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 이별
"제니카! 우주사령부에 결과 보고해야죠?"
"네! 지금 곧 송신하려고요."
코리아에 돌아온 제니카는 우주사령부에 송신하며 그동안 일을 정리하였다.
동공은 동공대로 앞으로 할 일을 구상하였다.
제니카와 함께 지구로 와서 했던 일이, 뭔가 이루어졌다는 성취감으로 마음이 편했다.
이제야 비로소 목적과 목표가 보였다.
불교를 알기 전에는, 즉 깨닫기 전에는 그냥 업보란 인연에 의해 나 자신이 태어난다고 여겼다.
부처님은 어떠한 말씀을 전하기 위해 오셨다고 한다.
그래서 나 역시 부처님 가르침대로 이제는 내가 태어난 것이 아니라, 온 것이라고 느꼈다.
내가 할 일을 하러 온 것이다.
그것은 내가 깨닫고 불교의 진리를 가까운 사람에게 먼저 전하고 더 나아가서는 모든 사람들에게 전한다.
불교는 깨닫고 생활 속에서 더 행복을 얻기 위한 것이다.
십이인연은 어떠한 인연에 의해 구속된 것 같지만, 그러한 인연을 위한 길은 아니다.
이것은 진정한 자유가 아닌가 싶다.
내가 나의 길을 스스로 정해 가는 것이다.
내가 미륵불이던, 어떤 부처님이던 내가 부처가 되고 부처의 뜻을 전하는 것이다.
이를 위해 인류의 발전은 어떻게 이루어졌나, 이것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우리가 예전에 몰랐지만, 어떠한 인연으로 만나게 되어, 서로 모르는 다수가 유연하게 협동할 수 있는 능력과 허구로 만들어진 완전한 상상의 이야기를 믿을 수 있는 능력이 있었기에 이 두 가지 능력 때문에 인류는 설화와 신화를 창조해 나가면서 조그만 부락에서 지금의 현대문명을 이루었다.
우리도 이렇게 만나 어떠한 목적과 목표를 위하여 이별을 하게 되지만, 또다시 언젠가 만날 수 있으리라.
동공은 여기까지 생각이 이렇게 미치자, 이제는 어떤 이별도 할 수 있다고 자신의 마음을 굳게 믿었다.
무존자의 별, 덕종도 궁금하고, 덕종도 동공에 대한 궁금증이 상당할 것이다.
제니카를 만나면 할 이야기가 많을 것이다.
이제는 모두가 서로를 이해하게 되었고 그 다양성을 존중하며, 또한 그들의 자유도 존중해야 할 것이다.
이 세상에서 어떤 권력자도 강요할 수 없는 것이 두 가지 있다고 한다.
바로 '존경'과 '사랑'이다.
우리는 이것을 토대로 앞으로 존경하며 사랑하고, 우정은 변하지 않을 것이다.
사람이던, 사물이던 너무 가깝지도 않게, 너무 멀지도 않게 보아야 멋지게 볼 수 있다고 한다.
사람도 적당히 떨어져 바라볼 때 신비롭고 호기심이 인다.
이와 같이, 제니카와 덕종도 이런 맥락으로 보아야 할 것 같다.
우리는 '미래 욕'으로 살아갈 것이다.
인간의 강력한 욕구 중 하나가 앞날을 알고자 하는 '미래 욕'이라고 선사가 말씀하셨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이 욕구는 인간이 지구 위에 존재하는 한 영원히 계속된다고 했다.
그러나 미래는 늘 가변적인 것이며, 또 천기누설이라는 금기의 영역인 까닭에 불확실하다.
그래서 미래학의 언어들은 두리뭉실한 표현과 애매모호한 중첩된 언어로 구성되어 있다.
누군들 미래가 궁금하지 않겠는가?
그렇지만 자신들 스스로가 알아서 행할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그 한마디가 주는 안심의 무게감은 적지 않다.
스스로 알아서 할 때, 가장 미래 욕에 근접하게 될 것 같기 때문이다.
미래 욕을 위해 떠날 사람은 떠나야 하고, 남을 사람은 남아야 한다.
그리고 사람의 인연은 오거나 가거나 스스로가 움직여야 한다.
마치 물의 흐름과 같은 이치다.
모든 것이 때가 있다.
제니카와 동공도 이제 헤어질 때가 되었다.
떠나야 할 때, 떠나는 게 가장 아름다운 이별이 될 것이다.
제니카는 더 큰 우주의 세계로 원대한 목적을 가지고 갈 것이다.
동공, 역시 더 깊은 세계로 심오한 철학을 얻으러 갈 것이다.
제니카는 우주인으로서 더 성장해 나갈 것이고, 동공은 지구인으로서 더 성장해 나갈 것이다.
이것은 미래 욕이라는 목적과 목표가 있는 한, 계속될 것이다.
동공은 제니카와 헤어지고 지구에 남아 수행의 길에 들어섰다.
모든 게 새롭고 처음부터 시작해야 하지만 나름대로 즐거움이 솟아났다.
그것은 제니카와 함께한 경험과 사랑으로 희망이 가득했다.
황량한 땅이 되어버린 고향과 주변은 망망대해 바다뿐이지만, 할 일을 찾았으니 무엇보다 기뻤다.
옛날 선사들 시가 생각났다.
'황량한 땅에 살면서도 나름의 즐거움을 찾았으니
이는 대인의 머묾이로다.
홀로 자고 깨어나고 눕는
이 즐거움을 절대로 주변에 알려주지 않으리라.
그리고 선사의 글도 마음속에 새겼다.
'산이 높지 않아도 인물이 명산이다.
물이 깊지 않아도 용이 살면 명천이다.
누추한 공간이지만 덕의 향기가 가득하면 좋은 집이다.'
그렇다. 명당은 만들어진다고 생각이 들었다.
옛말에 꽃의 아름다움은 열흘을 넘을 수 없고, 권력은 10년을 지키기 어렵다고 했지 않은가.
삼대 이상 부자 없고, 삼대 이상 거지도 없다.
알고 보면 명당이란 고정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지는 것이다.
그런 까닭에 세월이 흐르면서 내 뜻에 따라 좋아지게 만들어야 한다.
계속, 선사들의 말씀을 마음속에 새겼다.
그 선사의 어록에 늘 시정(도시)과 아란야(고요한 곳)가 다르지 않다고 했다.
황량하고 망망한 대해라 할지라도 마음의 중심만 챙길 수 있다면 수행 공간으로 환원할 수 있을 터이다.
그리고 내가 세상에 온 이유와 함께, 해야 할 일이 바로 이것이다.
중생들은 업이란 인연으로 사는 업생이다.
부처님은 이 세상에 오신 것은 '원생'이다.
즉 중생들을 제도하기 위한 원력을 가지고 이 사바세계에 오셨다.
그러므로 내가 지금 행하여야 하는 것은 업생에서 원생으로 살아야 한다.
그게 부처님의 가르침이고 수행자의 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