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leegang Jul 07. 2021

만원 한 장의 가치

고마웠던 사람들


 조용하던 톡방에 안부가 올라왔다. 안부에 힘입어 그만 그날을 적고 말았다.


 “92년 7월 오늘, 저는 서안복음병원에서 첫딸을 낳았네요.”

 “입덧 중일 땐가 퇴근하려는데 실장님이 과일 사 먹으라며 만 원짜리 지폐 한 장을 주셨어요. 그때 저 진짜 가난했거든요.ㅎ”


  만원 지폐 한 장의 가치를 생각하면 세상의 이치를 펼쳐 읽는 것 같은 느낌. 나도 누군가에게 그러한 이치를 펼칠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지 그런 생각을 그때 했었다.




  툭 올라오는 안부, 그저 새삼스럽기도 낯설기도 한 그런 방이었다. 그때를 기억하면 내 젊음의 한 페이지를 주워 담을 수 있는 시기이지만 시간의 간격에는 일터와 육아라는 곡진한 순간이 더 짙어선지 그 시의 사람들을 잊고 지냈고 마치 잃어버린 것처럼 무심해지기도 했다. 그런데 순간 그 장면이 선명하게 떠올랐다. 마침 딸아이의 생일이었고 그때 회자된 분만실 앞 장면과 입덧하던 시기의 날들이 순식간에 오버랩되어 나를 장악했다.


 입덧이 심했던 그때 오전 시간은 죽음과도 같았다. 겨우 출근해서 휴게실에 누워있는 시간이 많았다. 그나마 오후는 기운이 나서 일을 할 수 있었다. 내가 하는 일은 다른 누군가 대신해줄 수 없는 것도 다행이었다. 크게 미안해하지 않아도 되었으니까. 오전에 미처 하지 못한 일을 늦은 밤 시간까지 마무리를 하고 퇴근하곤 했다. 어느 날 당직을 서던 실장님이 지친 내 모습이 안쓰러웠던지 지갑에서 만 원 지폐 한 장을 꺼내 쑥 내밀었다. 쑥스럽고 어색했던 나의 손, 어찌할 바를 모르는 나를 밀쳐내며 가방 속으로 쏙 넣어줬던 지폐 한 장. 그날 시원한 배 한쪽 먹었으면 딱 좋겠다는 생각을 내도록 했다는 것을 알았던 것처럼. 과일 하나 못 사주겠느냐는 눈빛을 보내며 그는 어서 퇴근하라고 문을 열며 재촉했다. 그때 배를 사 먹는 일은 사치였고 호사였던 것. 배 2개와 바나나를 사 들고 감격에 겨워 걸음이 빨라졌던 그 순간을 나 아닌 누가 짐작이나 하랴. 지폐를 건너 준 그는 정작 기억을 못 하는데 나는 그림을 그릴 수 있을 정도로 그날이 선명하다. 그때를 생각할 때면 자세를 바로 세우게 되는 것이다.


 둘이 누우면 딱 떨어지는 좁은 단칸방, 출산이 다가오기 전에 그곳을 모면해야 했다. 출산 전의 목적은 방 두 칸으로 이사 가는 것, 그 소박한 꿈이 어려운 사람에겐 먹고 싶은 것 입고 싶은 것이 자유롭지 않다는 것은 아는 사람만 안다. 삶은 절제로 똘똘 뭉쳐있었다. 소유하지 않고도 인생을 즐길 줄 아는 행복을 그때 알아서 다행이었다. 긍정의 문을 열어둘 수 있었던 것은 매일 성경을 읽으며 만난 하나님과 나만의 약속을 믿었기 때문이다. 눈을 감으면 비단길이 보였다. 내일은 달라질 것이라는 믿음이었다. 그게 나를 이끌었다.


 출산 전날까지 일을 했다. 그리고 근무하던 병원에서 첫딸을 낳았다. 초보 남편과 늙은 친정 엄마가 분만실 앞에서 초조하게 기다리는 장면은 오랫동안 직원들 사이에서 회자됐다. 사위와 장모가 첫딸과 외손녀를 기다리는 분만실 앞 풍경은 상상만으로도 짐작이 되지 않는가. 늦둥이 막내딸의 분만을 바라보는 늙은 엄마의 마음, 첫딸을 기다리는 젊은 아빠의 마음. 두 마음이 분만실 앞에서 흔들리고 있었던 것. 눈물을 흘리며 안타까이 바라보고 있었던 것. 그 장면이 영화의 한 장면이었노라고 오랫동안 회자된 건 이유가 있었을 게다. 그 분위기를 가늠하고 상상만 할 뿐이다.


 일을 하지 않으면 안 되는 사람과 일은 하지 않아도 되는데 하는 사람의 차이,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직감적으로 다가오는 느낌이 있다. 해야 하는 것과 하지 않아도 되는 것의 차이는 사소하다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그 이면을 들여다보면 엄청난 페이소스를 맛보게 한다. 나는 해야 하는 사람이었다. 하지 않으면 안 되는 사람. 일을 해야만 구멍 난 곳곳을 메울 수 있는 환경. 그것이 때론 서럽기도 했지만 바르게 설 수 있는 바탕이 되었고 동력이 되었다.

 

 그땐 그럴 수도 있지 했던 것이 상처가 되기도 하고, 그때 상처가 됐던 것이 이해가 되기도 한다. 그 순간순간을 맞닥뜨릴 수 있었던 것은 고마운 것들의 힘이었다. 그때 불편하고 민망해서 밀쳐두었던 것들, 그때 제대로 읽어내지 못해 외면했던 것들도 돌아보니 사랑이었다.


 고마운 사람들 고마웠던 사람들 일일이 찾아가 푹 익힌 진심을 담아 안부를 묻고 싶다.



“살길은 한 걸음을 내딛는 것이었어. 또 한 걸음. 언제나 똑같은 그 한 걸음을 다시 내딛고 또 내디뎠지….”
 -생텍쥐페리 <인간의 대지> 중
이전 13화 스물네 번의 겨울과 봄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