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건 자아보다 강력한 자취생의 귀찮음
솔직히, 도고가 비건이 되면 나도 건강하게 살 줄 알았다. 비건 이미지가 보통 그러니까. 신선한 채소 많이 먹고, 건강하고, 부지런하고. 비록 채식은 안 하지만 집에 비건이 있으니 그 라이프 사이클에 영향을 받을 수 있지 않을까? 집에서는 나도 고기를 안 먹으니까 군살도 좀 빠지고 생기도 도는 젊은이가 되지 않을까? 지금에야 알게 된 사실이지만, 이건 진짜 비건을 모르고 하는 말이다.
도고가 비건을 시작하고 벽돌집에서 가장 많이 먹은 음식은 떡볶이였다. 정말 말 그대로 떡볶이. 소스에 떡만 불려 넣어 볶아 먹는 떡 볶음. 그릇에 뻘건 건 떡볶이 소스요, 중간중간 흰 건 떡 아니면 그릇 바닥이었다. 어묵 소시지 치즈는 먹을 수 없지만 떡볶이를 포기하지 못해 만들어진 벽돌집 표 '비건' 떡볶이였다.
이 떡볶이 레시피의 주인은 나다. 부재료 하나도 없는 떡볶이를 오로지 하우스 메이트와의 식사를 위해 만들었다면 참사랑이겠지. 그 정도로 도고를 좋아하지는 않는다. 비건 떡볶이는 그저 요리하기 귀찮고 간단히 해 먹기 좋아하는 자취생의 5분짜리 요리법일 뿐이다.
도고가 비건이 되기 전, 도고네 부모님이 자취하는 애들 굶지 말라고 인스턴트 떡국을 한 박스 보내주셨다. 불행히도 도고와 나는 떡국을 좋아하지 않았다. 그래서 떡만 빼먹을 수 있는 방법을 찾다가 떡볶이를 먹게 된 거다
익기 쉽도록 얇게 썰어 나온 레트로트 떡국떡은 요리를 하면서도 배고픔을 참지 못하는 나에게 최고의 재료였다. 번거롭게 여러 재료 손질할 필요 없이 끓는 소스에 떡만 넣으면 떡볶이 완성이었다. 소스는 무조건 맵고 짜고 달게. 재료 본연의 맛을 얼마나 메롱으로 지져 놓았든, 설탕 간장 고추장만 있으면 떡볶이 맛을 흉내 낼 수 있었다.
도고에게 다행인지 불행인지는 모르겠지만, 벽돌집의 요리 담당은 나였다. 교환학생 경험을 기반으로 만들어진 '못 먹을 정도만 아니면 되는' 요리 실력은 도고의 비건 시대를 열었다. 심심한 맛에 길들여져 있던 도고의 연약한 혓바닥은 이박 표 집밥 훈련을 받은 뒤, 웬만한 짠기에는 녹슬지 않는 범선 바닥처럼 무던해졌다. 내 작품이다!
안 그래도 떡볶이는 헬스 트레이너들이 가장 싫어하는 음식이다. 영양은 없고 칼로리는 높다. (그래서 맛있겠지만.) 건강 망치는 맛이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막 학기 취업 준비에 정신없는 이박과 휴학을 던지고 대학교를 뛰쳐나온 도고에게 음식에서 얻을 수 있는 영양 뭐는 알 바가 아니었다. 젊은이들이 다 그렇듯, 자극적이고 쉬운 게 끌리는 게 요리라고 왜 예외가 아니겠어.
비건 떡볶이의 시대는 레트로트 떡국 컵에서 떡을 전부 빼먹고 나서야 막을 내렸다. 새것이나 다름없는 떡국 컵은 겹겹이 쌓여 재활용되었고, 애물단지처럼 남아 찬장 한 구석에 쌓이고 만 떡국 분말만이 한 박스의 떡국이 남긴 흔적으로 남았다. 이즈음 벽돌집에 경사가 생겼다. 바로 이박의 취업!
내 취업은 도고에게도 경사나 다름없었다. 내가 집을 비우자 도고는 스스로 요리를 해 먹기 시작했다. 귀찮음 베이스 노영양 식단으로부터의 해방이자, 요리하는 현실을 향한 무거운 한 발짝이기도 했다. 내가 배신감을 느낀 부분은, 도고가 정말 집밥을 잘 챙겨 먹었다는 거다.
나랑 있을 때 요리를 안 한 이유가 정말 귀찮음이었는지, 도고는 정말 야무지게 밥을 잘 차려먹었다. 도고가 채식주의자가 되고 난 후로 부모님이 보내주신 나물과 장아찌 반찬을 접시에 덜어(락앤락 째로 먹지도 않았다. 덜어내서 설거지거리를 만들었다!) 인스타에 식단 올리는 사람처럼 밥을 먹었다. (진짜 비건이기는 하지만) 진짜 비건처럼!
'진짜 저건 얼마나 갈까?
도고가 비건을 시작한다고 했을 때에도 안 했던 생각이 정갈한 비건 밥상을 보니까 들었다. 자취생한테는 뭔가를 안 먹는 것보다 깔끔하게 차려 먹는 게 더 어려운 법이다. 도인처럼 불자처럼 밥을 차려먹던(도인과 불자에 대한 편견이라면 사과합니다.) 도고였지만, 나는 도고가 자취생의 관성에 이끌려 인스턴트의 품으로 돌아올 걸 기다리고 있었다.
그리고 도고는 다시 인스턴트의 품으로 돌아왔다. 그 이름도 어마무시한 '채식 라면'에 이끌려. 자취생이 두 명이나 살고 있지만, 자취생 필수 구비 양식인 라면을 쟁여놓을 수 없는 비건의 처지에 감읍하사 대기업에서 친히 동네 마트에까지 입점의 손길을 내려 보우하신 덕분에 우리는 비건 라면을 맛볼 수 있었다. 비건 딱지가 붙었어도 라면은 맛있더라. 그게 문제였다.
라면은 떡볶이처럼 간단해서 좋았다. 집밥으로 슴슴한 음식을 먹으며 다시 미각을 회복하던 도고는 중독자들이 으레 그러하듯 한 숟갈의 라면 국물에 기꺼이 혓바닥을 담갔다. 하루에 한 끼는 라면으로 먹었다. 비건이 된다고 해서 자취생의 자아가 사라지는 건 아니었다.
그때는 '정크 비건'이라는 말을 몰랐다. 식단에서 말 그대로 육류와 동물 부산물만 뺀 사람을 이렇게 부르는데, 이 논리에 따르면 반찬 없이 밥만 먹어도 비건이다. 맥도날드에서 감자튀김에 콜라만 먹어도 비건. 겨울에 귤만 먹어도 비건. 고기를 먹지 않는 건 같지만, 영양 고려 없이 고기만 안 먹으면 비건이라도 건강에 무리가 간다. 딱 밥 먹기 귀찮아서 빵 과자 인스턴트로 끼니 때우는 자취생이랑 똑같다.
정크 비건 도고와, 안 그래도 회사를 다니면서 식습관이 무너진 내가 만나 쓰레기 같은 시너지를 냈다. 같이 밥을 먹는 주말이면 우리는 꼭 라면을 먹었고, 뒤집어지는 얼굴과 두드러기를 걱정하며 마트에서 라면을 집었다. 비건이랑 같이 살면 건강해진다? 비건의 자아만큼이나 강하고 오래가는 자취생 자아를 얕잡아 보고 하는 말이다.
도고가 날 때부터 부지런한 게 다행이었다. 하루에 쓸 수 있는 양이 한정되어 있는 '나 추스르기 에너지'를 회사에서 다 쓰고 돌아오는 나와 달리, 도고는 집에서 그 에너지를 썼다.
"우리, 라면 끊어야겠어!"
도고는 인스턴트를 끊었다. 배달앱도 삭제했다. 일주일에 한두 번씩 꼭 야식으로 비건 버거를 시켜먹었는데, 그것도 끊은 거다. 냉동식품이랑 배달음식 끊는 건 비건이나 자취생이 아니어도 대단하고 어마어마한 일이라는 걸 전 세계 사람들이 다 알았으면!
도고는 자기 식사를 다시 건강하게 바꿔놨다. 더 건강하게 먹을 수 있는 채식 요리도 시도하고 있다. 나야, 회사 때문에 기본적인 식습관을 바꿀 수는 없지만 도고가 집에서 요리를 할 때마다 조금씩 얻어먹는다. 두부랑 소이 마요로 만든 두부마요 샌드위치는 매일 아침으로 먹고 싶을 만큼 맛있다.
아무튼, 주절주절 말이 길었지만 결론은 이거다.
"비건이 건강하게 먹는다는 말은 다 거짓말이야!"
그렇게 독하게 냉동식품과 배달음식을 끊어낸 도고도 지금은 배달앱으로 비건 라면을 시킨다. 내 주변에 비건은 아직 도고 한 명뿐이지만, 도고는 내가 아는 비건 중에 가장 인스턴트를 좋아하는 비건이다.
비건을 옆에 두고 '나도 건강해지겠지!' 하는 마음을 먹는 건 달리는 지하철 안에서 유튜브 뒤로 가기를 누르며 지하철이 뒤로 가기를 바라는 것만큼이나 부질없다. 굳이 바꾸고자 한다면, 비건보다는 부지런하고 자기 관리가 철저한 사람을 옆에 두는 게 낫다.
쓰다 보니 나도 모르게 부지런한 비건 옆에서 변화를 경험한 사람의 간증처럼 마무리를 했는데, 그 정도는 아니다. 도고는 누군가를 변화시키기에는 평균적으로 부지런한 사람이고, 나는 그런 친구에게 감읍해서 나를 바꾸기에는 평균보다 더 게으른 사람이기 때문이다.
이제 둘 다 대학을 졸업하고 회사원과 프리랜서로 벽돌집을 지키고 있지만, 여전히 자취생 유전자는 변함없이 우리를 구성하는 주된 성분이다. 어제보다 오늘이 덜 '정크'한 것에 만족하는 것. 그게 자취생 비건과 그 하우스 메이트의 길이 아닌가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