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_사냥철에 양들은 도망쳐요.
아직 학교를 떠나기 전의 이야기다.
스무 살의 겨울, 공기는 싸늘하지만 신선했고, 어딜 가나 캐롤이 울려 퍼지며 어딘가 따뜻한 기운이 감돌았다.
밤은 일찍이 깔리던 시기였고, 거리의 크리스마스 장식은 빛나고 있었다.
적당한 추위 덕분에 두꺼운 코트를 여미고 걸어 다니는 것이 나름의 즐거운 일상이었다.
마지막 수업이 끝나고 은별과 함께 정문 쪽으로 걸어갔다.
우리는 담배에 불을 붙이고, 익숙한 연기를 맞으며 평소처럼 잡담을 나눴다.
은별은 최근 만나는 남자에 대해 얘기했다.
그의 매력에 빠진 것처럼 보였고, 이따가 그와 술을 마시러 갈 생각에 들떠 보였다.
은별은 자랑 섞인 이야기를 마치고는 먼저 자리를 떴다.
나도 마지막 담배를 태우고 슬슬 갈 참이었다.
밤에는 간단히 캔맥주를 사서 집으로 돌아가기로 마음먹은 상태였다.
담배 연기가 공기 중에서 희미하게 사라지는 것을 보며, 반쯤 탄 담배를 아스팔트 바닥에 떨어뜨렸다.
그것을 발로 비벼 끄려는 순간, 옆에서 낯선 목소리가 들려왔다.
“저기 훈아…”
기어들어가는 목소리가 들렸다.
목소리 쪽으로 고개를 돌리자, 의외의 인물이 서 있었다.
‘연’ 이었다.
연은 학교에서 겨우 얼굴만 알고 지내던 동기였다.
사실 처음엔 여자 목소리만 듣고, 은별이 다시 돌아온 줄 알고 작게 웃음을 머금고 있었다.
곧 단발의 낯선 여자라는 사실에 얼굴이 화끈거렸다.
연은 나를 부르고도 나를 똑바로 보지 않고, 그저 바닥만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의 시선은 아마도 내가 아스팔트에 버린 담배에 머물러 있었을 것이다.
순간 흡연자라는 사실이 부끄러워, 발로 꽁초를 가렸다.
연에 대해 아는 건 별로 없었다.
친구라고 하기에도 애매한 면이 많았다.
그녀에 대한 기억은 주로 강의실 앞에서 발표하던 모습뿐이었다.
그날 그녀는 흰 스웨터와 청바지를 입고 있었다. 옷이 펑퍼짐하지는 않았는데, 몸매를 드러내지 않는 스타일이었다.
앉아 있는 모습만 보다가 처음으로 일어선 모습을 봤을 때, 생각보다 키가 작다는 것.
“이따가 저녁에 시간 있어?"
연의 목소리는 여전히 기어 들어가고 있었다.
대신 아까와 다른 점은 이번에는 바닥이 아닌 날, 내 눈을 똑바로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는 예쁜 눈을 가지고 있었다. 크고 맑은 눈이었다.
“어. 있어… 시간 돼.”
나는 짧게 답했다.
“그러면, 나랑 같이 밥 먹을래?”
연은 작은 목소리로 제안했다.
나는 연말에 혼자 있기 싫었다. 딱히 거절할 이유도 없었다.
늦은 밤이라 끼니를 때우는 가게는 모두 문을 닫은 후였다.
나는 술을 마시자고 제안했다. 연은 거절하지 않았다.
술을 마시며 그녀에 대해 조금씩 알게 됐다.
연의 고향은 이천이고 지금은 서울로 올라와 자취하고 있다는 것.
학창 시절 공부를 잘하는 편이라 지금보다 좋은 대학으로 진학할 수 있었지만, 장학금을 위해 하향 지원했다는 것.
방학을 계기로 방을 비우고 오늘 밤에 고향으로 돌아가려고 했다는 것.
그리고 오늘 밤 서로가 누군가와 몸을 포개고 온기를 나눈 게 처음이라는 것.
그날 밤, 침대에 함께 누워있었다.
어째서인지 보일러가 작동하지 않아, 침대를 끌어안고 있었다.
이따금 몸을 움직일 때, 발 끝이 바깥으로 빠지면 찬기가 느껴져 놀라긴 했지만 이불속에 데워둔 손으로 상대방의 찬 발을 만질 수 있어서 기분이 좋았다.
티비에는 영화가 한 편 틀어져 있었는데, 내용은 전혀 기억나지 않았다.
영화가 끝나고 엔딩 크레딧이 올라오면서 음악이 들렸다.
음악을 들으며 난 은별에게 질문했다.
“나의 어떤 점에 끌린 거야?”
음악 소리가 작은 탓에 내 목소리가 상대적으로 크게 들렸다.
순간 너무 크게 말한 줄 알고 놀랐지만, 다시 침착해졌다.
그녀는 나와 같이 티비 속의 엔딩 크래딧이 올라가는 장면을 멍하니 쳐다볼 뿐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여러 번 같은 질문을 물어봐도 반응은 같았다.
음악 소리가 작은 탓에 내 목소리가 상대적으로 크게 들렸다.
순간 너무 크게 말한 줄 알고 놀랐지만, 다시 침착해졌다.
그녀는 나와 같이 티비 속 엔딩 크레딧이 올라가는 장면을 멍하니 쳐다볼 뿐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난 같은 질문은 계속해보았지만, 반응은 같았다.
잠시 후 그녀가 배시시 웃기 시작했다.
나는 웃음을 좋아했다. 이 사실을 연을 통해 처음 알았다.
연이 웃자, 그녀의 둥근 눈은 완전히 반달 모양으로 접혀서 더욱 미모가 돋보여 보였다.
웃음을 보니 껴안고 싶어졌다. 이불속에서 팔을 뻗어 그녀의 몸을 안쪽으로, 더 가까이 끌고 왔다. 온기가 강하게 느껴졌다. 그리고 다른 질문을 했다.
“원래대로 고향으로 돌아갔다면… 오늘은 어떤 걸 하려고 했어?”
“시를 읽다가 잠들까 했어.”
그녀는 내 얼굴을 바라보며 대답했다.
손은 이불속에서 내 배를 쓸어내리고 있었다. 손은 더 내려가려다, 올라옴을 반복했다.
나는 ‘큭큭’ 웃으며 똑같이 연의 배를 어루만졌다.
시를 읽는다라. 의외의 답이었다. 나는 다시 질문했다.
“자주 시를 봐?”
“자주는 아니고, 간혹 그래.”
“어떤 시를 읽을 생각이었는데?”
그녀의 얼굴을 계속 보고 있었다.
그러자 눈에 눈곱 몇 마디가 보였다. 나는 손가락으로 그것을 살살 긁어내며 물었다.
그녀는 입술을 오므리며 하지 말라는 듯 찡그렸다. 눈곱을 잘못 긁다가 긁혀서 아팠던 것이다.
난 “미안, 미안.”이라고 말하였고, 연은 “괜찮아.”라고 답했다.
그리고 얼굴을 내 쪽으로 가까이 내밀었다.
난 눈곱을 마저 긁어냈다.
그녀는 다시 질문을 곱씹는 듯 ‘음’ 소리를 냈다. 잠깐의 침묵 후 이렇게 답했다.
“... 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리야.”
그녀의 목소리에는 옅은 웃음소리가 섞여 있었다.
“무슨 말이야?”
내가 물었다.
“입 밖으로 직접 말하니까, 상당히 부끄럽네. 시 내용이야”
연은 이 말을 하고 다시 티비를 쳐다봤다.
그때 연이 어떤 표정을 짓고 있었는지 지금으로선 알 길이 없다.
나도 질문을 하고 바로 티비 쪽을 쳐다봤기 때문이다.
어렴풋이 봤을 법도 한데, 기억의 파편조차 없다.
대신 창가 유리를 통해 비친 그녀의 형체는 생각이 난다.
다만 늦은 밤이라, 새까맣고 은은한 빛만이 반사되고 있어서 구체적이지 않다.
고개를 그녀의 앞쪽으로 내밀었다면 볼 수 있었을까 싶다.
그 후 6개월 동안 연은 내 집에 살았다.
우리는 부부처럼, 어쩌면 오래 알고 지낸 친구처럼 지냈다.
요리하고, 떠들고, 책 읽고, 한 순간 서로 눈을 바라보다 끌림에 이끌려 자고, 체온을 느끼고, 우리는 같은 하루를 반복했다.
무엇 때문에 그녀에게 끌렸던 걸까?
눈 외에는 끌림의 이유가 생각나지 않는다. 성적인 호기심일까? 누군가 우리의 관계에 대해, 그 안에 사랑에 대해 묻는다면… 이렇게 약간의 정적을 가미한 후 “사랑하니까 같이 살겠죠.”라고 답할 것 같다.
연은 나에게 딱 그 정도 마음이었다.
솔직히 말해, 사랑이 무엇인지 몰랐다.
신이 인간에게 부여한 성적 본능을 해소하기 위해 ‘적절한 관계’라고 답했다기에는 그 표현이 정 없는 표현으로 보일지 모른다.
사실 이 질문은 연과 같이 살고 있다는 사실을 은별에게 말하고 나자, 은별이 내게 한 질문과 답이었다. 내 답을 듣고 은별은 이렇게 말했다.
“너 정말 쓰레기 새끼다.”
“...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리야.”
<향수>에 대해서는 알고 있었다.
어렸을 때, 그러니까 한창 노트북으로 소설 쓰기를 즐겼을 때다.
엄마가 일을 나가시면 종종 삼촌이 놀러 왔었다.
엄마와 나이 차이가 많았던 삼촌은 대학생이었다. 형처럼 느껴졌지만, 난 말이 없었다. 낯가림이 심했기에 삼촌이 고생했었을 것이다.
삼촌은 엄마의 차로 자주 드라이브를 다녔다.
특히 가까운 곳에 여행을 가는 걸 즐겼다.
멀리 바다를 보는 게 취미인 것 같았다. 삼촌은 내게 같이 드라이브를 가자고 졸랐었다.
못 이기는 척 삼촌과 바다를 간 적도 많았다.
하지만 기대에 비해 별로였다.
난 여행보다는 모르는 단어를 아는 게 좋았다. 아니면 아무 책이나 읽어 주길 바랐다.
삼촌은 책을 읽어달라는 내 부탁을 듣고, 시집을 꺼냈었다.
나는 시집이 싫었다. 질색했다.
시는 도저히 무슨 맛으로 읽는지 몰랐다. 구청 도서관에서 빌려 읽어 봤었지만, 시에 대한 불신앙만이 서서히 잠식할 뿐이었다.
그리고 이 불신앙이 박살 난 건, 삼촌이 어떤 시를 처음 읽어 줄 때였다.
<향수 - 정지용>
넓은 벌 동쪽 끝으로
옛 이야기 지줄대는 실개천이 회돌아 나가고,
얼룩백이 황소가
해설피 금빛 게으른 울음을 우는 곳,
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리야.
질화로에 재가 식어지면
비인 밭에 밤바람 소리 말을 달리고,
엷은 졸음에 겨우 늙으신 아버지가
짚베개를 돋아 고이시는 곳,
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리야.
흙에서 자란 내 마음
파아란 하늘빛이 그리워
함부로 쏜 화살을 찾으려
풀섶 이슬에 함추름 휘적시던 곳,
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리야.
전설바다에 춤추는 밤물결 같은
검은 귀밑머리 말리는 어린 누이와
아무렇지도 않고 예쁠 것도 없는
사철 발 벗은 아내가
따가운 햇살을 등에 지고 이삭 줍던 곳,
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리야.
하늘에는 석근 별
알 수도 없는 모래성으로 발을 옮기고,
서리 까마귀 우지짖고 지나가는 초라한 지붕,
흐릿한 불빛에 돌아앉아 도란도란 거리는 곳,
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리야.
...
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리야
삼촌의 무릎을 베고, 시를 듣던 때가 생각난다.
시를 들었을 때 내가 어떤 표정을 짓고 있었을까, 궁금해졌다.
시에 감동을 느낀 것은 아니었을 텐데, 순간은 따뜻한 기억으로 남아 있다.
입가에 미소가 서려 있는 것처럼, 무언가 생각하고 있었다.
차마 꿈에라도 잊혀지지 않을 기억이다
시 : 정지용 - 향수
그림 : vincent willem van gogh
(Bedroom in Arles, The Sea at Les Saintes-Maries-de-la-Mer)
책 표지 : 향수-정지용, 유종호 엮음 - 민음사
* 본 회차가 1부의 마지막 회차입니다.
* 내일부터 2부인 [사냥철에 양들은 도망쳐요 2부] 에서 계속 연재됩니다.
(2부 브런치 북 링크 : https://brunch.co.kr/brunchbook/leeajeannovel2)
(14화 링크: https://brunch.co.kr/@leeajean/4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