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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eeds Nov 15. 2019

우리, 바람으로 다시 만나자.

작년 설이었습니다. 집에는 저와 저의 반려동물 토시, 둘뿐이었습니다. 열다섯 번째 설을 맞이한 토시는 이제 무지개 다리를 건너려는지 며칠째 아무것도 먹지 않고 누워 가쁜 숨만 쉬고 있었습니다. 그러다 저녁 10시쯤, 제 품에서 세상을 떠났습니다. 15년동안 가족으로, 친구로 함께 살며 저의 고등학교와 대학교 입학, 취직까지 다 지켜봐 준 아이였습니다. 7개월 꼬꼬마 때 처음 만나 열다섯 노견까지, 토시 삶의 크고 작은 삶의 변화를 저도 함께 겪었습니다. 설이라 반려동물 장례식장 잡기가 힘들었습니다. 남양주에서 멀리 일산까지 가 작은 몸을 화장하고, 유골을 가지고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5kg의 몸은 재가 되어 날아갔고, 도자기 유골함에는 한 줌의 뼛가루만 남았습니다.


사실 몸을 땅에 묻어주고 싶었습니다. 다른 소동물이나 곤충, 미생물이 토시의 몸으로 배를 채우고, 토시의 몸이 그들의 세포를 이루길 바랐습니다. 그렇게 자연 일부가 된다면, 그곳에서 만나는 새나 작은 동물로 다시 만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너무 보고 싶으면, 사진을 보는 것으로도 힘이 들면 그곳에 찾아가면 되니까요. 그곳의 모든 생명이 토시로 보여 작은 벌레조차도 어여삐 보일 거로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반려동물의 사체를 땅에 묻는 것은 인간의 법으로는 불법이니 그렇게 할 수는 없었습니다. 대신 한 줌도 되지 않는 골분을 묻으며 욕심을 내보았습니다. 뼛가루로도 가능하다면, 이곳에서 자라는 풀과 꽃, 나무로 다시 만나자고. 그리고 꽃과 나무에 깃들어 사는 다른 생명으로 또 만나자고. 기억은 내가 가지고 있을테니, 몸으로는 그렇게 순환되기를 바랐습니다. 제가 기억이 아닌 눈으로 저의 반려동물을 다시 만날 방법은 이것뿐이었습니다.


야생에서 동물이 죽으면 그 사체 하나로 수많은 동물이 식사합니다. 커다란 사자나 하이에나부터 독수리와 같은 새까지 많은 동물이 차례대로 굶주린 배를 채웁니다. 작은 곤충이나 미생물까지 더하여보면 수천, 수만 개의 생명이 그 사체 하나로 세포를 이룹니다. 사체 하나가 거대한 우주를 구성하는 것이지요. 먼 일이 아닙니다. 우리나라의 야생에서도 같은 일이 일어 납니다. 동물뿐 아니라 식물도 마찬가지입니다. 지금 고개를 들어 밖을 바라보세요. 산이 보이시나요? 산은 가만히 고요해 보이지만 사실 그 안에서는 이렇게 복작복작하고 경이로운 생명의 재순환이 일어납니다. 그저 인간의 일이 아니라 생소해 보이는 것이지요.


저는 자연의 순환을 사랑합니다. 촘촘히 이어져 있는 자연의 그물망은 언제나 저를 벅차게 합니다. 그래서 몇 해 전, 제 왼쪽 팔에 ‘모든 것은 연결되어 있다’는 의미의 문신을 새겼습니다. 물의 이미지를 담았습니다. 하늘에서 내리는 비가 강과 바다를 이루고, 또 언젠가는 산속 의 나무, 언젠가는 하늘의 새, 언젠가는 인간의 몸속에서 머물며 이 모든 것이 연결되어 있다는 의미입니다. 정작 이 의미를 새긴 제 몸은 자연과 연결되어 있을까요? 죽으면 흙으로 돌아간다는 이야기를 합니다. 죽고 난 몸이 땅에 묻히면, 먼저 그곳에 살고 있던 다른 생명이 각자의 방식으로 장례를 치러 주고 몸은 분해됩니다. 굶주린 생명들에게 단비 같은 양식이겠지요. 그렇게 몸 일부는 다른 생명의 세포를 이루며 다시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하지만 인간으로 나고 자란 저는, 죽으면 태워져 재가 되고, 제 뼈는 봉안당에 갇힙니다. 관에 누워 매장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저는 여기 한국에서 인간으로 태어났고 도시에 살기 때문에 생명의 순환은 커녕 제 살 한 점도 마음대로 자연에 줄 수 없습니다. 잘 아시다시피, 우리나라는 현재 풍장을 하지 않으니까요.


어디 제 몸뿐일까요. 사과 한 알이 번식의 희망을 품고 만든 작은 씨앗조차, 저는 사과의 바람대로 땅에 심어줄 수 없습니다. 노란 음식물 쓰레기 봉투에 넣어 버리라고 배웠으니까요. 도시에서 나고 자란 저는 자급자족을 배우지 못했습니다. 기껏해야 화원에서 파는 바질 모종을 화분에 옮겨 심으며 뿌듯함을 느낄 뿐입니다. 야생동식물의 삶터를 빼앗아 만든 넓은 논과 밭에서 자란 식물이 마트에 진열됩니다. 공장식 축산을 통해 고통스럽게 자란 동물들이 고기가 되어 마트에 진열됩니다. 저는 이곳에서 식물과 동물을 사고, 살만 취한 후 뼈와 씨앗은 쓰레기로 내어놓습니다. 제 안에 들어오는 모든 생명은 저의 피와 살을 구성할 뿐, 저는 다른 생명을 구성하지 못합니다.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자연에게 무궁무진하게 많은 것들을 받고 누리며 자란 저는, 사는 동안 지구를 오염시키다가 죽어서도 자연에 도움이 될 수 없습니다. 생명의 순환은 저에게서부터 단절됩니다. 저같은 인간이 지구에 70억입니다. 순환은 인간에게 와서 멈춥니다. 편안함은 취하면서 이렇게 불평을 늘어놓는 저는 모순적입니다. 제가 직접 농사짓고 가축을 기르지 않아도 먹고 살 수 있습니다. 지금 정해진 장례의 질서 덕분에 어쩌면 쾌적한 삶을 사는 건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한 번쯤 이야기해보고 싶었습니다. 저부터도 인간이 이 지구에서 어떤 존재인지 자꾸 잊어버리니까요.


다시 겨울입니다. 토시의 뼛가루가 묻힌 자리에는 풀과 꽃이 자랐습니다. 그저 잡초와 소박한 들꽃일 뿐이지만 제 눈에는 마치 토시처럼 어여쁘게 보입니다. 낙엽이 떨어지고 있으니, 이제 곧 눈이 쌓이겠지요. 삶이 바빠 자주 찾지는 못하지만 그곳에 가면 가만히 흙을 만져 봅니다. 풀과 꽃, 소나무도 쓰다듬어봅니다. 다시 한 번 그 아이를 만지고 눈을 맞추는 것처럼, 마치 의식처럼 인사를 합니다. 한편으로는 꿈을 꿉니다. 한 번도 살아보지 못했던 동식물의 세포로 삶을 이어가는 꿈이요. 지금의 몸은 무거워 바람에 날 수 없지만, 나중의 어떤 날에는 바람을 타고 날아다닐 수 있지 않을까요. 민들레 홀씨도 참 좋을텐데요. 그때가 되면 이 글을 읽고 있는 당신과도 바람처럼 만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이글은 빅이슈 187호에 본인이 기고한 글을 수정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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