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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eegang Oct 08. 2022

사소한 일기

2022년 10월  8일



1


가을만 되면 허리병이 도진다. 연이어 무리를 했던 탓이기도 하다. 허리가 아프니 삶의 질이 떨어진다. 침도 맞고 물리치료도 받는다. 나는 죽음을 생각한다. 아프면 살고픈 의욕이 더 생긴다는데 나는 죽음을 먼저 생각하고 죽어도 되겠다는 생각이 든다. 왼쪽 골반뼈도 아프고, 허리 신경이 눌린다는 느낌도 든다. 순간 찌릿 다리 힘이 주어지지 않아 푹 주저앉게 된다.


‘뭔 무서운 병이 들었나?’



2


교정을 보다가 눈도 아프고 지겨워져 커피 한 잔을 들고 발코니에 섰다. 하늘도 보고 창밖 키 큰 나무도 보고 나무 사이로 골목길을 지나가는 사람들의 표정도 살핀다. 모자를 쓴 사람, 빨간 운동화를 신은 사람, 그 짧은 시간에도 수없는 사람이 각기 다른 몸짓과 걸음으로 지나간다. 발코니 식구들도 눈여겨 살펴본다. 나의 작은 발코니 식물들도 하나같이 다르다. 같은 사랑초라도 피는 계절이 다르고 성향이 다르고 생김새도 다르다. 가을은 보위에나(큰사랑초) 계절이다. 예쁘게 피었다. 5월이 적기인 작은사랑초도 흰사랑초도 몇 송이 피었다. 제철이 아닌데도 꽃송이를 피워 올리니 기특하다. 바깥 날씨가 차지니 발코니 기온이 적당했던가. 새순이 막 올라오고 있다. 봄에 올라오는 새순은 단단하고 실하게 올라오지만, 가을에 올라오는 새순은 연하고 부드럽게 올라온다. 봄은 추운 겨울을 이겨냈기 때문이고, 가을은 더운 여름을 이겨냈기 때문이다. 봄나물은 뿌리가 깊고 가을 나물은 뿌리가 얕다는 말과도 상통한다. 발코니에서도 식물들은 계절을 읽는다.


울도먼지거미의 거미줄



라일락은 프랑스에 가 있는 동안 햇볕에 잎이 타버렸다. 창 쪽으로는 잎이 다 말랐다.

들고 있던 커피 잔을 내려놓고 가위를 찾는다. 마른 가지를 쳐주어야겠구나 싶어서다. 까맣게 타버린 나뭇잎도 털어냈더니 말끔해졌다. 가지치기에만 전염하다 그만 거기 거미가 있다는 걸 깜빡했다. 엉거주춤 붙어있던 거미줄이 동강이 나고 거미는 놀라서 초록 수국 이파리 뒤쪽에 달라붙어 떨고 있다. 미안하다 미안해. 가위 끝으로 거미를 들어 올려 라일락 가지 끝에 올려놓는다. 종일 가지 끝에 매달려 있던 거미가 밤이 되니 일을 시작한다. 이쪽저쪽 길게 금을 긋고 방사상 연결을 짓는 것 같더니 인기척에 그만 여덟 개의 발을 접고 눕는다. 죽은 듯 매달려 있다. 하룻밤 하루 낮을 그렇게 있더니 엊저녁 다시 집을 지어놓았다. 이토록 치밀하게. 이토록 질서 있게. 이토록 짜임새 있게. 이 작은 미물의 삶이 이토록 장엄할 수 있다니! 이토록 숭고할 수 있다니! 놀랍다. 도대체 거미는 뭘 먹고사는 걸까. 잘 짜인 거미줄을 살펴보다가 사진 한 컷을 찍고 분무기로 물을 뿌렸다. 거미는 이슬을 먹고 살지도 모르는데 물이라도 먹으라고.





촘촘하던 거미줄에 물을 뿌리면 이렇게 변형된다.




3


몸이 아프면 나는 왜 남편이 불쌍해지는 걸까. 내 몸이 아픈데 내가 불쌍한 게 아니라 남편이 불쌍해 보인다. 어제 새벽 아직 어스름에 출근하는 남편이 현관문을 나서자 발코니로 나가 남편이 주차장을 벗어나 달려가는 차 뒤꽁무니를 오래도록 바라보았다. 습관처럼 나는 그래 왔다. 현관문 닫히는 소리가 들리면 하던 일을 멈추고 누웠다가도 일어나 발코니로 달려간다. 그저 그들의 뒷모습을 바라보는 일이 나의 일인 것. 그저 뒷모습을 묵묵히 바라보는 것만으로 기도가 되는. 그들을 향한 무언의 기도는 묵묵히 뒷모습을 바라보는 것. 그저 발코니에 서서.


토요일인데도 그는 출근을 했다. 현장이 그런가 보다. 평생 본사에 있던 사람이라 격주 토요일 근무하는 일을 버거워한다. 2년 가까이 되어 적응할 만도 한데 힘들어하는 것이 보인다. 월요일 쉰다는 희망으로 힘을 얻어 나가노라 말했다. 엊저녁 금요기도 다녀오는 길 차 안에서 내일도 출근하느냐, 묻는 내게 그렇게 말했다. 짠하다. 가장의 어깨가 무겁다. 내가 일을 좀 더 했어야 하나 하는 생각이 자꾸만 든다. 요즘에 와서. 나도 일할만큼 일을 한 사람인데, 돈도 적당히 벌어본 사람인데 왜 이런 생각이 드는 걸까. 그저 미안해서다.



4


“팀장님은 왜 천문학을 선택하셨어요?”

“어릴 때 극장에서 <E.T.>를 봤거든요.”


썰렁한 농담이어서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생각하고 있는데 팀장이 말을 이었다.


“이티는 착한 애잖아요. 손가락으로 빛을 밝혀서 사람들 다친 데도 고쳐주고, 친구도 되어주고, 엄마 따라 극장 가서 그 영화를 봤는데 어느 장면에선가 이티가 저를 보는 거예요. 카메라를 보는 게 아니라, 모두를 보는 게 아니라, 극장 맨 앞 좌석에 앉아 있는 나를 보는 거죠. 내가 자기를 보는 걸 알고 있다는 표정을 지었어요. 아직도 그 순간을 기억해요. 이티가 마지막에 자기 별로 돌아갈 때 얼마나 울었는지 엄마가 부끄럽다고 할 정도였어요. 그 이후로 밤이 되면 하늘을 올려다보는 습관이 생겼어요. 어릴 때 친구가 없었거든요. 그런데 하늘을 올려다보면 거기 어딘가에는 내 친구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팀장을 데려다주고 집으로 가는 동안 나는 하늘을 올려다보는 어린 팀장의 얼굴을 상상해봤다. 예의 바르고 말을 가려하고 자신의 사적인 부분을 잘 얘기하지 않는 그녀가 내게 틈을 보인 순간이었다. 이상하게도 그녀의 말이 위안이 되어서 나는 조금 놀랐다. 잠자리에 누워서야 어쩌면 그것이 그녀 방식의 위로였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최은영, 밝은 밤>



이런 문장을 만나면 위로가 된다. 썰렁한 농담 같은 말속에 들어있는 진실한 내면을 읽을 수 있어서다. 팀장이 틈을 보인 순간 위안이 되어서 놀랐다는 말에 고개 끄떡여진다. 어릴 때 극장에서 <E.T.>를 봤거든요, 같은 썰렁한 대답, 마음이 무방비로 풀어질 것 같은 대답. 나도 너도 이런 대답 속에 머물러있었으면 좋겠다. 사소함이, 사소함이 아닐 수 있다는 것. 사소함 너머 또 다른 세계는 무한하다는 것. 이티 너머 천문학이 있었던 것처럼.






*매일 일기를 씁니다. 매일의 루틴을 만든다는 것, 저 자신과의 약속이기도 하지요.

그 일기 중 하나, 가끔 여기 올려놓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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