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_사냥철에 양들은 도망쳐요.
주변에서 은별과 나에 대해 여러 얘기가 돌았었다.
분명 둘 중 한 명은 상대방에게 마음이 있다는 식으로 말이다.
보통은 내가 마음이 있는 쪽의 대상이 되곤 했다.
다른 사람 눈에는 내가 은별을 바라보는 시선이 특별해 보였나 보다.
당시에 난 별 감정이 없었다.
적어도 그렇게 생각했다. 다만 은별이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을지 궁금했었다.
학교의 술자리에서 다 같이 모였을 때, 누군가 은별에게 나를 좋아하냐고 물어본 적이 있었다.
은별은 단호하게 손사래 치며 아니라고 말했었다.
은별의 목소리에는 약간의 떨림이 있었지만, 아무도 눈치채지 못한 것 같았다.
훗날 알게 된 사실은 나를 좋아했었다고 한다. 하지만 그때는 이미 서로에게 각자의 연인이 있었다.
다시 잔을 기울였을 때, 은별은 완전히 취해 있었다.
은별의 눈동자는 초점을 못 잡고 있었고, 적당히 말도 꼬이기 시작했다.
은별은 취하기 시작하면 평소에는 입 밖으로 내지 않는, 마음 깊숙이 숨겨둔 얘기까지 꺼냈다.
그녀의 술버릇 중 하나였다.
오늘 밤도 예외는 아니었다. 어김없이 들었던 얘기가 시작됐다.
은별에게는 조각으로 흩어진 기억이 많았다.
그녀에게는 두 명의 오빠가 있었다. 큰 오빠는 그녀가 태어나기도 전에 세상을 떠났다.
큰 오빠와는 어떠한 기억도 없었기에 그녀가 이 죽음에 대해 처음 들었을 때는 별다른 감정이 안 느껴졌다고 한다.
단지 그의 존재를 가족 앨범 속 흐릿한 사진으로 간신히 느끼고 있었다.
하지만 작은 오빠는 달랐다.
교통사고가 원인이었다. 그녀는 갑작스러운 마음속의 소실됨을 견딜 수 없었다.
이 부분에서 은별의 목소리는 떨렸다. 장례식에 가고 싶었지만, 은별의 아버지가 막았다고 한다.
아버지는 이혼 후 자신의 전처를 선택한 아들을 원망하였고, 자기 딸이 어떤 식으로든 아들과 엮이는 걸 원치 않았다.
결국 은별은 장례식에 가지 못했다.
몇 년이 지나고 아버지의 사업이 실패하고 나서야 은별은 한국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오랜만에 보는 어머니는 은별에게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하지만 이것도 오래 못 갔다.
은별이 대학교에 진학하고 2년 정도가 지났을까, 은별의 어머니는 모든 연락을 끊고 잠적했다.
이유는 알 수 없고, 이제는 알고 싶지도 않다고 한다.
은별은 다시 홀로 남았다. 우리가 서로에 대해 알게 된 건 이 시기쯤이었다. 나를 좋아했던 것도 이때였다.
남에게 비밀을 발설하는 것은 그다지 좋은 버릇이 아니다.
인간관계는 일종의 게임이다. 게임의 규칙은 간단하다.
상대방이 들고 있는 카드를 모두 소진시키면 된다.
참가자는 이기기 위해 가진 카드를 한 장씩 던진다. 그러다 카드가 먼저 소진된 쪽이 게임에서 진다.
깊은 감정을 드러내는 것은 게임이 시작하기도 전에 상대방에게 카드의 개수를 보여주는 것이나 다름없다.
그런 의미에서 은별은 나를 한 번도 이긴 적이 없었다.
“너, 또 얘기 안 듣고 이상한 생각하고 있지!”
은별이 짜증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아니, 다 듣고 있었어.”
내가 말했다.
오늘은 내가 처음으로 질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는 다시 자신의 옛 얘기를 반복했다. 다시 첫 째 오빠 얘기부터다.
학교를 그만두고 나서도 은별과 꾸준히 연락을 주고받았다.
어느 여름날, 그녀가 학교 회식에 오지 않겠냐고 말했었다. 집에서 할 게 없던 차에 모임에 나갔다. 학교와 관련된 모임은 다시 나갈 생각이 없었지만, 은별의 설득으로 따라나간 자리였다.
한강에 돗자리를 펼치고 앉아, 다들 한 손엔 캔맥주를 쥐고 있었다.
갑작스레 학교를 나간 나를 다른 이들은 반갑게 맞이해 주었다.
빈 캔맥주가 쌓여갔다. 마지막 캔 맥주를 들이켜는데, 우연히 강가 쪽에 무언가 보였다.
파티션 같기도 하고, 아니면 축제를 기념하는 표지판이 걸려 있는 것 같았다.
해는 진즉에 떨어진 상태라 정확히 무엇인지 보이지 않았다. 화장실을 간다는 핑계로 강가 쪽으로 걸어갔다.
파티션도 맞았고, 표지판도 맞았다.
예상과 다를 게 있다면, 몇 년 전에 강가에 빠져 죽은 사람을 추모하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는 거다.
그 주변을 조금 구경하다 다시 돗자리가 있는 쪽으로 돌아왔다.
웃고 떠들고 술을 마시는 데, 갑자기 속이 안 좋아졌다. 구역질이 올라왔다. 다시 화장실을 간다는 핑계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급하게 달렸다. 중간중간 소나기로 물이 고인 진흙탕에 발이 밟히는 것도 알아채지 못했었다.
그냥 달렸다.
공원의 공용 화장실에 도착했고, 그곳에 들어가 변기통을 붙잡고 저녁 내내 먹은 모든 걸 게워냈다.
다 부서진 치킨 조각, 정체 모를 찌꺼기, 지독한 맥주 냄새. 찝찝함이 입에 겉돌았다.
그다음에는 가래가 쉴 새 없이 목에 끓었다. 몸을 일으켜 세우고 세면대로 갔다.
수도꼭지를 틀고 물을 손으로 모아 물양치를 했다.
입에는 여전히 찝찝함이 고여 있었다. 흙 같은 게 묻은 손비누를 잡고, 이를 사정없이 닦았다.
그럼에도 변한 건 없었다.
순간 뒤쪽에서 물이 찰싹이는 소리가 났다. 처음에는 비가 내린다고 착각했다.
소리는 반복됐고, 누군가 뛰어오는 발소리였다. 화장실의 입구 쪽으로 돌아보니 은별이 서 있었다.
순간 은별이 날 걱정해서 따라온 줄 알았다.
은별은 입구에서 멈춰 선 채 나와 눈이 마주쳤다.
한참을 바라보던 은별은 변기 칸으로 들어가 나와 똑같이 먹은 모든 걸 게워냈다.
나는 입에 비누기를 침에 묻혀 대충 뱉어내고 은별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손바닥을 펴서 그녀의 등을 두드려 줬다.
한참을 두드리자 은별의 입에서 침만 줄줄 새고 있었다. 속이 괜찮아진 것 같아 보였다.
하지만 이제는 내 속에서 무언가 올라오는 게 느껴졌다.
은별의 어깨를 툭툭치고, 그녀가 고개를 내 쪽으로 돌렸을 때 손짓을 하여 비키라고 하였다.
난 다시 속에 것을 게워냈다. 은별은 내 등을 두드려줬다. 그렇게 한참을 서로 번갈아 가며 등을 두드렸다.
내가 멈추면 은별을, 은별이 멈추면 내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반복했다.
침묵을 먼저 깬 건 은별이었다. 은별은 더 이상 토해낼 게 없어지자, 울기 시작했다.
내 품에 들어와서 말이다.
아마도 나랑 같은 걸 봤을 터였다. 은별에게서 처음으로 약한 모습을 봤던 때였다.
사진 : pectus solentis (前바리반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