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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싸라기 Oct 17. 2024

릴리트 호텔을 떠나며

8화

8화.

다음날 점심시간.

두 사람은 마치 첩보영화의 주인공처럼, 동료들의 눈을 피해 가면서 밖으로 나갈 타이밍을 보고 있었다. 어제 약속한 둘만의 점심시간을 가지기 위해서였다. 아무도 눈치를 채지 못하게 움직일 수 있었던 것 중에, 가장 크게 도움이 됐던 것은 바로 삐삐가 있었기에 가능했다. 오전 근무시간 동안,  둘만이 알 수 있는 암호를 정해서 신호를 보냈기 때문이었다. 드디어 탈출에 성공한 두 사람은, 마치 대단한 임무를 수행한 스파이처럼 서로 마주 보며 환한 미소와 함께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연희 씨, 뭐 먹을래요?”

“음, 돈가스요. 저 돈가스 좋아해요.”

“그래요. 들어갑시다.”

“잠깐!”

연희는 레스토랑 입구에서 성진을 불러 세운 후, 살짝 째려보는가 싶더니 까치발을 들고는 입을 살짝 맞추었다.

“오늘 하루 종일 뽀뽀하고 싶어서 죽는 줄 알았어요. 이제 살 것 같다. 성진 씨도 그랬죠?”

성진은 당황하며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연희 씨는 사람을 깜짝깜짝 놀라게 하는 재주가 있네요. 누가 보면 어쩌려고..”

“보면 어때요. 이제 들어가요.”

연희는 성진의 팔짱을 끼고 레스토랑으로 들어갔다. 대낮인데도 불구하고 레스토랑 안에는 꽤나 어두웠다. 가운데에는 동그란 테이블 세 개가 자리하고 있었고, 양쪽으로는 조그만  복도가 있는 구조였다. 그 복도 중간중간에는 사람 키만 한 고무나무 화분이 놓여 있었고, 사면이 유리로 된 철재 사각 케이스에 조그만 등이 켜져 있었다. 양쪽으로 길게 놓인 테이블에는 어깨높이 정도의 칸막이가 있어서 어느 정도 프라이버시가 보장되는 구조였다. 게다가 조명도 은은하게 비추고 있었고, 이런 곳은 누가 봐도 연인들끼리 밀어를 나누기에 적합한 공간임을 짐작할 수 있었다.

“우리 저쪽으로 가요.”

연희는 연신 신이 난 채 성진에게 재촉하며 구석진 곳으로 갔다. 원하는 곳으로 도착하자 연희는 성진의 옆에 앉았다. 그러자 성진이 못마땅한 듯 그녀를 바라보았다.

“연희 씨, 맞은편에 앉아요. 점심시간이라서 사람들이 들어올 텐데 연희 씨 유니폼 보면 어디 호텔 직원인지 금방 눈치챌 거예요. 소문이 빠른 곳이라서..”

성진의 말에 연희는 속상한 듯 눈꼬리가 내려간 채로 뾰루퉁 해졌다.

“흥, 싫어요. 여기 옆에 칸막이 때문에 잘 몰라요.”

“에이 그래도..”

“호텔직원은 점심도 같이 못 먹어요?”

“그런 뜻 아니란 거 알잖아요.”

성진이 뜻을 굽히지 않자 연희는 갑자기 입고 있던 조끼와 타이를 풀고 머리에 쓰고 있던 머리 망도 뺐다. 그러자, 머리가 찰랑거리며 풀어졌다. 독특한 분홍색의 스커트만 아니라면 호텔리어라고 생각하긴 힘든 옷차림새가 됐다.

“자! 이제 됐죠?”

“정말 연희 씨 못 말리겠다.”

평소와는 다른 장소와 다른 모습으로 환하게 미소 짓는 그녀의 옆모습을 보자 성진은 아름답다고 생각했다. 하얗고 반듯한 이마 위와 어깨로 이어진 머리카락에서는 매혹적인 향기가 은은하게 풍겼고, 작고 오똑한 콧날 위에는 조그만 땀방울이 딸기 씨앗처럼 맺혀 있었다. 

“지금 나보고 반했죠? 그쵸?”

속마음을 들킨 성진은 얼굴이 상기되며 연신 마른기침을 해댔다.

“아니, 그런 게 아니고...”

“호호호 에이 거짓말이 표가 나는데?”

“이제 식사합시다.”

“자, 이거 먹어요.”

연희가 가지런히 잘려진 자신의 돈가스 접시를 성진의 앞으로 내밀었다.  

“이런 건 내가 해줘야 하는데..”

“누가 해주면 뭐 어때요. 말했잖아요 앞으로는 내가 챙겨 준다고.”

성진은 잠시 그녀의 얼굴을 지그시 쳐다보았다. 너무나도 오랜만에 느껴보는 소소한 행복과 사랑을 받는다는 감정을, 아내가 아닌 다른 여자에게도 느낄 수 있다는 것이 신기하기만 했다. 

“또 또.. 쳐다본다. 내가 그렇게 이뻐요?”

돈가스를 오물거리며 환하게 미소 짓는 그녀의 모습이 성진은 사랑스럽게 느껴졌다.

“나 말이야.. 이래도 되나 모르겠어요.”

“뭐가요?”

“내가 연희 씨를 좋아하는 게 말이 되는지..”

“또 그 소리. 성진 씨 마음은 어때요? 성진 씨 마음이 중요해요. 주변에 다른 것들은 생각하지 말고요. 성진 씨 인생인데, 왜 자신 이외의 것들에 대해서 눈치를 보세요?”

“그래도..”

“이제부터는 자신을 먼저 보세요. 그러다 보면 저에 대한 마음도 어떤지 알 수 있을 거예요. 식기 전에 어서 먹어요. 빨리 먹고 근처 공원에서 소화도 시키고 들어가려면 시간이 빠듯해요.”

두 사람은 식사 중간에 단무지와 음식도 서로 먹여주며 즐거운 식사시간을 보냈다. 식사를 마친 두 사람은 레스토랑을 나올 때 역시, 들어올 때처럼 사주경계를 하는 군인들처럼 주변을 두리번거리면서 공원 쪽으로 뛰다시피 걸어갔다. 이제는 여름을 알리는 매미소리도 제법 간간이 들리고, 식사를 마친 직장인들이 삼삼오오 모여서 짧은 점심시간 동안 여유로운 휴식을 즐기는 모습도 보였다. 성진은 여전히 눈에 띄는 연희의 스커트 색상이 마음에 거슬렸다.

“내 유니폼 때문에 불편하구나.”

“아무래도 좀..”

“음 다음에는 차라리 집에 일이 있다고 하고, 숙소에서 사복으로 갈아입고 나와야겠어요. 그게 차라리 불편하게 눈을 피해서 나올 일도 없고, 밖에 돌아다니기에도 좋고요.”

“자주는 힘들어요. 아무리 그래도 얼굴을 아는 사람을 마주칠 수 있고요. 차라리 퇴근하고 봐요. 점심시간은 눈치가 보여요.”

“에이, 성진 씨 쫄보네. 호호.”

성진은 자신을 놀리며 앞서가는 연희의 밝은 미소와 따사롭게 내리쬐는 햇볕이 참 잘 어울린다고 생각하며, 아무런 말없이 그녀를 바라보며 따라갔다. 

점심시간이 끝나기 10분 전, 두 사람은 따로따로 정문과 후문 쪽으로 나눠서 들어갔다. 

성진은 정문으로 연희는 후문으로 들어왔다. 그러자, 점심식사를 마치고 화장실로 향하던 진경이 입에 칫솔을 앙 다문 채 놀란 토끼 눈을 하고는 성진을 바라봤다.

“어, 오라버니 밖에서 먹고 왔어?”

“응 그래.”

“웬일이유, 돈 아깝다고 분식집에서 떡볶이도 안 사 먹는 사람이.. 누구랑 먹었는데? 언니 왔어?”

“아니야 그 사람이 여길 왜 와.”

“그럼, 혼자서?”

진경이 치약 거품을 입술에 머금은 채 여전히 칫솔질을 하며 말하자 성진이 인상을 찌푸렸다.

“야 야 더러워 죽겠네. 가서 양치나 하고 와.”

진경이 오물거리며 치약거품을 입안으로 밀어 넣으며 또다시 물었다.

“밖에서 점심을 혼자서 먹었다고? 이상한데...”

“뭐가 이상해! 난 혼자서 밥 먹으면 안 되냐?”

“평소 오라버니답지 않아서 하는 소리지. 혹시 연애하우?”

“이 자식이 근데.. 별소리를.”

“어 어, 이봐 당황하는 게 정말 수상 하네. 누군데 나한테만 말해봐.”

“가서 빨리 양치나 하고 와! 총지배인님 오실 때 됐어.”

“거기 딱 기다려. 그냥 안 넘어갈 테니까.”

진경이 연신 칫솔질을 하며 화장실로 들어가자, 성진은 덜컥 겁이 났다. 평소 눈치가 빠른 저 인간한테 걸린 건가 싶었다. 언제 옷매무새를 고쳐 입었는지 말끔한 유니폼과 머리손질을 끝내고 멀리서 스탠바이를 하고 있는 연희가 보였다. 이내 성진이 수화를 하듯이 신호를 보내자, 신기하게도 알아들은 연희도 절대로 들키지 말라는 듯 양팔을 교차시키며 답장을 했다. 두 사람의 손짓 발짓은 정해진 암호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알아채는 것이 놀라울 따름이었다. 마음이 통하는 사람끼리는 불가능이란 없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양치를 마치고 나온 진경이 가자미눈을 뜨며 성진을 추궁했지만, 결연한 마음으로 대하는 성진은 철저하게 시치미를 떼며 물러서지 않았다. 그렇게 어찌어찌 아슬아슬한 순간은 넘어갔고 한동안 두 사람의 몰래 데이트도 무사하게 이어졌다.

점심시간의 데이트는 일주일에 한 번 정도로 줄었지만, 비교적 안심이 되는 퇴근 후의 데이트가 늘어났다. 퇴근 후의 데이트 장소로는 주로 저녁시간이거나 마감조로 일하고 마치는 새벽시간이었기에 주로 호프집이나 고깃 집 아니면 해장국 집이었다. 하지만 그 누구도 근무조 편성에 성진과 연희가 늘 같은 조에 편성되는 것에 의문을 가지는 사람은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마감 조를 같이 하던 두 사람은 한가해진 늦은 저녁시간에 베버리지 바에 기대서 창밖을 바라보며 이런저런 대화를 하고 있었다.

“성진 씨.”

“응?”

“오늘 끝나고 한잔 할래요?” 

“그래. 어디로 갈까 저번에 갔었던 해장국집? 거기 맛있다고 했잖아.”

“거기 말고 다른 데서 먹어요.”

“새벽에는 해장국 집 말고 마땅한 데가 없는데.”

“우리 집으로 가요.”

“에이, 시영 씨 때문에 불편해.”

“오늘은 괜찮아요. 언니 없어요.”

“시영 씨 어디 갔어?”

“시골집에 일이 있어서 3일 동안 연차 내고 내려갔어요.”

“아, 그렇구나. 그래 그럼.”

“그런데...”

연희가 평소답지 않게 망설이는 듯 머뭇거렸다.

“왜? 무슨 문제라도 있어?”

“저... 오늘 자고 가면 안 돼요?”

“뭐? 그건 좀 곤란한데.”

“왜요, 와이프 때문에요?”

“그것도 그렇고, 요즘 연희 씨랑 있다 보니 자주 늦어서 집사람이 이상하게 봐서..”

“오늘 회식 있다고 하면 안 돼요?”

성진은 망설였다. 연희의 제안에 마음이 흔들렸기 때문이었다. 성진도 언젠가는 이런 일이 생길 거라고 생각했지만, 막상 그날이 다가오니 덜컥 겁이 났다. 곰곰이 생각에 잠긴 성진이 결심한 듯 연희의 손을 잡았다.

“그래! 그러자. 오늘 같이 있자.”

연희는 환한 미소를 지으며 맞잡은 손을 들어 올려 성진의 손등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 그리고 어두운 창밖에 흔들리는 나뭇가지를 바라보던 두 사람은, 퇴근시간이 빨리 오기만 기다렸다. 그렇게 두 사람은 베버리지 바에 기댄 채 한쪽 손은 꼬옥 잡고 서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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