느라 진이 다 빠졌다. 씻다가 집까지 데려온 달팽이를 안전하게 골라내느라 시간이 더 걸렸다. 열무를 씻은 건지 달팽이를 살린 건지 나를 씻긴 건지 싱크대에 틀어놓은 물줄기가 튀어 앞치마가 축축하다.
초보 농사꾼이 깨달은 교훈은 '욕심내지 말자'이다. 내가 감당할 수 있는 만큼만 씨를 뿌리고 수확해 먹는 거. 다행히 열무는 버무리면 양이 확 줄어 절여졌고, 나의 수고가 무색하게도 맛있게 담가졌다. 여름까지 내내 맛있게 먹어서 나도 모르게 내년에도 또 텃밭을 해야겠다며 마음을 바꿔먹었다. 직접 키워먹은 상추, 로메인, 루꼴라의 식감이 달랐다. 무엇보다 냉장고에 넣어두어도 오래 싱싱했다. 깻잎은 심지도 않았는데 저절로 씨앗이 날아와서 땅에서 자라났다. 심은 양상추는 한 개만 자랐다. 달팽이와 애벌레가 먹고 있길래 차마 수확하지 못하고 인심 좋게 두었다. 비트와 나란히 심었던 당근은 길게 자라는 정체성을 잃고 비트를 닮아가며 동그랗게 자랐다.
먹을 것보다 잡초를 더 많이 뽑아냈으며 자라는 걸 지켜보는 재미를 수확해 갔다. 호기심에 토마토, 수박, 참외 모종도 사다 심었지만 토마토의 성장이 빨라 밭을 잠식해 가는 바람에 수박과 참외 열매는 구경도 못했다. 토마토는 잘도 자라서 지지대도 세워주고 빨간, 노랑, 주황색 토마토가 대롱대롱 열리면 부지런히 따서 먹었다. 매월마다 심어야 하는 작물달력을 보니 계절의 흐름에 따라 내가 먹던 밥상이 떠올랐다.
모두 자신의 때를 기다리는 자연은 서두르지도 않으며 새치기하지도 않으며 욕심내지도 않는다.
자신의 차례가 되면 최선을 다해 싹을 띄우고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고, 다른 작물들을 위해 자리를 양보하며 물러날 줄 안다. 땅의 매력에 빠지면 헤어 나올 수가 없다.
나는 소망 하나가 생겼다. 작은 시골집에 살면서 마당에 꽃과 텃밭을 키우고 손으로 흙을 만지며 살고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